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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이상봉 2009.09.27 01:03 조회 수 : 6085

 

1.교회의 요소로서 목사와 예배와 예배당

어떤 단체가 교회라고 말할 때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가? 어떤 단체가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떤 요소들이 있어야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거기에 목사가 있는가 하는 것과 그들이 예배를 보는가 하는 것 그리고 예배당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단체에 믿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할지라도 목사가 없거나 예배가 없거나 예배당이 없다면 그것을 교회로 여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한 조건으로서 성도가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하는 요소는 거기에 {목사}나 {전도사} 혹은 이름은 무엇이라 붙이든지 간에 그 같은 일종의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후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책임지고 교회의 모든 사무적인 일과 영적인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교회에 속한 형제들을 지도하고 다스리지만 실제로는 형제들을 대신하여 거의 모든 영적인 일을 도맡아 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아닌 소위 평신도라는 형제들은 그들의 사역에 부속되어 다만 시키는 일에 순종만 하면 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다음 요소는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성도가 있고 목사가 있더라도 주일마다 혹은 기타 정한 날에 예배가 드려지지 않으면 교회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선교 단체나 봉사 단체에는 멤버로서 믿는 형제들도 있고 또 지도자로서 목사도 있지만 매주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이를 교회라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예배라 할 때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두가 한 곳에 모여서 말씀을 들으며 일정한 예식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굳이 예배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말씀 집회 혹은 경배와 찬양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주일날 모여서 말씀을 듣는 집회는 주간 중에 있는 기타의 집회 즉 기도 집회나 성경공부 모임 등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이런 것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예배라 불리는 이 말씀 집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집회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주일에 예배당에 가서 목사의 말씀을 듣는 예배는 없어서는 안될 교회의 요소로 여겨진다. 실제로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교인들로 하여금 매주 빠짐 없이 예배당으로 와서 예배를 보게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어 중 하나는 주일성수(主日聖守)이다. 성수 곧 여기서 거룩히 지킨다는 개념은 주일마다 빠짐 없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개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 년 오십 이 주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면 목사도 자신도 다 그의 신앙 상태가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다음 요소는 그러한 예배를 드릴 장소 곧 {예배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당이란 평소에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고 오직 형제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거나 기타 집회를 하는데 쓰일 전용 장소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집회 장소를 성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교회(당) 혹은 예배당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임을 대표하고 나타낼 수 있는 이런 장소와 건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반드시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단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다가 목사나 전도사가 부임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성도들이 힘을 모아 예배당을 세우게 된다. 혹은 먼저 예배당을 짓고 목사가 부임하기도 한다. 이렇게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또 목사가 지도를 하고 ○○교회라고 하는 간판을 붙인 일정한 건물이 있게 되면 그것은 정식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모두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이런 것이 갖추어지면 그 교회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밖에도 사람들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고 형식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교회가 일정한 정도의 교인 숫자를 확보해야 하며 또 일정한 정도의 재정을 갖추어 소위 [조직교회]와 [자립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회 헌법을 보면 목사와 장로가 세워지지 못한 교회는 미조직교회이며 그나마 장년 신자의 숫자가 15명이 되지 못할 때는 미조직교회도 되지 못하고 오직 기도회 모임이 될 뿐이다. 이런 것들은 다 외적인 기준에 따라 교회를 말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목사나 장로 집사 등이 있고 성도의 숫자가 어느 정도 커서 규모 있는 조직이 되는 성도들의 모임은 교회이고 그렇지 못한 미조직, 소규모의 모임은 교회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 모임의 성질이나 영적 수준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2.목사와 교회

먼저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사의 존재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교회를 다스리며 성도의 신앙을 책임지고 지도하는 목사(목자)라는 직분이 없다. 사도도 있고 선지자나 교사, 장로는 있지만 교회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머리의 위치에서 교회 전체의 책임을 지고 성도들을 키우며 목양하는 지도자로서의 목사는 없다. 성경에서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은 장로이지 목사가 아니다.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는 감독자라 해도 질서 유지를 위해 형님의 입장에서 형제들을 돌보는 형제 중의 한 사람이지 주님을 대표하는 일종의 그리스도의 使者가 아니다. 교회에는 머리이신 주님을 대신하거나 대표하는 역할을 위임받은 자는 없다.

물론 에베소서 4:11에는 목사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의 은사 곧 목자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지 목사의 제도를 말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도 전적으로 교회 일만 맡아서 다른 형제들의 영적 삶을 주관한 경우가 없다.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목사직을 맡은 형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르치는 교사나 다스리는 장로와 마찬가지로 엡4장에서 말한 목사도 그가 봉사하는 일의 내용이 목자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지 그의 지위가 목자의 지위에 있어서 전적으로 성도들을 주관하고 인도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의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장로 특히 가르치는 장로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장로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해서 형제들을 감독하는 것이지 교회의 모든 영적인 일을 전담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장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도나 교사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늘날의 목사와 같은 일을 하는 직분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곧 초대교회에 존재했던 모든 직분과 의식(儀式)과 일(事業)은 인간적인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도 아니고 교회를 조직화하는 가운데서 나온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제도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교회에 세워진 모든 직임과 행해지고 있는 모든 일은 다 교회의 실제적 필요에 의해 세워지고 행해지는 것이므로 그것이 필요 없게 되면 언제든지 바꾸거나 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닌 것이다. 어떤 직임과 사업이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는 필요하여 존재했다 할지라도 지금은 그것이 교회에 실제적으로 필요하지 않고 도리어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 현재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생명의 노선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필요하여 성전이 세워지고 존재했지만 교회가 세워진 후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고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성전은 폐해졌다. 마찬가지로 오늘 목사직은 성경의 지지도 받지 못하지만 설사 그때 그 비슷한 직임이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 그것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을 하는데 필요하지도 않고 도리어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빌립보서 1:1을 보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보게 된다.

