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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5) - 로마교회의 발아기

이상봉 2010.04.29 12:33 조회 수 : 5596

제2부 중세교회사


 

1.로마교회 발아기 (590-800)


 

1. 서론


 

세계사에서 중세(middle age)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476년) 16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천 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원래 르네상스시대의 지식인들이 古典古代와 그들의 시대에 끼어 있는 암흑과 야만의 시대를 중간 시대(medii aevi)로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중세 초의 암흑과 비문화의 시기는 대체로 6-10세기에 국한되며 13세기를 전후해서는 독특하고 우수한 중세문화가 형성되었으므로 중세가 모두 암흑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中世史란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부터가 아니라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590) 때부터 루터의 종교 개혁 때(1517)까지의 920년간의 교회사를 말한다. 이 시기 곧 중세 기독교의 역사는 어거스틴의 신앙과 사상이 실현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방세계의 통합된 정치세력으로서의 서로마가 사라진 후 정치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공백기가 왔으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유럽 문명권이 크게 삼분되었다. 즉 東에서는 로마제국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흡수한 비잔틴 제국의 문명권이 존속해 있는 동안, 西에서는 침입자인 여러 게르만 국가들에 의해 독특한 서방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이슬람 문명권이 7세기에 흥기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세 문명권은 각각 그 특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중세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서방문명권이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독특한 유럽문명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2. 로마교회 발아기의 특성


 

1.역사의 중심의 동방에서 서방으로 이동함


 

고대에 있어서 영광의 역사를 가진 동방의 헬라 교회는, 안으로는 생명이 마르고 밖으로는 이슬람교의 발흥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의 세력은 확장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1.원인


 

첫째, 라틴민족은 본래 정치적 자질이 풍부하여 통일된 힘을 발휘함으로써 로마교회라는 큰 단체를 건설할 수 있었다. 둘째, 고대로부터의 전설과 문명이 로마교회 안에 보존되어 여러 이교적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교회로 들어오기가 쉬었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초래했지만 큰 교회를 손쉽게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 셋째, 탁월한 역량을 가진 인물들이 감독(교황)이 되어 교권과 정치권을 장악함으로써 큰 교회를 이룰 수 있었다. 넷째, 카논법이라는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황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다섯째, 사를마뉴, 오토 같은 영웅들이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나라가 안정되었고 그들이 기독교와 제휴하거나 옹호하였기 때문에 교회 활동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합쳐져서 로마 교회는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여러 제후들이 군웅할거하는 봉건 암흑시대에 세력을 확장하고 교권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2.결과


 

그러나 권세가 있는 곳에 부패가 따랐고, 교회의 외적 성장과 반비례하여 교회의 영적 수준은 크게 낮아졌다. 이로 인해 민중들은 무지하게 되었고 미신적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신학과 사상도 정치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별 발전이 없었다.


 

2.기독교적 생활의 활성화


 

교리(사상) 면에 있어서 중세는 고대 교회사를 넘어서지 못하고 거기에 부속된 수준이었지만 생활 면에서는 기독교가 생활 속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서 모든 사물과 일상사가 다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는 새로이 중세를 지배하게 된 게르만 민족의 독특한 근면성 및 예술성과 로마인들의 정신적, 정치적 자질이 합쳐져서 형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수많은 성자와 위인이 나타나서 기독교적 삶의 감화를 주었다.

또한 기독교와 관련하여 건축, 회화, 조각 활동도 크게 왕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대에 이름을 떨친 거장들과 거작들이 많이 나타났다.


 

3.여러 차례의 종교적 부흥이 있음


 

중세 기독교 역사는 심한 타락의 시대가 계속 되는 가운데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차례 신앙적 부흥 역사가 있었다. 오늘의 로마 카톨릭을 지배하는 신학과 제도는 거의 중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중세는 근대 사회와 근세 기독교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4.시대 구분


 

1.과도시대(590-800) 샤를마뉴 대제의 즉위.


 

2.성장시대(800-1073) 그레고리우스 7세 즉위.


