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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1) - 서론

이상봉 2009.05.29 16:29 조회 수 : 4043

세계 교회사 강의

<< 1.서론 >>

1.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사는 교회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도 어디까지나 [역사]이다. 따라서 교회사를 공부하기 전에 우리는 역사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보고 겪지 못한 과거의 일들에 대해 서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역사는 보지 못한 시대, 지나간 시대에 말하는 것이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가 어렵다. 특히 자료가 부족한 먼 옛날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경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도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우리가 미래에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알게 하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학도는 각 시대의 각 사건들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면서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원칙과 공식을 발견할 것을 기대한다. 역사도 하나의 과학처럼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어서 그것을 연구하면 미래에 인류가 행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상당히 종잡을 수 없는 방대하고 모호한 것이어서 그런 공식을 도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역사학자들이 과거 역사를 기초로 하여 미래에 대해 '인류는 장차 이런 방향 저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예언했지만 제대로 맞은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역사는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겉으로 볼 때 역사는 인간이 펼쳐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역사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고 하나님이 계신다. 사탄은 사람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악을 행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뒤에는 천지의 창조자시요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사탄의 획책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관장하며 당신의 영원하신 뜻이 온전히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역사를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역사는 겉으로 볼 때 정함없이 이러저리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을 따라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역사를 보면 역사는 무원칙하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것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만들어가신다. 그런 점에서 가장 바르고 정확한 역사 해석은 성경 안에 있다. 성경에 기록되고 해석된 역사는 일반적인 역사가 아니라 구속사 혹은 교회사라고 불릴 수 있는 특정 분야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경이 다루고 있는 이런 역사는 역사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일반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성경 역사에는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거기서 인간들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는가 하는 것과 그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물은 세속 역사에서였다면 크게 취급될 사람이지만 (예컨대 왕이나 영웅같은 인물) 성경에는 "저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더라"는 한마디로 다루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그런 인물과 사건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모든 사건과 인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비추어 경중을 가리고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교회사라는 것은 세상 종교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소중한 인물과 사건이 세상 불신자들의 눈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인물과 사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일은 세상사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주 예수님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주님 당시의 세상 역사가들은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관심과 가치관을 따라 역사를 보며 해석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많은 교회사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되지 않고 세상적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어떤 일이나 사람, 교회가 세상적으로 볼 때 얼마나 크고 유명하며 주목거리가 될만한가 하는 기준에 따라 어떤 일이 대단한 일 혹은 시시한 일로 간주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대단한 사람 혹은 시시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고 어떤 교회가 대단한 교회 혹은 시시한 교회로 평가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쓴 교회사는 엄밀하게 말해서 종교에 관한 세속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역사는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서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인류 역사는 하나님을 떠나 진리를 거스려 행하다가 망하고 넘어지는 인간의 실패의 발자취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기록하는 역사는 인류의 실패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한 새로운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땅에서 천국을 이루어가는지에 대해 기록한 천국사이다. 구약 세계를 주름잡던 바벨론이나 폐르시아, 이집트 등은 당시 큰 위용을 자랑했으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훈련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그들의 자랑스런 제국은 오늘날 다 사라지고 없다. 역사가들은 그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들이 크고 위대한 자요 역사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역사의 조연에 불과했다. 성경은 이런 나라들을 포함하여 화려하고 영광스럽게 보이는 모든 세상 나라들을 통털어 바벨론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최후 운명은 요한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될 때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 믿음의 눈으로 역사를 볼 수 없는 세상 사람들은 역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역사를 공부해도 거기서 미래의 올바른 삶을 위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고 과거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다가 계속 망해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택한 자녀들을 눈을 여시사 역사의 참 실재가 무엇인지 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당신의 왕국을 건축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점점 확장되고 있으며 점점 견고해지고 있다.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구현체인 교회이다.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과 나라들이 명멸해 갔지만 오직 교회만 망하거나 쇠하지 않고 계속 흥왕해왔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신 후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 있는 영광스런 교회는 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계속 확장되며 흥왕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지상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아니다. 지상 교회는 언제나 흥황했던 것이 아니며 그것은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그러나 실패와 부흥을 거듭하고 있는 지상 교회 안에 완전하고 영광스런 새예루살렘의 씨가 들어 있다. 표면적인 지상 교회 안에는 언제나 가짜도 들어있지만 새예루살렘을 이룰 하나님의 참 교회도 들어 있다. 그것은 어떤 어려움과 시험 속에서도 시들거나 쇠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영광스럽게 단장되어 마지막날 마침내 어린 양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에게 안겨질 것이다.