첫째는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인식함에 있어서 [빌립보교회]라는 고유명사로 간판을 걸고 있는 어떤 조직화된 교회를 빌립보교회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교통하고 있는 빌립보 지역 내의 모든 교회들(성도들의 모임)을 하나의 빌립보 교회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그때에도 빌립보나 골로새, 예루살렘에는 이미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많은 개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형편상 교제만 소규모로 나누어 가졌을 뿐 마음으로 다 한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단위 지역 내에서 아무 제한 없이 교통을 가졌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나 초대 교회 형제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오직 우주에 하나 뿐이며 그것은 시대와 공간과 구성원들의 종류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 큰 몸인 교회(the church)에서 구별되어 특별히 [○○교회]라고 불릴 수 있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편의상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울타리 내에 있는 교회(형제들의 모임)를 그 울타리 되는 단위 지역 명을 붙여서 [○○교회]라고 부를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빌립보교회라는 식으로) 교회 앞에 붙여진 지역명조차도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특정 단위 지역 명을 붙여서 [○○교회]라고 부른 교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개인 집에 모인 교회를 그 집 주인인 형제의 이름을 붙여 [아무개교회]라고 부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롬16:5, 고전16:19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 또는 [그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을 썼으며 골4:15에서는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표현도 썼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교회 명칭은 다 특별히 지적하려 했던 어떤 형제들의 무리를 지적하기 위해 편리한대로 무슨 무슨 교회라고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한 목사 혹은 한 지역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조직화되어 독자적으로 일을 하고 독자적인 교제를 나누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위에서 말한 초대 교회와는 그 형태와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철저하게 조직화되었기 때문에 한 교회는 단위 지역 내에 있는 다른 교회(형제들의 모임)들과 실제적으로 전혀 교제를 가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교파에 속한 교파 교회들은 그 교파에 소속된 이웃 교회들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몸의 생명을 함께 누리는 교제가 아니라 행정적이고 지엽적인 교제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는 교회의 직분이 {감독들}과 {집사들}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는 다 일반 성도들 뿐이다. 집사는 무엇인가? 그들은 형제들을 사무적인 면에서 섬기기 위해 세워진 사람들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아서 교회의 업무를 보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회의 일꾼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의 재정, 회계 업무나 총무, 영선 관리, 찬송 지도, 구제 등을 맡은 사람이 집사이다. 감독은 무엇인가? 감독은 곧 장로를 가리킨다.(행20:17,28, 딛1:5,7) 장로란 표현은 교회에서의 지위를 말한 것이고 감독이란 표현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기능을 말한 것이다. 장로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온전히 유지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감독하도록 세움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목사는 없다. 오늘날의 목사와 같은 사역자는 장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장로는 그 교회 형제들 중에서 영적으로 깊이가 있고 신실한 사람을 뽑아서 세우는 것이지 밖에서 파송되어 들어오고 또 사정이 생기면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목사는 어떤 면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사도는 장로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가?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장로는 교회를 돌보는 일을 하지만 사도는 말씀(복음)을 전하며 사역하는 자라는 점이다. 장로는 그 교회 출신으로서 그 교회에 고정적으로 머물면서 교회를 돌보지만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각처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을 교회로 세운다. 그는 필요에 따라 한 교회에 장기간 머물면서 사역을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교회를 세우고는 거기에 장로를 세우고 곧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교회와 관련된 일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요 말씀 사역(복음 증거)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목사와 사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사도는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말씀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에 머물며 장로 역할을 하지 않는데 비해 오늘의 목사는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점에서는 사도와 같지만 교회에 계속 머물러 장로 혹은 그 이상의 역할을 계속 담당한다는 점에서 사도와 다르다.

목사는 장로와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장로는 일반 형제들 가운데서 선정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내심을 받아 나가서 사역하는 사역자가 아니다. 그들은 가정과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는 교회 형제 중 한 사람일 따름이지 말씀 사역자도 전도자도 아니다. 장로는 다만 교회를 섬기기 위해 선출된 그 교회의 형제 중 한 사람이다. 또 장로는 오직 그 교회만 책임지고 감독하지 다른 교회로 파송되어 감독의 일을 보거나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며 사역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목사는 밖에서 파송되어 오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장로와 다르고 또 직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지 않고 사역자로서 다른 일을 다 내려놓고 말씀 증거나 기타의 교회 일을 전담한다는 점에서 장로와 다르다.  

