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주님의 승천 (행1:7-15) / 2008. 8. 24

2009.06.06 22:43

이상봉 조회 수:7064

주님의 승천


 사도행전 1:7-15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7,8)

일은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하시는 것이다. 그 후에 사람이 그것을 따르며 누리는 이것이 올바른 일의 순서이다. 여기 한 일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직접 벌이는 일이지 사람이 계획하고 힘써서 이룰 성질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도 강조한 바와 같이 제자들은 일을 잊어야 한다. 결국 일을 하게 되겠지만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내용과 때와 기한 모두 잊어야 한다. 그들이 할 일은 오직 성령을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증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증거는 성령님이 제자들 안에서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잘 하려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그가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한 형제의 집에 모여서 전적으로 기도에 힘썼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 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1:12-15)

그들은 무슨 기도에 힘썼을까? 당연히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령님은 이미 오실 것이 약속되어 있었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시면 성령께서 선물로 사람들에게 내려오시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그것도 한 두 사람도 아니고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만큼 원수의 훼방이 크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0장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마귀는 하나님의 큰 일이 성취되는 것을 싫어하여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는다.(단10:12-14)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그것도 항상 해야 하며 세밀하게 기도해야 한다.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승리로 끝나려면 모든 부문에서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9-11)

주님이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올라가심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천사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예수는 다시 오신다고 말했다. 천사의 말대로 주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셨다. 이것은 멀리는 주님의 재림을 말한 것이겠지만 가까이는 성령으로 세상에 다시 임하시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쳐다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없어지는 것 같으면 아쉬워하며 쳐다봐야 하겠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모양을 바꾸는 것이다. 전에 제자들 곁에 육체로 계시던 주님은 이제 제자들 안에 영으로 계시게 되는 것이다.

또 주님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으면 하늘을 봐야 하겠지만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것 즉 제자들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가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가 있을 곳을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14:28)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뇨 하고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한 말씀이 무슨 말씀이뇨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16:16-28)

주님은 어디로 가셨는가? 그는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곧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세계는 어디 있느냐 하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있느냐 하고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고 또한 영원히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계시는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 계신다. 그러므로 육신의 감각으로는 볼 수 없으며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듯이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우리 안에 우리 곁에 그리고 온 세상에 계신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어디로 가신 것이 아니고 다만 제자들 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 거하는 상태가 아닌, 영으로 계시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사람의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리로 가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도 다 그렇게 될 것이다.

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꼭 재림 때 구름 타고 오신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님이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자들 안에 다시 들어오시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자기의 택하신 자들을 신부로 취하기 위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기를 사모한다. 이런 원리에 따르면 제자들은 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뻐했어야 마땅하다. 육신으로 있으나 영으로 있으나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주님이 세상을 떠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더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람이 영으로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이 육신으로 항상 그들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거하시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이러한 원리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꼭 그의 곁에 그의 눈에 보이는 곳에 두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표나게 잘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믿음으로 양육해야 하며 믿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서 꼭 내 눈앞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상대방이 행동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은 아이를 믿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한다면 부모는 때로 아이들이 말씀 안에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육신적으로 다소 떠나 있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들이 사람(부모)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 안에서 행할 수 있도록 육신적으로 떠나 있을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아이 곁에 붙어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살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주님이 제자들과 3년 간 같이 계셨던 것처럼 부모를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하며 돌보아야 한다. 그러나 더 나은 동거는 영으로 말씀으로 정신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