역사 속에는 자연적 역사와 초자연 역사가 함께 있다. 세상사는 인과법칙에 따라 당연히 벌어질 일이 벌어진 자연적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전부가 아니며 역사의 참 실체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면 본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사탄의 악한 궤계 등이 포함되는 영계이다. 지상 역사는 이러한 하늘에 속한 세계의 반영체(反影體)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물질(자연) 세계는 영적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만 타락하여 눈이 어두워진 죄인들이 오직 자연만 볼 뿐 자연 너머에 있는 영적 실체적 세계를 보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역사에서는 초자연적인 면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다루면 비학문적인 것으로 취급당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역사는 실체는 두고 그림자만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세계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천 년 이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상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제자들은 분명히 환상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이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역사적 실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실제를 보았다. 다만 보통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적 실제를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 속에서 교통하는 것을 본 것이다. 분명히 자연적인 역사로 말하자면 모세와 엘리야는 어딘가에 죽어(잠들어) 있으며 주님의 재림 때 있을 부활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은 이미 부활하여 천국에 있으며 역사 속에서 주님과도 교통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진 자라야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자기들과 함께 행군하는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를 보았다. 또 열왕기하 6장에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아람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엘리사의 기도로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를 갖춘 하나님의 대군이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이렇듯 자연과 초자연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보통 사람의 눈에 그것이 안보였을 따름이다. 그래도 초자연은 자연 이상으로 명백한 현실임에 틀림없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 곧 초자연적(영적) 세계를 깊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의 자세는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 범죄하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단지 사람에게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목표 역시 썩어지고 없어질 이생의 영광과 번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그림자요 껍데기일뿐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목표로 하게 될 것이다.

영적인 세계는 실존할 뿐 아니라 자연적 세계의 원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연의 세계를 만드셨고 운행하신다. 욥이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은 자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자연의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다. 욥은 자신이 혼자 고통 당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자연적 세계, 곧 그의 아내와 친구들이 다 그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허다한 존재들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억울한 고생의 원인이 초자연적 세계에서의 역사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큰 번민에 빠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첫 사람 아담이나 주님을 버리고 타락한 가룟 유다가 헛된 생각을 가졌을 때 그 생각이 자기 자신이나 친구나 자연 세계 안에 있는 그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세계에 속한 사탄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면 자연 세계에 속한 우리는 초자연 세계, 즉 하나님이나 사탄에 의해 조종되고 이러 저리 움직이는 도구인가?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방비 상태로 있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주체적으로 즉 자기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안다면 우리는 그 뜻을 내 것으로 삼아 내 소신대로 내 주관대로 당당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꼭두각시가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 세계를 항상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며 그대로 가기 때문에 그것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키는 초자연을 대항하여 물리칠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움직이며 역사를 전개하는 주인공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과 재산 문제로 다툼이 생기게 되었을 때 그는 롯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초자연,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어두웠던 롯은 자연적으로 볼 때 좋은 땅인 소돔을 골랐다.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저없이 남은 땅인 가나안의 척박한 환경을 택했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이 아니라 초자연 즉 땅과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있었다. 나중에 소돔은 재가 되었고 척박한 가나안은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복을 누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 자연 너머에 있는 초자연, 곧 하나님을 볼 줄 알고 택하는 자에게 있어서 자연의 상태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또 그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역사의 참 주인공들의 삶이 언제나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 진정한 삶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안 사람이며 끝까지 그 길로 달려갔지만 그의 길은 계속 고난과 시련으로 이어졌으며 마지막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그런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가난과 곤고와 핍박과 위험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실패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 그처럼 당당하고 복된 삶을 산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거짓된 초자연 즉 사탄의 조종대로 되지 않고 참된 초자연 즉 자연의 참 실체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되어 나갔다.