사도들의 책임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사도는 교회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범위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어떤 지역 교회의 장로가 되거나 그 교회 소속의 사도가 된 적이 없었다. 교회는 언제나 장로들이 돌보도록 했다. 그는 자기가 세우거나 돌보는 각 교회들에 대해 철저히 사역자(사도)로서의 입장을 취했다. 성경 안에는 그 어떤 사도도 한 지역 교회에서 교인들을 다스린 예가 없다.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머물게 하였지만 그것도 디도로 하여금 교회의 일을 직접 처리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디도로 하여금 그레데의 각 성에서 장로들을 세워 그 장로들로 하여금 교회의 책임을 지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자처하는 목사들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는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 성도들을 주장하는 일은 성경적인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역과 교회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교회의 일은 교회(장로)에 속한 것이요 사역은 사역자(사도)에게 속한 것이다. 이 둘이 다 중요하다. 사역은 사역대로 귀하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진 고유한 일이고 교회의 일은 교회의 일대로 귀하며 고유한 특성을 지닌 것이다. 사역은 사역자가 아니면 할 수 없고 교회가 담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일도 교회가 아니면 담당할 수 없는 것이며 사역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다.

만일 사역자(사도)가 어떤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백 명 정도 구원했다 하자. 그런데 사역자가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집회를 가지게 하며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게끔 지도하지 않고 그 교회에 계속 머물면서 계속 직접 말씀을 전하고 계속 성도들의 영적 삶을 직접 지도해 나간다면 거기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사역만 있을 뿐 교회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형제들의 모임에서는 모든 것이 아직 사역자의 손에 있고 그 형제들 자신의 손에 맡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반드시 형제들 손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교회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경험하며 생명 안에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일은 교회의 각 형제들이 주님을 알고 믿는 일에 모두 온전케 되는 것이지 이미 주님을 알고 있는 주의 종 사역자가 주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역자의 성장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앞으로 계속될 사역과 관련된 문제이지 교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사도적인 위치에 서 있는 목사가 장로처럼 한 교회에 머물면서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지 못하도록 계속 사역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사도들을 한 교회에 머물게 하여 그 교회의 목사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고 사역자가 한 교회에 정착하여 그 교회의 책임을 직접 짊어지도록 명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형제들도 어떤 사도적인 사역자가 자기 교회를 담임하면서 그가 교회의 모든 영적 문제를 책임지고 담당해 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교회 형제들은 그들의 교회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비록 현재는 여러 면에서 부족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들 위에 세워주신 장로들을 소중히 여기고 형제들 안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여러 은사들을 잘 붙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교회는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하에 성장하고 온전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역과 교회의 관계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사도는 나가서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로 교회가 되게 한다. 그 후 그들 중에서 영적으로 깊이 있고 신실한 사람을 택하여 장로로 삼고 그로 하여금 그 교회의 일을 돌보며 다스리는 책임을 지게 한다. 그리고는 사도 자신은 또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워진 교회는 장로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형제들이 주의 성령께 복종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누리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역은 사역대로 진보가 있고 교회는 교회대로 진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형제의 관계에 서 있다. 교회라는 몸이 온전케 되고 그 생명이 충만해지려면 반드시 각 지체인 형제들이 모여서 서로 힘을 합하여 교회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교회에 속한 모든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서로 사랑하고 봉사하며 책임을 지는 가운데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 장로는 형제들이 서로 돕고 연합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돌보고 감독하는 자이지 형제들의 일을 대신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 형제들의 일을 대행하고 각 지체로부터 나타나야 할 은사를 혼자서 대신하는 것은 교회의 진보와 성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교회 안에는 피동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한다. 사역자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장로가 되었든 혼자서 혹은 몇이서만 움직이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선교회나 복음적인 사업단체이거나 사역이다. 형제들 모두가 각각의 직임과 은사를 따라 일하고 장로들은 감독하는 것이라야 교회이다. 교회는 반드시 형제끼리 서로 돌보아야 한다. 천사나 그리스도의 사자나 어떤 특별한 지도자가 자기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래서는 안된다. 몸의 원리는 각 지체가 각각 기능을 발휘하여 서로 섬김으로써 몸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오늘의 목사제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이것은 기독교(회)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목사직과 같은 성직제도는 사도 시대에는 없었다. 이것은 하나의 변질된 감독직으로서 장로 혹은 사도직이 변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시대에는 교회 안에 불신자는 물론 세상적인 신자도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교회가 큰 핍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섬기기를 원치 않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 세상적 신자는 교회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고 계속 교회에 남아 있기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다 자기의 은사로 형제들을 섬기며 주님을 위함에 있어서 능동적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수용함으로 인해 예수를 믿는 일이 더 이상 좁은 길이 아니고 유행병처럼 퍼지게 되었을 때 이러한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전에는 예수를 믿고 교회에 속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불신자들과 그릇된 동기를 가진 자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교회에 영적인 사람은 적고 형편없는 세속적 신자들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가 되는 일은 쉽지만 주님을 섬기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에 신자이면서도 제사장으로서 주님을 섬기지 않으려는 기이한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바쳐 적극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교회 형제들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 일을 자신들을 대신해서 맡아줄 신령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여기서 전문 성직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소수의 영적인 사람들만이 교회의 모든 일을 위임받아 담당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아니라 단지 교회에 소속만 되어 있으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는 자로 남았다. 그들은 약간의 헌금과 봉사만 할 뿐 영적인 일은 영적인 사람들이 전담하게 했다. 이는 마치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백성들은 세상에 종사하면서 제물만 가져오고 나머지 제사의 일은 제사장이 다 하도록 위임된 것과 같았다. 이리하여 교회는 유대인들이 걸어갔던 바 백성들의 대부분은 금송아지를 섬기고 그들 중 일부만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겼던 전철을 따르게 되었다.

