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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

이상봉 2009.09.27 01:08 조회 수 : 6047

요즘 많은 교회들이 '예배의 갱신'을 부르짖고 있다. 과거의 형식적이고 죽은 예배에서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통의 느낌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새롭고 생동적인 참 예배를 추구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구태의연한 형식적 예배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런 노력은 칭찬 받을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배의 갱신과 혁신이라는 것이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본질적 문제를 건드린 근본적 갱신이나 혁신이 아니라 단지 기존 예배의 모양과 형식을 바꾼 외형적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전에는 목사 혼자서 예배 시간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던 것을 장로나 평신도들이 더 많이 참여하여 모두가 함께 예배를 진행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형식을 바꾼다든지, 강단이나 성가대의 위치를 보다 청중에게 가깝도록 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조정하고 과거의 딱딱한 제사적 분위기를 바꾸어 춤과 노래를 부르며 잔치나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죽은 의문에 매여 구약 제사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는 예배를 성령이 주장하시는 산 예배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며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성령이 주장하는 산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지 않은 채 행위(제도, 조직, 일, 의식)만 바꾸는 것은 외식(外飾)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사람)'를 찾으시지 단지 '참된 예배'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된 예배는 오직 참 예배자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성경은 참된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이것이 바로 주님이 친히 참 예배에 대해 말씀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서 잘 아는 말씀일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이 말을 인용하시며 성도들에게 예배를 경건하게 드릴 것을 촉구하는 것을 많이 들어왔다. 우리 선조들은 이 말을 마음을 다하고 성의를 다하여 정성껏 예배를 드리라는 말로 이해를 해 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정성껏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그것이 잘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분의 마음을 잘 맞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저 눈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려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외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떤 어른들은 눈을 똑바로 뜨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눈을 지그시 감고 음미하듯이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예의와 정성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러나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 곧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는 말씀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이해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말씀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수록된 요한복음 4장의 전후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한 사마리아 여인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주님이 자기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문제 하나를 주님께 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왜 이 여자는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것은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과는 달리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다 그들 나름의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만 하나님을 섬겨야지 다른 데서 이루어지는 그런 예배는 엉터리라 하면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도대체 어디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사마리아 지역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망한 후 앗수르의 이주민들이 많이 와서 살게 된 지역이었다.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혈통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정통적이지 못한 자로 여겼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 성전을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예배 자체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 "내 생각에는 우리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나 당신들 유대인들의 예배나 별로 차이도 없는데 왜 꼭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느냐" 하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말로 답하셨다. 이것은 전혀 엉뚱한 말이었다. 유대인의 예배가 맞다든지 아니면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도 괜찮다든지 해야 할 터인데 예상외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와 유대인들의 예배가 다 합당한 예배가 아니며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예배를 드리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주님은 그녀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동안 시행되던 두 예배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것도 말씀하셨다. 이는 곧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양식(장소와 방법)에 따른 예배가 아니므로 '自意的 예배'요 '거짓 예배'지만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지시)에 근거한 예배였으므로 적어도 우상 숭배는 아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자에게 유대인들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오직 근본적으로 새로운 예배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롭고 참된 예배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예배 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예배가 아니요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예배와 같은 것이다. 구약 성전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지 않아도 되며 정성으로 드리지 않아도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자세가 정성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령(神靈)과 진정(眞正)이란 말은 영(靈, spirit)과 진리(眞理), truth) 또는 영과 실제(實際)라는 말을 우리 선조들이 토속 용어를 빌어 우리 식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번역자들이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도록 잘못 번역한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영과 진리(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직 성령이 오신 신약 시대에만 가능한 일이다. 구약 시대란 옛 언약 안에 있는 시대이고 신약 시대란 새 언약 안에 있는 시대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 안에서 또는 참으로(진리로, 실제로) 하나님을 섬긴다(예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을 말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본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을 생각해 보라.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아들이 아버지 앞에 향불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며 절을 여러 번 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아버지든 누구든 어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서로 '합당한 인간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고 그의 말을 듣고 그와 같이 있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종교적 방식으로 예(禮)를 갖추어 제사를 드리는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귀신에게는 제사와 같은 종교적 방식을 사용하여 섬기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인격이신 아버지 하나님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다.  

