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성령행전 (사도행전 서론)

 사도행전 1:1-5


신약성경의 다섯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복음서 중 하나인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쓴 성경이다.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내용은 다르지만 동일한 저자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쓴 연결된 성경으로서 전편과 후편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책과 같다.

누가가 기록한 첫째 성경인 누가복음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라는 말로 시작된다. 여기서 누가는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세상에 온 후부터 부활 승천하기 전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교훈에 대해 자세하게 증거했다. 사도행전은 이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 이어지는 글이다. 누가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성령과 사도들을 통해 세상에서 계속 사역을 수행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시간적으로 볼 때 사도행전은 주님의 부활 후 30년간의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주님의 정신과 권능으로 무장하여 온 땅을 다니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다. 사도행전은 그들의 행적과 사역에 대해 증거하는 글이다. 누가는 유대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파된 경로를 서술했는데 주로 바울의 사역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복음 전파를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바울이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가게 되고 거기서 로마 관리들의 묵인 하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사도행전의 큰 주제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온 땅에 전파하여 그의 나라를 세우고 확대 충만케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무리들 곧 교회를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온 땅으로 전파하게 하여 충만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과 교회로 말미암아 계속 세상에 머무시며 더 확대되고 충만케 되셨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이러한 확대와 충만은 첫째, 성령에 의한 것이고 둘째,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셋째, 교회를 세우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말해준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1:3)

누가는 부활하신 주님이 '사십 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한다. 주님은 왜 즉시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사십 일을 땅에서 보내셨을까? 거기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십 일이라는 시간은 성경에서 종종 시험과 훈련의 기간을 의미한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말씀을 받은 기간이 40일이었고 주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기간도 40일이었다. 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기간도 40일이었다. 그밖에 노아 홍수 때 세상을 심판하는 비가 내린 날짜가 사십 일이었고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하며 하나님을 배운 기간이 사십 년이었다. 그러므로 사십 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이 하나님을 배우며 연단을 받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사십 일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신 것은 그들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훈련하고 연단하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죽고 부활하시기 전의 주님은 육신적인 하나님이었다. 그는 사람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감각할 수 있는 하나님' 또는 '보이는 하나님'이었고 또한 항상 제자들과 같이 있었다. 그래야 제자들이 하나님을 감각하고 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고 부활하신 후의 주님은 전과 달랐다. 그는 때로 제자들에게 육체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항상 같이 붙어 다니시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하늘에 속한 자유로운 몸을 가진 분으로서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제자들 앞에 등장하고 필요하면 즉시 사라졌다. 주님이 그렇게 행동하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더 이상 육이 아니라 영으로 대하며 영적으로 감각할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육체적으로 항상 같이 있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게 (육체로 함께)하지 않아도 실제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제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들은 이제 육신적 감각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영을 사용하여 사는 삶을 연습해야만 했다.

사십 일이 지난 후 주님은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한 주간 후 오순절(유월절 다음 첫 번째 일요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이르렀을 때 약속하신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했다. 성령이 임한 것은 전에 약속하신 대로 주님 자신이 다시 제자들에게 내려와서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영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 곁에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 안에 있기 위해 오신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나는 책이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는 말을 한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행1:2) 누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시대를 열기 위한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부활을 통해 주님은 이제 육신적 세계를 넘어서 영의 세계로 들어가셨으며 제자들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수라는 사람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육신적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면 사라지지만 영적 그리스도는 세상을 떠나도 제자들 안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말하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스도께서 예수라는 사람으로 땅에 계실 때 그는 33년을 사셨는데 그 33년은 30년 더하기 3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일반적인 유대 청년으로서의 30년과 세상을 위한 구원자로서의 3년이다. 주님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가장 큰 내용은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자랐다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했다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고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3년은 요한으로부터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이와 같이 주님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으로 충만한 생애였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일생이 하나님의 선한 일과 권능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출생부터 성령으로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해졌다. 주님의 인생은 모든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령으로 충만한 주님의 삶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를 따르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는 사람이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흙에다 하나님의 생기(영)가 더하여짐으로써 만들어진 존재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를 확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란 그 속에 하나님의 영(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타락이란 사람 안에서 영이 빠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어떤 형편(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타락이란 사람이 사람 아니게 된 것이다. 그만큼 성령이 없는 인생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타락한 인생 곧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리고 그의 생을 성령과 함께 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고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모양까지 취하셨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1,22) 이것은 죽은 자를 산 자로 회복시키는 핵심적 작업이다.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불어넣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세웠으며 사역과 권세를 위임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전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성취된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일하러 나가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사람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모여서 활동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사람 안에 당신의 영(성령)을 불어넣으시고 사람들이 그 영의 인도를 따라 행할 때 세워지며 온전케 된다.

왜 성령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지 않고 성령이 다시 와야 했는가?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시며 사람과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나님과 사람을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육체 안에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오직 영으로라야 가능하다.

주님은 항상 기도하셨다. 그는 왜 항상 아버지의 뜻을 구했으며 항상 성령의 인도를 구했는가? 그가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했더라도 결과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과 같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들과 영은 하나이며 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뜻과 아버지의 뜻, 성령의 뜻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범사에 기도하며 모든 일을 성령을 좇아 행한 것은 우리에게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기 위해서이다. 그의 인생은 자기만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인생이었다. 즉 주님은 우리에게 합당한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성령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인생을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한다. 우리의 길은 주님이 하신 것처럼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주님을 따른 사람들 곧 주님의 길에 서서 주님의 길로 행했던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은 범사에 성령을 좇아 행했다. 주님의 제자 중 끝까지 자기 육체대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 갈팡질팡하는 일은 있었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기의 옳다 하는 것을 따라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날마다 자기와 싸웠으며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갔다.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처음에 이방인(고넬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성령께서 그를 그리로 인도했을 때 기꺼이 순종했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 역시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성령께서 그 일을 주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그 일을 받아들였다.

바울 역시 그와 같이 성령을 좇았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일생 동안 많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어느 때 그는 다른 이방 지역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내키지 않은 곳(예루살렘)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결박되고 핍박을 받았다. 심지어 그것을 예견한 신실한 형제들이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발을 내딛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그를 로마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이해되기 전이라도 성령을 따라갔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말하려는 바이다. 사도행전은 이와 같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를 생각할 때 사도행전(使徒行傳)은 곧 성령행전(聖靈行傳)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