그 결과 모든 형제들이 서로 섬기며 각기 은사를 따라 담당해야 할 교회의 일을 오직 목사 한 사람이 담당하게 되므로 교회는 몸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약화되게 되었다. 몸의 다른 지체들은 다 그 은사들을 접어둔 채 수동적인 입장에서 목사 한 사람에게만 모든 영적 삶을 의존하는 상태에 있고 목사는 프로가 되어 자기의 은사나 생명력에 상관없이 항상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기이한 형태의 교회가 된 것이다.



3.예배와 교회 집회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신자가 개인적으로 구원받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데서 그치지 않고 믿는 이들이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의 생명 곧 그리스도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건축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여 죄인을 구원하고 그들을 함께 모이게 하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즉 교회는 집회를 통해서 건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집회는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집회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가? 교회 집회의 성질과 형태는 전적으로 교회의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교회의 집회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교회에 속한 신자 개개인은 그 몸에 속한 지체들이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인 고로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는 없다. 교회 안에는 머리된 자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지체일 따름이다. 가르치는 자도 다스리는 자도 다 형제요 지체일 따름이다. 각 지체들은 서로 합하여 몸을 이룬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相合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은 相互的이고 서로 섬기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일하며 서로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존재하는 관계는 그 어떤 관계도 머리와 지체의 관계가 아니며 오직 지체와 지체의 관계이다. 그 어떤 관계도 한 사람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다른 사람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며 다 피차 서로 섬기고 돕는 관계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다 이 같은 상호 협력의 성질을 나타내어야 한다.

바울이나 기타 사도들은 이 같은 교회적 집회와는 다른 한 종류의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은 바로 사역적 집회라고 불리는 집회이다. 이것은 그 내용상 전도집회 혹은 말씀집회, 지도자훈련집회 등과 같은 집회이다. 이것은 교회 집회와는 다르다. 이것은 불신자를 상대로 전도하기 위해 여는 집회일수도 있고 교회를 상대로 여는 집회일수도 있다. 사도들이 이런 사역적 집회를 가질 때는 사역을 담당하는 사도가 전적으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 서서 일하고 다른 사람들 곧 사역을 받는 사람들은 수동적인 입장에 선다. 그러므로 사역의 성질은 교회 집회와 같이 피차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다. 이처럼 사역과 교회 집회는 다른 것이다. 사역은 일방적이고 사역자(목사) 혼자서 일할 수 있지만 교회는 모두가 움직이고 서로 은사를 발휘하여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교회 집회를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교회 집회는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 14장의 원리를 따라 각 은사를 가진 형제들이 각각 자기의 은사를 발휘하여 다른 사람의 영적 필요를 채우도록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집회의 형식과 분위기는 오늘날의 소위 '예배'에서 나타나는 엄숙하고 제사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보다 자유롭고 실제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목사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주도하는 형식에서 모든 형제들이 성령의 역사를 따라 자유롭게 간증하고 받은 은혜를 나눈 수 있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부만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알 수 있게 되며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나타내는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4:11-13) 주님은 교회에 많은 은사를 주셨다. 각각의 형제들은 작든 크든 그것이 특별한 것이든 일반적인 것이든 주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다. 이것으로 형제들을 섬길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몸(교회)을 온전케 하는 것이다.

교회적 집회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를 다 사용할 수 있는 집회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적 집회에 대해 "너희가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라고 말했다.(고전14:26) 고린도전서 14:26이 말하는 집회는 계획되고 통제된 집회가 아니라 누구든지 일어나서 성령이 말하게 하신대로 말할 수 있고 받은 은사를 형제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집회이다. 거기서는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질서를 따라 행하고, 형제들에게 덕을 세우는 것이기만 하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의 전통은 목사와 같은 전문 성직자가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며 또 그가 주도하는 예배라는 형식의 집회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교회적 성질을 띤 집회 즉 각각의 은사를 가지고 형제들이 서로 섬기는 집회 대신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밑에 앉아서 듣는 사역적 집회(말씀 집회)만 있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다. 이런 집회를 통해서는 결코 모든 형제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없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교회가 몸의 풍성을 누릴 수 없으며 몸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 나는 제사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승리의 삶을 누리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며 이것을 모든 형제들이 서로 선포하며 나누고 찬송하는 것이다.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섬기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살며 그리스도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충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깊이 누리면 누릴수록 또 그리스도의 생명을 완전하게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에 있어서는 이런 실제적인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 오직 목사 한 사람만 구약의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사람은 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같다. 오늘날 교회에 목사가 없고 예배가 없다면 교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매우 가난하고 약해진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의 성질은 거의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의 어떠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수준은 목사 한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교회 형제들의 영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 모두가 서로 섬기며 생명을 나누는 집회가 없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 네 가지의 교회적 성격을 띤 집회를 보여준다.