사람이 처음 지음 받았을 때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의도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그와 함께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행위(제사)가 아니라 인격이고 삶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삶이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와 성령을 보내심으로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삶의 회복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즐거워할 아버지로 알고 그 생명을 따라 아들로 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참 예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돌로 지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했을까? 왜 그런 종교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셨을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그렇게 영으로 진리로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그 뜻대로 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락 후 하나님에게서 떠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들과 교통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중보자 또는 매개체가 필요하였다. 하나님과 사람 간의 유일한 참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참으로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오셔서 생명의 회복을 이루시기까지는 부득이 그(그리스도)의 모형에 해당하는 각종 제도와 형식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을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약 시대의 가장 중요한 두 축은 '율법'과 '성전'이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써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뜻)을 알게 하셨고 또한 성전(건물)을 만들어 놓으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임시로 열어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나 성전을 주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거나 그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께 참으로 나아가며 섬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한 것이다. 율법의 모든 명령과 규례들은 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그들의 섬겨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며 그들 자신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생명)을 자기 것으로 받아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주신 것이다.  

둘째, 율법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합당치 않은 자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 준다. 즉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며 쓰러뜨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소극적 기능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율법을 통하여 사람의 현재 마음과 인격이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 능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한가를 알게 하시려고 했다.  

셋째,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을 기대하고 갈망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키고 시행해야 할 모든 율법의 규례와 제도 안에 그리스도의 모형적 성격을 띤 여러 장치들을 포함시켜 놓으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코 완성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며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행한 예배 즉 성전 예배는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돌로 지은 성전에서 정한 시간에 정한 예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 놓으신 것은 결코 참된 예배(섬김, 관계) 방식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넣으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 될 때까지 임시로 사용하신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히8:5)


구약의 돌로 지은 성전은 처음부터 그리스도라는 참된 성전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는 사람이 그리스도(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을 가진) 아들로 살게 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이 구약적 예배 곧 성전 예배(종교적 섬김)를 폐하고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섬겨야 할 때가 바로 주님이 오신 그 순간부터임을 분명히 하셨다.