우리는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보도록 해야 한다. 특히 교회사와 같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그의 백성들 가운데 펼쳐지는가를 목적으로 연구되는 역사는 더욱 그렇게 보아야 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역사를 보듯,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판단의 기준이 나와야 한다. 하나님을 제외시키고 세상적인 원인과 결과로만 보는 교회사는 역사의 껍데기만 보는 세상적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위대한 인간 또는 악한 인간의 삶, 즉 그들의 흥망성쇠, 애환과 투쟁 그리고 그들의 잘 잘못이 대중에게 끼친 영향 정도나 살펴보아서는 역사의 참 근원인 '하나님의 섭리'나 '인간 삶의 참된 의미'가 도외시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베일에 싸이고 인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사람들은 싸울 때 서로 하나님더러 자기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한다. 기독교인들도 싸을 때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자기가 이기게 해달라고 간구했던가? 남북전쟁 때 북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링컨 주위의 찰모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절감하며 말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 편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링컨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아무의 편도 아니다. 그 분은 오직 자신의 편이시다.  그 분만이 옳고 정의롭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용되는 대상이 아니시다. 신자들이 기도하며 계획을 새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 뜻에 맞아야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 있는 자는 필요에 따라서 악인의 꾀를 좇거나 죄인의 길에 서는 이가 아니라 죽든지 살든지 진리만 좇으며 그것만 붙잡는 자이다. 어떤 일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열심과 지혜를 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하나님의 가장 우선적인 뜻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온 세상을 덮는 것이다. 먼저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이 세계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서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교회사의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가 자기 일에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일에 참여하여 가치 있게 쓰임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개인의 삶은 망하더라도 하나님외 나라가 흥하기를 소원하였다. 이런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신앙과 교회사>

하나님의 역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세상살이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길은 어떻게 보는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참 신앙의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판단하지만 세상으로부터는 판단을 받지 않으며 세상이 감당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장 약해 보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들이다. 신앙의 사람들온 바람 속에서도, 천둥 속에서도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그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산에도 계시고 바다에도 계시고 왕궁에도 계시고 달동네에도 계신다. 인간 사회에서 철러 가지 포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정의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 자리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선의 현장에, 악의 현장에,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의 무서운 눈과 하나님의 뜨거운 가슴은 분명히 살아계신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분의 손은 역사를 만들어 나가신다.

그 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세상적인 눈으로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조용히 자신의 일, 곧 구원 사역을 수행하셨다. 살육과 처참과 절망 속에 고통을 견디지 못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부르짖는 사람도 많았지만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펼치시며 일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옛날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를 떠나서 방랑길에 들어선지 수 천 년이 지난 후 그의 아들 이삭으로 예표되었던 약속의 메시야 그리스도가 오셨다. 성경은 이 부름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스도는 마굿간에 태어났으며 그의 삶은 한 마디로 고난과 저주의 삶이었다. 그는 제자와 자기가 먹이고 가르쳤던 무리들에게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다. 성경은 이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에 대해 해석(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 후 수 천 년 간의 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구세주가 오셨는데 그의 모든 삶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 한 하나님의 행위였다. 그가 받은 모든 고난과 저주는 우리를 대신한 것이며 그의 부활과 영광 받으심도 우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이렇듯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사건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설명이 없는 사건들의 나열은 아무런 영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천 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큰 일을 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처럼 교회사 속에서도 사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아야 하며 그것을 해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견고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밝혀내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천 년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많은 일들을 살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완전하게 성취되어 가고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2.때가 차매 주님이 오심

역사에서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데 하나님의 시간은 너무나 그의 계획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교회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국 복음을 온 땅에 전파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기에 오셨다면 천국은 급속하게 전파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때는 그야말로 '때가 찼을' 때였다. 정치,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주님은 때가 찼을 때 오셨다.  