첫째는 {기도집회}이다.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소리를 높여 가로되.....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4-31)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5) 기도집회는 교회가 기도라는 방식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는 집회이다. 이런 집회는 특별한 필요에 의해 혹은 정기적으로 가질 수 있는데 집회는 어떤 한 사람이 전적으로 주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지도에 따라 기도하는 식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제목을 제시할 수 있고 모두가 합심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집회}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읽고 나눌 수 있는 성경은 구약 성경뿐이었다. 신약 성경은 당시에 없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구약 성경을 읽었다.(행15:21) 베뢰아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는 그것이 정말 그런가 하여 날마다 함께 모여 (구약) 성경을 상고하며 복음 진리를 확인했다.(행17:21) 그들이 성경을 상고한 것은 다 단체적으로 모여서 행한 것이다. 또 안디옥의 형제들도 함께 모여 바울 일행이 가져온 편지(성경)를 읽으며 은혜를 나누었다.(행15:30,31) 바울은 골로새교회에게 편지(골로새서)를 전하면서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4:16)고 명했다. 그러므로 당시 각 교회는 형제들이 자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누었다. 이것은 오늘날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듣고 배우는 모임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누는 집회에서는 모든 형제들이 함께 말씀을 읽을 뿐 아니라 말씀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바를 서로 나타낼 수 있었다.  

셋째는 {떡을 떼는 집회}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때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 "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행20:11)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전11:33)

사도행전 2:42,46을 보면 사람들이 날마다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았지만 믿게 된 사람들이 매일 말씀집회를 열고 거기서 사도를 모셔다가 강론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끼리 모여서 서로 떡을 떼고 기도를 하며 교제를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오늘은 성전에서, 내일은 어느 형제의 집에서, 모레는 또 다른 형제의 집에 가서 모이는 식으로 여기 저기서 매일 모였다. 그들은 날마다 일정한 말씀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모여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었다.

그러므로 떡을 떼는 모임도 오늘날처럼 일 년에 한 두 번 형식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라 거의 매일 혹은 매주 가졌다. 형제들이 모여서 떡을 뗀 것은 주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사실과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념할 수 있었다. 또 다 한 떡을 뗌으로써 각 지체들이 서로 각각이 아니요 다 한 몸에 속한 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념할 수 있었다. 단지 기념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적이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다. 떡을 떼되 오늘날처럼 목사는 주는 입장에서 신자들은 받아먹는 입장에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형제들 모두가 떡을 함께 떼므로 다 한 형제임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넷째는 {은사 집회}이다. 이는 곧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형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여 형제들을 섬기는 집회이다. 은사 집회는 특별히 교회 집회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는 집회로서 그야말로 교회 집회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주님께서 몸의 생명을 가장 풍성하게 나타내시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교회 집회를 통해서이다. 교회 집회가 아니고서는 영적인 은사를 이처럼 온전하고 풍성하게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은사에 대해서 말할 때 바울은 여러 차례 "교회에서"(고전14:19,28,34,35절)라는 말을 했다. 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고전14:26)라고 말함으로써 모일 때 이러한 은사들이 나타남을 말했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그에게는 성령이 부어진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는 다 같지 않다. 은사에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집회 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은사도 있다.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 등은 다 집회 안에서 사용하여 몸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은사들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은사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풍성하고 온전케 하신다.

은사 집회는 그야말로 상호적이다. 몸의 은사가 어느 부분도 제한되지 않고 발휘될 수 있는 집회이다. 누구든지 받은 은혜를 내놓을 수 있으며 가진 은사를 내놓아 몸을 섬길 수 있다. 다만 질서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14:31) 이것은 한 사람만이 말씀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앉아서 듣기만 하는 집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좋은 설교나 강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빛과 은혜와 은사와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그렇다고 순서대로 억지로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죽은 것을 내놓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몸을 온전케 하기 위한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유롭게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초대 교회에 완성되지 못한 신약 성경이 완성되어 우리 손에 주어졌으므로 그때만큼 예언의 말씀과 지혜와 계시의 말씀이 은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성령 안에서 깊이 깨닫고 큰 빛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무나 다 얻는 것이 아니므로 역시 은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런 은사를 가진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그 빛을 내어놓으면 형제들의 빛이 전체적으로 커지고 풍성해진다. 말씀을 증거하는 은사 외에도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은사는 많다. 형제들 모두가 성령께 철저히 복종하고 그의 인도를 따라 질서 있게 행하기만 한다면 이 모든 은사는 다 표현되어져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큰 풍성을 누릴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일 년 52주 동안 예배당에 가서 말씀은 듣지만 아직 교회 집회에는 참여해 보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사역적인 집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듣는 일만 하고 있다. 사역적 집회는 그것대로 필요하고 유익이 있지만 그것이 위에서 말한 교회 집회를 대체해서는 안된다. 이런 집회만 항상 가지게 되면 목사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게으르며 줄 줄은 모르고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게 마련이다. 말씀집회 형식을 띠고 있는 오늘의 소위 예배는 신약적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다. 신약 교회는 집회를 통해 서로 돕고 섬기며 모두를 온전케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체질이 이렇게 약화된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신약적 집회 곧 교회 집회를 가지지 않고 구약적 집회 혹은 사역적 집회를 항상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에서는 오직 목사 혼자서만 항상 말씀을 전하고 은사를 나타낼 뿐 나머지 사람들은 언제나 목사의 말을 듣기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스스로 주님을 섬기며 몸의 생명을 누리는 일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런 일을 이상한 일로 혹은 위험한 일로 여기기까지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예배당에 가서 꼬박꼬박 예배에 참석하기만 하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속에 주님의 생명이 자라지도 않고 은사를 가지고 몸을 섬기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자기가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의 말을 듣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교회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도 없고 취미도 없고 능력도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혀 자라지 않는 만년 어린 아이가 된 것이다.