 

3.전성시대(1073-1303) 보니파키우스 즉위.


 

4.쇠퇴시대(1303-1517) 종교 개혁.




 

3. 그레고리우스 1세


 

1.생애


 

그레고리우스 1세는 고대사와 중세사를 잇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최후의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540년 경 로마의 부호의 집에서 출생했는데 어머니와 고모 2명이 성자 칭호를 받은 신실한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로마시장이던 부친이 죽자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수도원에 기증하고 자신은 수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금욕 생활로 건강을 해쳐서 평생 약한 몸으로 살았다. 그는 교황의 특사로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하고 교황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동안 신앙과 덕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은 결과, 로마 감독 벨라기우스 2세가 죽었을 무렵 롬바르디아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교회와 원로원, 국민들의 일치된 지지에 의해서 거의 반강제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590년 9월) 그는 604년 3월 12일에 죽었다.


 

2.업적


 

서로마제국의 폐허 위에 새로운 야만인(게르만족)의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레고리우스는 기독교회의 위상을 계속 지키고 제국 위에 떨친 탁월한 교황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하였고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위에 오를 당시 교황(로마 감독)의 위세는 대단히 약화되어 있었고 교회의 기강도 문란한 상태였다. 그는 교황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한 수도사처럼 단순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① 교회의 중요 직위에 수도사를 채용했고, ② 교직 매매를 금했으며, ③ 성직자가 된 후의 결혼을 금하는 등 엄격한 규율을 실행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 행정적 수완이 뛰어나서 롬바르디아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군사력을 배양하고 무력과 조공으로 로마를 방어하며, 로마 교황의 권위로 롬바르디아족과 화해하고 롬바르디아족 및 황제 대표들과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혼란한 투쟁 속에서 자기 재직 기간 동안 로마가 정복당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로마인들이나 롬바르디아족은 나약한 황제보다 그를 더 유력한 실권자로 볼 정도였다.


 

교황청의 유지와 로마에 필요한 식량의 대부분은 시실리,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남부 프랑스에 널린 교황청 재산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는 유능하고 힘있는 지주였다. 그는 재산 관리에 힘을 써서 그의 수입을 늘렸다. 이 세입으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주요 필요에 충당했으며 많은 구제도 했다.


 

그는 또한 전도에도 힘을 기울여 아우구스티누스를 영국에 파송하여 영국 선교를 시작하게 하였다. 고올(프랑스지역)을 로마 교회의 세력 범위 안에 두고, 스페인의 교회도 아리우스설로부터 정통파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리 하여 그는 서유럽에 있어서 교회 통일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회 생활과 예배에 이르기까지 정력적으로 모든 분야에 손을 뻗쳐 정비를 했다. 그가 정한 예배 순서는 지방에 따라서 다소 수정이 가해지기는 했지만 널리 서방 교회의 전형이 되었으며 그레고리안 성가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는 연옥설을 신앙의 한 요목으로 정하였다. 그는 작은 죄는 심판 전 연옥의 불로써 정결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다른 사람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연옥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친 최초의 사람이다.


 

3.실책


 

그의 실패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위를 자칭하는 포카스(Phocas)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났다. 포카스는 자기가 왕위를 빼앗는 것을 반대한 6명에 대해서 그들의 아들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학살한 극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해 관계가 있어서 그와 우호 관계를 맺고 포카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정중한 축사를 보냈다.


 

4.저서와 사상


 

그는 성경 주해와 설교집을 많이 냈다. 그러나 학자로서는 별로 탁월하지 못했다. 그의 성경 해석은 억지로 갖다 붙인 궤변이 많고 신학적으로도 신통하지 못했다.


