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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과 우리의 길

이상봉 2010.05.05 14:08 조회 수 : 2612

제61과 우리의 길 


요한복음 15장
 

110.하나님의 친구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15:12-17) 


하나님(그리스도)의 계명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과 소원(바라는 바)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생명(속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어떤 생명인가? 그 특징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7-16) 하나님의 속성이 이러하므로 하나님의 계명 또한 이러하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실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명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이다. 하나님의 친구란 하나님의 동류(同類)라는 뜻이다. 누가 하나님의 친구인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과 말이 통하는 사람, 하나님과 일이 같은 사람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친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 그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갚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엡2:1-5)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경배(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세계로 곧 하나님을 닮은 자로, 그의 친구의 자리로 이끄신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받은 사람은 무엇이 되는가’ 하는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능력을 받고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그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큰 자 곧 세상에서 돋보이는(탁월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반대로 말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3-7)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헛된 영광을 피하여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가며 점차 하나님을 닮아 마침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루는 최종적인 역사는 사랑이다. 왜 사랑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과 연합이고 마귀의 속성은 미움과 분열이다. 이것으로 사람을 판별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베드로의 말 가운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믿음이 사람을 점점 변화시켜서 어디로 이끄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믿음에 덕을 ...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다. 사랑은 처음에 덕을 세우는 것(타인을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형제(자기와 같은 생명을 지닌 자)를 사랑하는 것에서 점차 하나님이 내신 모든 것(만물, 모든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만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되게 된다. 만물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낼 때 이루어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사랑은 가장 큰 능력이요 가장 큰 권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망의 자리에서 일으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의 사랑은 만물을 하나님의 소유로 되돌려 놓게 될 것이다.  


111.세상과 하나 될 수 없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15:18-21) 


세상에게는 세상대로의 길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대로의 길이 있다. 세상의 길은 육체의 안락과 영광을 도모하는 것이고 우리의 길은 영의 기쁨과 평안을 도모하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所欲, 원하는 바)을 좇을 것인가 영(성령)의 소욕을 좇을 것인가 하는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 또한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우리와 세상 간의 이 간격은 생명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둘 중 하나가 근본(생명)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메워질 수 없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배척을 당할 때 놀라거나 서운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고 더 강한 생명을 누린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0,11)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죄(罪)지 핍박이 아니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2,23) 환난은 도리어 우리의 체질을 강화시켜서 우리로 더 빨리 완전한 생명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세상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자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모든 것은 다 생명을 따라간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관대해도 세상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만큼 관대하지는 않다. 생명은 사망을 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서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울이나 요한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상에서 자기 위치를 항상 분명히 해야 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4-6) 우리의 길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주님을 핍박하였으므로 그와 하나인 우리도 핍박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곧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와 동류의 사람들은 우리를 알아보고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의 말을 들을 것이다. 우리의 자리는 거기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편으로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즉 우리끼리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우리를 사랑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가서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서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한 자리를 잡으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영광과 자랑은 그들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돌아오지도 않으며 받는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알곡은 곡간으로 쭉정이는 돼지에게 혹은 소각장으로 가는 것이다. 생명에 속한 자는 영원한 것을, 사망에 속한 자는 썩어 없어질 것을 취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헷갈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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