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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기한 (행1:6-11) / 2008. 8. 17

2009.06.06 22:42

이상봉 조회 수:8920

때와 기한


 사도행전 1:6-11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6-8)

때와 기한은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다. 성령은 몸에 있어서 머리이고 우리는 지체들이다. 머리와 지체의 관계는 무엇인가? 머리는 지시하고 몸은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원리이다. 지체가 생각하고 머리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요 머리가 생각하고 지체는 그것에 반응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때와 기한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일을 정하시고 그 방법을 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고 방법이 결정되었을 때 그대로 순종하여 길을 가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인류는 항상 머리의 위치에 서고자 애를 써왔다. 인류 안에는 눈이 밝아져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본성이 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를 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자세히 알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은가? 아무 유익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어서 그 미래가 밝아지고(좋아지고) 생명이 더 온전케 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 밝아진 것은 눈(지식)일 뿐 생명은 아니었다. 사람은 그 밝아진 눈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판단과 정죄, 미움과 다툼, 분열에 빠졌을 뿐 결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보다 더 나은 길로 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길을 내가 정해가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해주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며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판단력을 능가할 사람은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3-36)

바울은 교회란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라고 말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3:8,10) 하나님의 뜻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에 드러내어 알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지혜는 어디 있는가? 교회의 지혜는 무엇인가? 교회의 유일한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자기 속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꾀(지혜)를 내려고 애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알기를 힘쓰는 삶이어야 한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어서 세상에다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며 마귀를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였기 때문에 그런 일에 쓰임 받은 것이다. 그가 가장 보잘것없는 자라는 것은 그가 마귀에게 가장 깊이 속아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마귀의 일등 하수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마귀를 가장 멋지게 물리치고 부끄럽게 만드셨다. 바울이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안 후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며 거기에 힘써 복종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주 가운데서 당신의 지혜와 역량을 드러내실 수 있으려면 반드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고 성령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불평과 원망, 회의와 불안, 좌절과 낙담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간표와 계획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때와 기한을 우리 마음대로 잡고 있는 것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계획이 없으면 실패도 없다. 우리가 불안한 것은 일을 우리 뜻대로 정하고 때와 기한을 우리 뜻대로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계7:11,12)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다. 모든 영광과 권세, 지혜와 능력, 힘과 권세는 하나님께 있고 사람은 오직 그것을 은혜로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다.


제자들이 주님께 물은 것이 무엇인가? "저희가 모였을 때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주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지만 제자들의 관심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현재 망한 상태 곧 로마에게 정복되어 식민지로 있는 상태에서 회복되어 주권을 되찾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첫째, 이스라엘에는 현재 정치적 주권이 없으므로 그것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하나님을 믿는 여호와 신앙과 경건한 삶이 희미해지고 사라졌으므로 그것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 군대가 물러가야 하고 또한 소위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나와서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써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우뚝 서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추구하는 곧 애국이자 신앙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자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땅에서 굳건히 서고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주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의 생각은 두 가지 면에서 온전치 못한 것이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 외적인 측면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는 왕(주권)과 땅과 백성 세 요소로 구성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밖에서 통치하는 사람으로서 '왕'이 있고 '물리적 영토'가 있고 혈통적 사상적 동일체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통치하고 영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여야 할 필요도 없고 또 이스라엘 나라 안에 있으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타락한 기독교인 천주교 같은 곳에서 오늘날까지도 답습되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교회는 교황이 있고 건물과 사람(교리를 알고 지키며 예식을 행하는 사람-교인)이 있으면 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모양을 갖춘 물리적 구성원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있는 것이고 그런 조직(교회)에 속한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런 생각은 너무나 형식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것은 유대인들과 종교인들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일깨우신 말씀이다.

둘째는 제자들이 스스로 속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원하고 있던 제자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그런데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나라는 현재 자기가 발 붙여 사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바로 그 '세상'이다. 다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린 적이 있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을 따름이다. 물론 처음에 그런 이름으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므로 전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실제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특별한 관심과 약속을 주신 것은 그들이 회복하여 참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지 지금 현재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실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멋진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많은 영광스러운 특권이 있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으며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필요를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적(세상적) 필요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어디까지나 다른 이방 나라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며 세상 영광과 세상 삶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라는 말씀으로 답하신 것이다. 그런 문제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성령을 받고 성령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또는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고 제자들이 그 성령께 순종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있는 일은 저절로 해결될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던 땅 사마리아를 포함한 온 세상 이방 나라들이 다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온 세상에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하나님은 그의 선한 마음과 전능한 능력으로 자기의 일을 얼마든지 잘 하신다.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임하면 그 사람은 사람의 마음과 능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으로 일하게 될 것이며 그는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 또는 자기 교회, 자기 가정, 자기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바로 그 일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버리고 성령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관심 안에 있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되었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맡기고 하나님이 지금 나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우리가 급히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는 중요한 일들은 무엇인가? 사람의 관심은 "내가 어떻게 나의 경쟁자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고 "내가 어떻게 이런 저런 환경적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가?" 하는데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온전케 하고 풍성케 하여 그로 상대방까지 살리게 함으로써 그와 온 땅이 함께 살도록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때와 기한 뿐 아니라 내용도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성령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일, 우리의 길은 많은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런 삶을 실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역사이다. 이 사도행전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주님의 12제자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주님의 생명을 받았고 또한 그의 사역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제자들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던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서 살아서 같은 역사를 진행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령의 사역은 초대교회 때 끝난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 안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의 나라가 굳게 서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할 하나님의 종들이 자기 일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 가룟 유다와 같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가룟 유다가 실패한 것은 그가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 뜻과 자기 일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전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랐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자기 목적과 자기 일을 추구했다. 그는 아마도 그 자기 목적과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랐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사람은 둘 중 하나는 버리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 쪽이다. 그리스도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면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포기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하면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 있다.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육신의 본성이다.

가룟 유다는 무엇을 추구했는가? 그가 그리스도를 팔면서까지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었다. 그는 돈이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을 위해서 주님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를 속이고 있었다. 어떻게 속였는가? 그가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 백성의 형통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속인 것이다.

사람이 선한 명분의 일을 추구하면 그러한 행동은 자기의 육신의 영광이나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는 자기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이며 그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경우에서 보듯이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원색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그럴듯한 명분의 포장지로 덮어놓은 상태로 추구한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하면 자기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러한 일을 확신을 가지고 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소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정을 쏟다가 그리스도를 놓친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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