(1) 로마의 세계 재패 (정치적 상황)

주님께서 육신으로 탄생하실 때 로마는 건국한 지 750년이 되었다. 서부 이태리의 한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로마는 계속적인 전쟁과 조약을 통해서 영토를 넓혀가면서 세계 최고의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주전 250년, 즉 건국한 지 500년이 지나서 로마는 이태리 반도의 주인이 되었고 그 후 100년 동안 로마는 시칠리와 코르시카, 사르데냐를 정복하고 강국 카르타고를 복종시켰다. 그 후 계속적으로 영토가 넓혀져서 유대가 속한 땅인 팔레스틴도 주전 63년에 로마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주전 27년에 로마는 줄리우스 시이저의 조카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아래 들어가게 되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는 주후 14년까지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이 사람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로서, 제국 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고향으로 가서 호적하도록 명령한 사람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동서로는 페르시아로부터 영국까지 그리고 남북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사하라사막에서부터 북부 독일에까지 이르렀다. 이 영토는 4세기 이상 유지되었다.

로마보다 긴 역사와 전통을 가진 수백의 종족들이 제국의 판도 내에 살고 있었다. 로마 사람들은 대단히 실제적이어서 이 많은 인종들을 잘 조화시켜 나갔다. 로마는 합리적인 통치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였다. 로마의 군대는 로마의 평화뿐만 아니라 로마의 힘과 법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로마 문명은 꽃피워졌다. 그렇게 로마의 문화, 건축술, 예술은 발달해졌다.  

복음이 전파되려면 무엇보다도 평화시대가 계속되어야 한다. 전쟁과 무질서 속에서 복음은 전해질 수 없다. 비록 박해를 받아도 세상적인 질서가 있어야만 선교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로마제국의 평화는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나라와 민족이 한 제국을 이루었어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그리고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전도자들이 움직이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국 내에는 훌륭한 도로 시설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고속도로는 사두마차 두 대가 비껴갈 수 있는 넓이에, 바위로 바닥을 깐 것이었다. 로마의 평화 아래 여행하기가 용이했고 이로 인해서 상업이 자연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길을 통해서 바울이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제국 내의 여러 지역으로 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는 로마제국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가능하지 않았다. 복음전파는 로마의 평화 아래서 수 백년간 최상의 기회를 만난 것이다.  

(2) 유대교의 확산 (종교적 상황)

기독교는 유대교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며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님도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다윗 때 건국되었으며 그 손자 르호보암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졌다. 이 나라들은 몇 백년이 지난 후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당하게 되었고 그 백성들은 주변 여러나라들로 끌려가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땅을 떠나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주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한 폐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유대의 포로들이 본국에 돌아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성전과 성곽을 건축하고 도시를 재건하였다.

주전 141년에 마카비 일가는 당시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시리아의 세력에 대항해서 새 나라를 세운다. 바벨론으로부터 멸망당한 뒤 여러 나라의 지역 속국으로 있다가 처음으로 독립국가가 된 것이다. 이 나라는 80년간 유지되었으나 주전63년에 일어난 내란으로 말미암아 결국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주전 37년에는 헤롯이 로마의 허락을 받아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그가 죽자 나라는 그의 아들들이 나누어 가졌다. 얼마 못가서 유다의 통치는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으로 대치되고, 주후 26년부터 10년간온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다스려졌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유대인들의 예배 중심은 애루살렘의 성전이었다. 그러나 포로 시기부터 이 일을 회당에서 하게 되었다. 전부터 있던 회당이 이제는 기도와 성경읽기, 율법과 기타의 교육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에스라와 후계자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회당의 일을 더욱 강화하였다. 유대 땅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돌에게 있어서 회당은 삶의 중심이었고,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지역의 우두머리가 회당장이 되었다. 성경 낭독자, 기도자, 회당장 보조 등이 선출되었다.