또 교회들이 어려움과 혼란을 겪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목사(사역자)와 관련된 것임을 보게 되는데 이것도 역시 교회가 교회적 집회를 가지지 않고 오직 사역적 집회만 가져왔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사역자는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역자는 떠나도 교회는 계속 남는 것이므로 교회가 만일 사역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면 어느 때에 가서 낭패를 당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교회들이 그렇게 중시하는 말씀 사역은 얼마만큼의 소득을 가져왔는가? 오늘날 신자들은 너무나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 말씀을 듣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귀는 엄청나게 높아지고 그들의 지식은 엄청나게 커졌다. 그러므로 보통의 말씀에는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좋은 가르침을 많이 받아서 귀가 높아지고 지식이 많아지게 된 것이 그들의 영적 생명에 무슨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높은 귀를 가졌지만 스스로 주님을 제대로 증거할 수 없으며 작은 일에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살았다는 이름만 가졌을 뿐 실상은 죽은 상태이다. 설교만 듣는 것은 신자의 성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그들이 자기를 드려서 실제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함께 배워야 한다.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가운데서 주의 생명을 실제로 경험하고 누려야 한다. 또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증거하며 돕는 것을 배워야 한다. 쓰지 않는 생명과 은사는 죽고 만다.

우리가 교회 집회를 회복하여 가지게 된다면 처음에는 분명히 전에 유능한 목사 혼자서 시원스럽게 말씀을 증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답답한 상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때로 시간이 많이 흐를 수도 있고 엉뚱한 말을 하는 형제도 있을 수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전혀 말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으므로 답답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며 집회를 계속 가져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형제들이 스스로 집회를 가질 때 당연히 어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직 생명이 온전하지 못하고 영적 수준이 낮은 형제들이 처음부터 무엇인가 풍성하고 온전한 것을 내놓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 집회를 가지는 동안 형제들의 생명은 점점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아무 말을 못하던 사람이 무엇인가를 말하게 되며 처음에는 조잡하고 보잘것없는 것만 내놓던 형제들이 깊고 풍성한 것들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형제들 안에 이미 완전한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비록 작지만 그 속에는 완전한 생명이 들어 있어서 시간이 지나고 자라는 동안 점점 그 생명이 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처럼 교회도 처음에는 어리지만 과정을 거쳐는 동안 그 생명이 온전하고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상태가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받은 생명 자체는 무궁한 생명이며 완전한 생명이므로 실망하지 말고 그 생명이 계발될 수 있도록 모든 형제들에게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말씀집회도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며 그것을 풍성하게 계발하는 집회가 되지만 그것과 아울러 반드시 형제들 스스로 가르치고 간증하고 은사를 나타낼 수 있도록 집회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형제들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잘 안되더라도 목사나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들을 대신하기를 기대하지 말고 끝까지 지체들이 서로 섬기는 가운데서 주님의 생명이 온전히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령님께 몸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십시오 하고 간구해야 한다. 또 이미 형제들에게 주신 은사를 잘 나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빛과 생명과 은혜와 은사를 주실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모두가 주님을 깊이 경험하며 진리를 깨달으며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구변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목사가 말씀을 잘 전하고 청중은 거기에 호응하여 아멘 하는 것을 보면 그 교회의 영적 상태는 매우 좋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목사가 주도하는 사역적 집회는 오직 목사의 상태를 나타내는 집회가 될 수는 있어도 교회 형제들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집회가 될 수는 없다. 오직 교회적 성격을 띤 집회만이 교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형제들이 스스로 집회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들의 참된 상태를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왜 이렇게 교회적 집회를 가지는 일이 드물게 되었는가? 그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충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집회는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 말씀 집회는 말씀 전하는 사람 혼자서만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은사를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상관이 없다. 그러나 교회 집회 예컨대 은사 집회는 형제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면 집회 자체가 전혀 안되게 된다. 어떤 집회가 그 형식에 있어서 교회적 성격을 띤 집회를 추구하여 모두가 말하고 섬기게끔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상태에 있다면 실제적인 교제는 이루어지지 못하며 단지 형식적인 집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또한 교회를 건축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바로 안다면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며 성도를 온전케 할 수 있는 많은 은사들을 내려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와 같이 영적 수준이 낮은 교회에도 형제들에게 많은 은사들을 내려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가 자기들에게 영구히 머물거나 그를 의존함 없이 서로 섬김으로 교회가 건축될 수 있도록 해주셨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은사를 사용하여 몸을 온전케 하는 교회적 집회를 가지는 가운데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보다 더 좋은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더 좋은 지도자의 인도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이유는 그 근본 노선이 잘못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는 타락했어도 적어도 바울이 세운 정상적인 교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들은 성령보다 사역자(목사)를 더 주의하고 성령이 주실 은사를 사역자 개인이 가진 은사로 代置하므로 교회가 도저히 그리스도의 몸의 생명을 온전하게 나타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광스럽고 충만한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강단이 있는 사역적 집회를 폐하고 모든 형제들이 각기 은사를 가지고 서로 섬기며 봉사하는 교회적 집회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4.예배당과 집회 장소