이제 사람이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종교적 방법이나 그 밖의 육신적 방법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마음)이 생기게 될 때만 가능하다. 사람은 본래 누구든지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사람 안에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이 단지 육체(동물)가 되면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밖에는 섬겨지지 않는 분이다. 바울은 고전2:10-12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었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처음부터 즉 구약 시대에도 마땅히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어야(섬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돌로 지은 성전에 가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했던(섬겼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직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을 새롭게 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 즉 참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려면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교회의 변화 추구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근본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성공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대로 둔 채 외형만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아들로 바쳐질 때만 비로소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이제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도 생각해 보자. 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영으로 예배한다는 말이나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다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영과 진리는 다 같이 구약의 모형에 대해 실제요 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영(靈)은 육(肉)에 대응하는 말이고 진리(眞理)는 그림자(모형)에 대응하는 말이다. 여기서 육이란 육신(자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표현 즉 하늘에 있는 것을 땅의 모양으로 바꾸어놓은 것을 말한다. 즉 하늘에 있는 참 성전인 새예루살렘(그리스도를 말함)은 땅에서 성막 또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표현되었다. 이때 하늘에 있는 영적 실제로서의 그리스도는 영 또는 진리라고 말하고 땅에 있는 성전은 육 또는 그림자와 모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진리란 그림자에 비해 실제 또는 참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구약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단지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인 율법 제도에 의해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섬긴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 실제로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영 안에서의 예배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참 성전을 믿고 따르는 것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선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하여 주님이 살아 계실 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주님을 친히 만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기 앞에 있는 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고 간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참 실제이시고 하나님의 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 지도자들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돌로 지은 성전을 귀히 여기며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그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며 그의 영은 죽은 것이요 그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는 자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주님은 여자가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분명하게 "여자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성경에는 내 말을 믿으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또 주님은 장차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13:2) 왜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세우신 성전이 그렇게 철저히 파괴되도록 허락하셨는가? 그것은 참 성전인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이제 모형과 그림자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그들은 다 율법과 성전을 귀히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듯이 보인 주님을 대적하는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율법도 성전도 귀히 여기지 않았고 오직 자기들의 전통과 종교 및 그 안에 묻혀 있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귀히 여길 따름이었다. 그들은 참 율법이고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대적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자들임을 드러내었다. 그림자는 귀히 여기면서 실제는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가 아니고 사탄에게 속은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육체로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영과 진리 안에서 섬길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름으로써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성령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장(場)으로 교회를 주셨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형제들을 섬김으로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며 몸을 섬기는 것은 곧 머리를 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몸과 머리, 몸과 지체는 하나이다. 그리스도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개인적으로 즉 자기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고 교회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내 교회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22:7)고 말씀하심으로써 교회와 주님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분명히 하셨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바울의 이 말처럼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을 성전으로 삼아 그 안에 거하신다. 전에 땅에 계실 때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산 성전이셨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 되셨다. 이것은 전보다 훨씬 완전한 성전이 된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 그와 교제하고 그를 섬기려면 하나님이 현재 거하시는 곳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이 돌로 지은 성전에 계시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리로 가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땅에 계시면 반드시 돌로 지은 성전을 버리고 그리 가서 그를 섬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은 성전 건물 안에 계시지도 않고 사람으로 땅에 계시지도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형제들(교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령으로 말씀하시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그리스도인들)로 당신을 나타내신다.

누구든지 어떤 건물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재림주라는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집회소 건물이 보통의 건물보다 귀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하거나 기도는 아무래도 교회당 건물로 가야만 잘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형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귀히 여기지 않으며 그들을 만나서 교통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한 사람들은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각 개인이 그리스도(하나님)를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 한 지체 한 지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가 바로 이 땅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 각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아 귀히 여기며 그들에게 피차 복종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성도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완전치 못하더라도 그 생명이 나타내는 바로서는 즉 교회로서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몸이요 성전이다.  

오늘날 우리가 영과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반드시 형제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서로 교통해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모양으로 자기를 잠시 드러내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주일이나 어떤 날에 모이는 것은 그때 잠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포착하여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에 집회에 나오는 것은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자체가 예배이지 모여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특별히 예배인 것은 아니다. 신약의 참 예배는 오직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성령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삶,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예배이다. 하나님은 아들(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눈에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를 위해 우리를 구속하셨다. 만물은 다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새로 올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아들들의 나라이다. 그 날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그 예배는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존재로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직 아들의 생명으로만 채워진 사람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 예배가 될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일초도 견딜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생명 안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 것이다.

이것은 장차 임할 새예루살렘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우리가 육신적 자아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고, 바로 그 위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위치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교회당에 모여서 예배라는 것을 열심히 드리고 선한 일을 열심히 도모한다 할지라도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그의 호흡과 그의 생명 공급을 갈망하며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은 다 성취되고 모든 그림자와 모형은 실제가 되었다. 새 것이 오면 옛 것은 가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옛 것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 의문 율법에 속한 죽은 행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된다. 육에 속한 것은 언제나 영을 대적하고 훼방한다. 그것은 사람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행하기보다는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 행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헷갈리게 하는 것들은 마땅히 치워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명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 외의 모든 종교적 행위들, 모든 거짓 경건(경건의 모양만 추구하는 것)들, 육신의 일들은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17)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1,9)