그리스도가 탄생할 무렵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본토보다 다른 지역에 더 많이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포로 분산 정책에 의해 억지로 그렇게 되었으나 나중에는 상업 때문에 유대인들 스스로가 전세계로 흩어져 나간 것이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약250만 가량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에는 각각 100만명이나 되는 교포가 있었고 이태리와 북아프리카에도 약 10만명이나 되는 교포들이 있었다. 그 외에 수많은 유대인의 무리들이 로마제국 내에 산재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디아스포라는 당시의 큰 국제 도시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거의 전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서 구약성경이 당시 사용되던 헬라어로 번역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바로 주전 250년에 출간된 70인역 성경이다.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 교포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초대교회의 전도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동포들을 방문하고 거기 거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세계적 확산과 거기에 동반된 지역 회당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만드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3) 헬라의 문화

다양한 인종들이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테두리 안에 있었으나 그들을 문화적으로 묶어놓은 것은 헬라어 문화였다. 그리스도 탄생시 팔레스틴 땅에서 쓰이는 언어는 아람어와 헬라어였는데 공용어는 거의 헬라어였다. 히브리어는 오랜 포로 생활과 정복 생활로 인해 사어가 되어버렸다. 로마 제국 내의 여러 나라들은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 사상 면에서는 여전히 헬라(그리이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주전 7세기부터 헬라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일어나 세상과 삶의 의미를 연구했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철학자들이 일어나 철학과 사상의 기초를 놓았다.

이런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인해 주님 탄생 당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상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상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역작용을 한 점도 있지만 바울 등의 전도자들이 사람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던 헬라 사상의 용어와 사상 체계를 빌어서 복음을 설명함으로써 보다 쉽게 진리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로고스(말씀)라는 개념이나 영혼과 육체에 대한 개념과 같은 여러 개념들이 헬라 철학으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 널리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하는데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저급한 종교적 상황

교육받은 이들은 철학에서 그런대로 갈 길을 찾았지만, 무식한 대중들은 종교로부터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다. 당시 제국의 종교는 대체로 3종류로 나눌 수 있었다. 자연종교, 신비종교, 국가종교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교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기독교의 순결함과 도덕성과 능력에 압도당하게 되었다.

{자연종교}는 원시적인 지역에서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산이나 호수, 강, 나무, 태양이나 달을 막론하고 자연 어디서나 숭배대상이 있다. 여기에 덧붙여 {조상 숭배}나 {무당 종교}에서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각종 신들이 있다. 이러한 종교를 믿는 이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신비종교}는 인도, 페르시아, 바벨론, 이집트 등지에서 들어왔다. 비밀스런 의식을 통해 새 힘과 생명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신자들은 그들이 참가한 의식에 대하여 비밀을 지켜야만 했다. 여러 종류 가운데 대표적인 신비종교라 할 수 있는 미드라교는 미드라신이 소를 걸터앉아서 죽이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소를 죽일 때 나오는 피에 세계를 위한 생명의 씨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전투전에 이 의식을 행하였다. 미드라교 외에도 여러 가지 신비 종교들이 있었다.

또 하나는 {황제숭배}였다. 이것은 말 그대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물론 죽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여 회생제물을 드렸지만 차츰 산 황제를 신의 성육신한 상태로 여겨 바로 숭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와 번영을 주기 위해 성육신한 신들인 것으로 여겨졌다. 황제숭배는 형식적인 예식만을 진행하였지 신과의 교제나 연합 같은 것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이런 모든 거짓된 종교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영적인 갈급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런 종교들은 하나같이 도덕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경배하는 이가 도덕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건, 예물을 드리고 신을 만족시키면 복이 주어진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도리어 인간의 탐욕만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구원의 개념이나 방법도 대단히 유치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종교를 아무리 열심히 믿어 보아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죄 의식을 지울 수도 없고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기독교의 복음은 빛이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에는 평화가 있었다. 로마식으로 정치는 안정되었고, 민족들은 서로 공존하며 번영하였다. 그들은 헬라어를 국제어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제국 전체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거주지를 발판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복음은 조용히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복음은 이런 좋은 조건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퍼져 나갔다. 헬라식 사고의 한계 그리고 여러 저질 종교들에서 오는 영적인 갈급은 진리를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 적합한 때에 오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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