 

그는 기독교회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 제롬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따랐으며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랐다. 그리고 후기에는 반펠라기우스주의로 기울었다. 그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있어서는 니케아 회의로부터 칼케돈 회의에 이르기까지의 신앙을 계승했고, 인간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는 전통적 신앙에서 이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운 자가 될 수 있게 만드셨다." 그는 유전된 원죄는 세례를 통해서 용서되지만, 생활 속에서 실제로 짓는 죄는 모든 죄는 그것을 일정한 행위를 통해서 탕감 받아야 한다고 했다. 즉 그는 고행으로 자기를 형벌함으로써 죄의 탕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현세적 형벌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형벌을 모면할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기독교회의 의식적 사죄는 영원한 형벌을 현세적 형벌로 변형시킬 수 있음을 주장했다. 또한 이것은 성자들의 중재를 통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형벌이 감소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사상을 간추려 보면, 그는 로마 카톨릭의 제도적 의식(儀式)을 하나님의 내적 은총으로 보았으며 그것을 외적인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구체화시켰고 성도들은 이 세상 곧 로마 카톨릭교회를 통해서 연옥을 지나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간다고 하여 하늘 나라에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부각시켰다.




 

4. 이슬람교의 발흥


 

1.서론


 

중세 기독교회사에 있어서 모하메드의 출현과 이슬람교의 발생은 교회에 큰 충격과 각성을 주었다. 기독교회는 당시 비록 신앙적 논쟁을 통해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교회 발전의 기초를 놓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비실제적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과 재정을 낭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이단종파들에 대해 거의 무관심했기 때문에 이슬람이 침투할 여지를 주었다.


 

당시 기독교회는 몬타누스파, 도나투스파, 아리우스파, 펠라기우스파, 네스토리우스파 등 많은 기독교의 분파들과 이단 종파들로 말미암아 큰 혼란에 빠져 있었고 또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에는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되어 서로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기독교의 가장 강한 방파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발상지들 곧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 및 팔레스티나가 모하메드의 침략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명목만의 신자들은 거의 모하메드교를 따르게 되었다.


 

이슬람교라는 이름은 아라비아어의 {이슬람}에서 나왔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신의 의지나 명령에 절대귀의(絶對歸依)·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그 뒤 이러한 귀의 방법을 제도화한 문화적·사회적 복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슬람교는 창시자 모하메드의 이름을 따서 모하메드교라고도 한다.


 

2.모하메드의 출현


 

칭찬받는 자라는 뜻을 지닌 모하메드(마호메드)는 예루살렘이 멸망된 지 꼭 5세기 후인 570년에 아라비아의 도시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의 성격은 우울하고 현실도피적이었으며 신비적 환상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미신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심령, 징조, 꿈, 주문 등을 믿었다. 그는 12살 때 숙부를 따라서 시리아로 가서 살았는데 거기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긴밀한 접촉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때 아라비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잡신 숭배와 여러 부도덕한 행위들이 죄라고 느끼게 되었다.


 

모하메드는 25살 때 부유한 과부 카디자의 집에서 약대를 끌며 상업에 종사하다가 마침내 그녀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상업을 계속하는 한편, 메카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을 했다. 610년 그의 나이 40세 무렵에 그는 최초의 소위 신적 계시라는 것을 받았다. 처음에는 유일신 알라의 계시인지를 믿을 수 없어 고뇌하지만, 곧 예언자임을 자각(自覺)하여 그의 일신교적 원리를 포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유대교, 세속화되어 가는 기독교,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아라비아 신앙은 이미 낡은 시대의 것이요, 오직 신의 지혜를 가지며 최후적인 계시를 받은 자신에게 모든 신앙과 생활을 바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사람들에게 천지의 종말이 임박했으니 우상숭배를 중지하고 알라에게 귀의하여,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를 추종한 사람은 아내와 두 양자인 알리와 자이드, 친구 아부베클 밖에 없었다. 반면에 그의 친척들과 고향 메카 사람들은 마호메트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신도들을 배척 박해였다. 이에 627년 7월 15일 마호메트는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버리고 포교의 활로(活路)를 찾아 메카에서 북쪽으로 약 250마일 떨어진 메디나로 도피하였다. 이것을 Hegira(聖遷)라고 하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이 날을 그들의 원년으로 삼는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대다수의 메디나주민과 메카에서 이주한 신도들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 공동체인 움마를 만들었다. 630년에는 종교지도자·정치가로서 메디나에 살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주변의 아랍 여러 부족들을 교화하여 메카를 정복했다. 그는 메카 사람들과 싸워서 그곳의 신당과 우상들을 제거하고 메카를 신흥 이슬람의 중심지로 삼았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전지역이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호메트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성전 코란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심는 데 성공했다.