오늘날 교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서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예배당이다. 이것은 형제들이 모여서 집회를 가지는 장소이다. 어떤 사람은 집회 장소를 곧 교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건물은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지도 못한다. 교회는 전적으로 믿는 이들 자신과 관련된 것이지 그 어떤 조직이나 건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로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가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5:11)고 했다. 또 주님은 범죄한 형제에 대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5-17) 이것은 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말씀들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집회소인 건물에다 ○○교회라는 간판을 붙이지만 그것은 그곳이 그들의 집회 장소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일 뿐 그 건물 자체가 ○○교회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실 교회는 살아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에 연락처는 있을 수 있지만 고정된 주소는 있을 수 없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교회에 반드시 전용 집회소가 있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을 전체 집회 장소로 자주 이용했고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종종 이용했다. 유대인들은 어딜 가나 그들의 회당을 건축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런 습관이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열심이 있었으나 집회 장소를 건축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도들은 어떤 장소를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한 일이 없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룩히 구별된 장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유대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지도 없고 성전도 없고 성물도 없다. 오직 거룩한 사람(聖徒)만 있을 따름이다. 이들이 집회를 가질 때는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어떤 건물을 취하여 사용했다.

주님의 승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이때 한 번에 수천 명씩 구원을 받기도 했으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 숫자는 대단히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꺼번에 모이는 일이 드물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이 한꺼번에 모여야 할 필요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교제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들끼리 부분적으로 모였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형제들 중 한 사람의 집을 이용하거나 혹은 더 큰 공공 장소를 이용했다. 때로는 성전을 빌어 함께 모이기도 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행12:5)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전체 교회가 그를 위해서 빌었다. 그러나 수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은 장소에 모여서 기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베드로가 기도의 응답으로 감옥에서 나온 후 마가 요한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간 것을 보아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전체 모임이 있었다면 그리로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교제는 가정 단위로 모여서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이런 가정 단위의 모임을 주저 없이 교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형제들이 모인 그 집이 오늘날 말하는 교회당인 것이다.

오늘날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가 많지만 그들이 다 한꺼번에 모여서 집회를 가져야 할 일은 실제로는 별로 많지 않다. 일반적인 집회는 가정 단위 혹은 그 정도의 소규모 단위로 모여서 교회적 집회로 가지는 것이 정상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매주 전 교인들을 다 한꺼번에 모으고 또 큰 힘을 들여서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가 그릇된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교회가 교회적 성격을 띤 집회는 가지지 않고 사역적 집회(말씀 집회)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교회적 집회는 그 성격상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이 모여서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가정 단위 혹은 몇 십 명, 최대로 해도 몇 백 명이 한계이다.

오늘날 교회가 집회 장소를 짓는 일을 교회의 모든 일 가운데 우선 순위에 두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헛된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소위 성전 건축을 하고 나면 큰 시험과 혼란에 빠진다는 사실은 바로 그런 증거이다. 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은 세상 종교들의 특징이다. 교회가 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나면 교인들은 자기가 무슨 위대한 사람이나 된 것으로 착각하고 목사는 자기가 무슨 위대한 일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다. 형식과 내용은 깊은 관련이 있다. 세상적인 일을 추구하다보면 세상적인 정신도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건물을 건축한 후 바벨론의 정신을 받아들여서 더 크고 견고한 조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이 모든 형제들이 다 모일 전용 건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형제들은 매우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기도 했기 때문이다.(행4:32-37)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런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체 집회의 필요성은 드물었으며 특별히 사도가 다녀갈 때나 총회를 할 때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일상적으로 형제들의 집에서 소규모로 모여 교회적 집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돈과 힘을 들여서 전체 성도들이 다 모일 수 있는 대규모 집회 장소를 짓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그의 자녀들이 구약 성전과 같은 종교적 분위기를 가진 장소에서 모이기보다는 가정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서 서로 자유롭게 모여서 교제하기를 더 원하신다. 빌립보서 1장을 설명할 때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성경은 어떤 형제의 집에서 모인 모임을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또 저(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에도 문안하라...."(롬16: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몬2) 등의 말씀을 보면 많은 교회들이 가정 집에서 소규모로 모여 교제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의 집회는 사람들에게 어색한 분위기를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밀한 교제를 가지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집에서의 모임은 제사를 드리는 것과 같은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분위기를 느끼지 않게 해주며 가정적인 분위기를 줌으로 형제들이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기에 적합하다. 교회 집회는 마땅히 가정적인 분위기가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잔치하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약동하고 생수가 흘러 넘치는 마당이다. 이것은 결코 종교적이고 제사적인 분위기로 나타날 수 없다. 물론 집회가 때로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절간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다. 생명이 깊어지면 말이 필요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집회의 침묵과 엄숙함은 죽음에서 나온 것이다.

또 교회 집회가 가정적인 것은 각 형제들이 생명 안에서 서로 권위를 알고 존중하며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회 모임에서 모든 사람은 성령의 속박 외에는 달리 다른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유롭고 제한이 없다. 그러나 교회 집회는 강의실이나 토론장의 분위기와는 달라야 한다. 강의실이나 토론장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자기를 나타내며 지식을 따라 행하지만 교회 집회는 성령을 따라 질서 있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논쟁하거나 주장하거나 영적 권위를 무시하며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는 마치 가정에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살면서 질서를 따라 서로의 생명을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오늘의 대안