첫 것인 성전과 제사가 폐해졌으므로 그것을 흉내낸 오늘날의 소위 '예배(儀式禮拜)'도 사라져야 한다. 안식일이 폐해졌으므로 그것을 흉내낸 소위 '주일성수(主日聖守)'도 사라져야 한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폐해졌으므로 십일조와 성가대도 사라져야 하고 무엇보다 제사장제도를 흉내낸 성직(목사)제도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목사는 교사나 집사나 권면자(권사)나 구제하는 자처럼 필요하다면 형제들 중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겸손히 형제의 위치에서 다른 형제들을 섬기면 될 것이지 결코 자기를 형제들 위에 높여 중보자처럼 행세해서는 안되며 아무 특권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참된 섬김(예배)과 목사 또는 주일 성수, 십일조, 성가대가 무슨 상관이기에 그것들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늘날의 이 죽은 소위 '예배' 곧 사람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이 죽은 행위가 바로 '목사 제도'에 의해 집요하게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현실로 볼 때 목사 없는 곳에는 예배도 없다. 그만큼 예배가 목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각자가 목사나 율법 교리와 같은 외부적 인도자나 종교 제도에 의존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갖지 못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사는 이 새롭고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막으려고 발악을 하는데 그 방법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자로 율법주의와 구약의 제사적 신앙으로 도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소위 '예배'는 전혀 신약적 섬김이 아니다. 모든 교회 모임이나 행사 앞에는 소위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은 그 뒤에 이루어지는 회의나 야유회나 행사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신자의 삶이 예배와 예배 아닌 삶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로 이것이 구약이고 첫 언약에 속한 불완전한 신앙이다. 구약 사람들은 하나님을 친히 섬기지 않고 오직 제사장에게 양이나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생업과 육신의 일에 종사하면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오직 제사장의 일이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삶을 전적으로 바치지 않았고 오직 돈의 십분의 일(십일조)과 일주일 중 하루(안식일)와 예배만 드리고 나머지 인생은 자기 것으로 자기 마음대로 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16,17,23)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원적인 삶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 몸의 지체들 중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지배하거나 다른 지체들의 기능을 대행하며 전담하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형제들 중 목사와 평신도가 구분되어 목사는 다른 신자들 위에서 그들의 신앙을 주장하며 대행하고 신자들은 생활비의 일부를 헌금하며 일정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만 하면 되는 일은 신약 시대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생활비의 일부만 하나님을 위한 목적으로 쓰고 나머지는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다는 생각이나 시간 중 일부만 하나님을 섬기는(예배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자기를 위해 쓸 수 있다는 생각도 하나님께 인정될 수 없는 그릇된 생각이다. 집회를 가지거나 찬송하며 기도하는 시간만 하나님을 위해 드려지는 거룩한 시간이 아니라 먹고 자고 아이를 키우며 손으로 수고하여 일하는 모든 시간도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려지는 거룩한 삶(예배)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란 말도 쓰지 말아야 하며 십일조나 주일성수라는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말만 쓰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이중적이고 이원적인 삶 자체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전체로 섬겨야 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율법을 비롯한 구약의 제도와 신앙을 따르려면 구약의 일부 형식과 제도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마땅히 구약 전체를 다 받아들여야 한다. 할례도 받고 유월절도 지키며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 다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첫 것에 속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한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3,4) 구약을 다 취하든지 아니면 다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형제들 위에 세워진 중보자적인 존재가 정해진 방식으로 인도하는 특별한 행위를 예배라고 한다면 그런 예배는 절대로 신약에 속한 참 예배가 아니며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신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그 모든 것들을 폐하고 성령 안에서 참되고 완전한 것을 세우신 역사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오직 아들의 생명을 누림으로써 아들로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배이다. 예배라고 이름을 붙이든 삶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그리스도 없는 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없으면 무슨 경건의 행위를 꾸미든 무슨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든 다 죽은 종교 놀음에 불과하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만일 정기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았다면 즉 양을 잡고 향을 피워 제사를 드리며 구제와 금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흉내를 정기적으로 행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구원자가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는) 절망적인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토록 심각하게 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로 회칠한 무덤처럼 자기는 의원이 필요 없는 건강한 자이며 해방과 구원이 필요 없는 경건한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들의 '경건한 종교 의식들'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전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바로 이런 자리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서 인생(사람)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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