 

모하메드의 당초의 뜻은 아라비아 백성의 종교를 개혁하는데 있었으나 그 목적이 점점 변하여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종교를 세우기로 계획을 세우고 이 뜻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칼을 사용하는 것도 사양치 않았다.


 

처음에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 특히 같은 일신교인 유대교나 기독교 등과 손을 잡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이 박해를 가해왔기 때문에 이슬람 역시 배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3.교리


 

그들의 교리는 절충적인데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취한 것에다가 스스로 만든 것들을 혼합시킨 것이다.


 

① 그의 가르침의 근본은 일신교 사상으로서, 모든 우상을 배척하며 신의 뜻은 최고의 권위이므로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그들의 참신의 이름은 알라(Allah)이며, 알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무죄한 천사를 보냈는데 그 중에는 모세와 예수도 포함된다고 한다. 그러나 모하메드야말로 참 대예언자로서 모세나 예수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③ 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인 모하메드를 믿고 신앙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신의 보상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모하메드 신앙의 근본 원리이다.


 

④ 그들은 절대 복종(이슬람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복종이다)을 매우 강조한다.


 

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 내용이자 생활 원리는, 알라신 외의 다른 신이 없다고 믿는 것과, '모하메드는 알라신의 예언자'라는 신조를 외우는 것, 메카에 있는 카아바(Kaaba) 신당을 향하여 매일 다섯 가지 일정한 기도를 드리는 일을 행하는 것, 그밖에 그들 달력으로 9월인 라마단에는 30일 동안 금식을 하는 것, 메카를 순례하는 것 등이다.


 

⑥ 모하메드교의 도덕은 계율적이다. 우선 신자가 해야 할 의무, 곧 기도와 금식, 구제, 메카 순례와 같은 근행(勤行)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신으로부터 받는 보상도 매우 육적이고 감각적이다. 음주를 금하고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나, 일부다처를 허용하며 부인의 지위를 천한 것으로 여겨 그 도덕 관념은 낮다. 또 노예도 허용한다.


 

4.경전 <코란>


 

이슬람교 신앙과 생활의 규범은 코란이다. 이것은 모하메드가 말한 것을 수록한 언행록이며 114장으로 되어 있다. 코란에 의하면 모하메드는 최고, 최종 예언자이며 종교, 정치 및 모든 사물의 원리를 결정하는 至上의 권위이다. 코란은 모하메드 사후 20년 후 그의 친구요 후계자인 아부베커(Abubeker)와 서기 자이드(Zaid)가 편집하였다.


 

5.포교


 

이슬람교의 특징은 신앙 뿐 아니라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 실권을 장악하여 이슬람교化하는 것이다. 그들의 전도는 칼과 코란을 들고 "알라신에게 복종하라 찬양하라 그렇지 않으면 목을 베일 것이다" 라고 외치며 정복 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들이 제시하는 보상은 지상에서의 노획물이었고, 죽은 후에도 정욕적 쾌락을 누리는 낙원이었다. 이런 조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어서 그들의 포교는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거기다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연합된 힘으로 정복 활동을 편 결과 그들은 주변의 이교적 내지는 원시적 종교를 가진 부족들을 정복할 뿐 아니라 기독교 국가도 상당수 정복하여 이슬람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의 포교적 확장은 모하메드가 죽은 후 더욱 가속되었다. 그의 후계자는 칼리프(Khalif)라고 하는데 칼리프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 군사에 관한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왕이었다. 모하메드는 왕이 없었으므로 그의 장인이자 친구인 아부베클이 1대 칼리프가 되었다. 외국 정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아라비아가 이슬람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고 그후 약 100년 동안 이슬람교는 소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해 나갔다.