오늘날 교회에는 이미 목사가 있고 모든 집회가 예배의 형식으로 드려지고 있으며 큰 건물이 다 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과 맞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들이라면 목사는 다 사직하고 예배는 다 폐하며 예배당은 팔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여기서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성령께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섣부른 실천적 대안보다는 모든 교회가 성령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다는 마음을 확고하게 가지는 것이 더 완전한 문제 해결책이다. 성령만이 교회를 치유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믿고 성령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주님께서 모든 목사가 다 그 직을 그만두고 백의종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거나 오늘날의 형식적 예배를 폐하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단순하게 그것을 수용할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천 년 혹은 이천 년 동안 왜곡된 일이 하루 아침에 바로 잡히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단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새로 시작하는 교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기성 교회의 경우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문제를 먼저 진리를 알고 문제를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님과 그의 교회를 깊이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이다. 만일 주님의 생명을 깊이 경험하고 주의 뜻을 깊이 깨달음이 없이 당장에 제도부터 뜯어고치는 일로 시작한다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현실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단번에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곡된 교회의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예배당 문제는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회소로 쓰이는 건물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교회는 그것을 전체 집회나 기타 필요에 따라 잘 활용하면 되므로 굳이 그것을 없앨 필요는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항상 행해져야 할 교회적 집회를 위해서 각 그룹별로 소규모 집회소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집회를 위해서는 형제들의 집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예배와 목사 문제는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예배와 목사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것은 예배가 있으면 반드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있어야 하고 또 목사가 있으면 그가 주도하는 말씀 집회(사역적 집회)나 예배가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목사가 전문 성직자 또는 직업으로서의 목사직을 내려놓고 형제들과 함께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를 섬기면 문제는 즉시 해결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 어려우므로 여기에는 성령의 지혜와 인도가 필요한 것이다.  

만일 목사가 전적으로 말씀 사역만을 하기 원한다면 그는 사도 혹은 전도자로 전환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에 고정적으로 머물면서 일하거나 생활하지 말고 교회를 떠나 사도나 전도자처럼 각처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말씀 사역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각처에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곳으로 사역하러 가는 일을 해야 한다. 누구든지 한 교회 안에 전적으로 머물면서 오직 그 교회 형제들만을 섬기는 사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역을 전적으로 하지 않고 교회에 계속 남아서 형제들을 돌볼 생각이 있으면 그는 전문 성직자로서의 목사직을 벗어 던지고 교회 형제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그들 중의 한 형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되면 된다. 이것은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의 문제이다. 설령 어떤 목사가 장로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목사라는 이름을 유지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반드시 교회의 모든 영적인 일을 전담하던 위치에서 떠나 단순한 형제의 위치에 서서 교회를 돌보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교회에서 월급을 받고 교역자로서 일하던 자리가 아니라 감독자인 장로로서 성도들을 돌보며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다스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목사가 교회 형제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장로가 되려면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지 사역자처럼 파송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위치에 설 수는 없다. 그러면 장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사를 가거나 성령께서 특별히 다시 사역을 담당하도록 부르셔서 어떤 곳으로 옮기시면 옮길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목사처럼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형제로 남아 봉사하려고 한다면 목사는 감독자로서 장로의 위치에 설 뿐 아니라 또한 자기가 가진 은사(예컨대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에 봉사할 수도 있다. 전처럼 전문 설교자나 예배의 주도자가 아니라 깊은 말씀의 빛을 가지고 형제들을 가르치며 일깨우는 선지자나 교사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전문 사역자가 아니면서도 교회를 위해 여전히 크게 쓰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처럼 다른 형제들의 은사를 묶어놓고 수동적으로 만들지도 않고 모두가 다 은사를 발휘하여 생명이 충만한 집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예컨대 주일날 교회에서 두 시간 정도의 말씀 나누는 집회나 은사 집회를 가질 때 가장 은사가 충만한 목사 형제는 30분이나 한 시간을 쓰고 은사가 비교적 적은 다른 형제들은 남은 시간을 쓰는 식으로 말씀 봉사를 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목사가 실제로 형제들을 섬길만한 말씀의 은사와 기타 영적 은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무조건 (전직) 목사니까 그렇게 시간을 할애해 준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오늘날 목사 중에서 현재 말씀 사역자로서의 은사가 없으면서 직업적으로 그런 일을 해 오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련 없이 그 직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일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집회에서 다른 은사로 형제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목사가 사도(사역자)직과 장로직 두 가지를 다 담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목사직은 사도의 성질과 장로의 성질을 둘 다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목사에게 특별한 은사가 있고 또 환경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그는 두 가지 일을 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목사가 한 교회에서 형제로서 생활하면서 그 교회의 감독자(장로)로서 혹은 교사로서 교회를 섬기는 한편 밖으로 나가서 말씀 사역을 하며 각처에 교회를 세우거나 새롭게 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며 어느 한 편의 일은 다른 한 편으로 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게 된다.
이런 일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까닭은 오늘날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새로이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만큼이나 타락하고 혼란 가운데 빠져 있는 기성 교회들을 일깨우고 새롭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도적인 사역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과 아울러 문제 있는 여러 기성 교회들을 순회하며 교회들을 새롭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독립교회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 담임 목사로 취임하지 않는 한 기성 교회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를 순회하면서 사도적 사역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사역자가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을 하려면 일단 한 교회의 목사로 취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거기서 형제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며 교회적 집회를 가지게 하여 모두를 견고하게 세운 후 자신은 다른 교회로 떠나서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목사가 그 교회의 형제로서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 교회를 떠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그는 그 교회의 장로로 남고 계속 그 교회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한편으로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9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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