 

그들은 피정복자들을 설득하여 이슬람 포교의 선봉에 서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폭넓은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그들의 영역은 동으로는 인도, 서 아시아, 중앙 아시아에 이르렀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 연안과 스페인 반도,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렀고 심지어 로마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6.모하메드교의 분열


 

세력 확장에 크게 성공을 거둔 후 칼리프의 교권 다툼이 벌어졌으며 이로 인해 이슬람은 분열과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모하메드의 후계자는 1대가 그의 장인 아부베커(Abu-Beker, 632-644)였고 2대가 오마르(Omar, 634-644), 3대가 오트만(Othman, 644-655)이었다. 오마르는 이집트로 진군하여 641년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유명한 도서관을 불태웠다. 오트만은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칼리프의 자리 다툼으로 오마르도 오트만도 다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모하메드의 조카 사위인 알리(Ali)가 칼리프의 자리를 이었는데 6년 후에 그도 므아위아(Moiawiyai)에 의해 살해되었다. 6대 칼리프에 오른 므아위아 1세는 모하메드의 친척 옴마야가의 자손이므로 이를 옴마야(Ommaiya)家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분열은 칼리프의 자리 다툼 외에도 교리적 차이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3대 칼리프 치하에서 코란 외의 전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을 순나(Sunna)라고 하였다. 이 순나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이슬람은 두 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순나를 전부 승인하고 스스로를 정통 이슬람교라고 부르는 파를 수니파(Sunnites), 이를 반대한 파를 시아파(Shites)라고 한다. 전자는 소위 주류파로서 터키를 중심으로 한 전체 모하메드교이고, 후자는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전 신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한다.


 

이슬람교의 동방에 대한 포교는 순탄하였다. 주후 632년에서 651년 사이에 페르시아 전체가 모하메드 수중에 들어갔고, 더 나아가 인도까지 갔다. 그리고 스페인도 점령하였다. 반면에 서방에 대한 진출은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중세 기독교회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었다. 특히 711년 투르의 전투에서 모하메드교가 프랑크게 패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약 1세기 동안 이슬람교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중국 당나라의 국경에 이르렀으며, 하나의 사라센제국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단일 지배 체제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옴마야가의 시대는 거의 백 년에 이르렀으나 쇠퇴하게 되었고 이때를 틈타서 알리의 자손이 일어나서 압바스(Abbas)를 칼리프로 옹립하였다. 이로서 옴마야조는 무너지고 750년에 압바스가 열렸다. 이들은 762년 티그리스강 하류에 있는 바그다드로 도읍을 옮겼다. 압바스가는 아라비안나이트로 이름난 하룬알 라쉬드(Harounal Rashid, 786-809) 시대에 가장 번영했다.


 

옴마야가가 쓰러질 때 압델 라만(Abder Rahman)이라는 자가 화를 면하고 스페인으로 가서 코르도바에 도읍하여 스스로 칼리프로 칭하였다. 이리하여 이슬람은 바그다드와 코르도바에 두 칼리프가 대립 경쟁하게 되었는데, 10세기 초엽에는 동칼리프로부터 이집트의 카이로 칼리프가 분리하여 마침내 세 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10-15세기에 이르는 '국토회복운동'으로 마침내 기독교도에게 탈환되었다.


 

7.수피파


 

모하메드교의 본래 교리는 계율적이고 타율적인 것이어서 신비적인 요소는 적었다. 그러나 이슬람에 페르시아에 들어가게 되자 페르시아의 신비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이로서 이슬람에도 신비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을 수피파(Sufiism)이라고 한다. 수피파 또는 수피즘은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신학적 사변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에 반대하고 행위의 동기, 성전(聖殿)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9세기 무렵 발생한 것이다.


 

수피파에게 있어서는 신의 유일성이라는 것은, 단지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즉 유일신 이외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로 해석된다. 그리고 명상 속에서 자아 의식을 무(無)로 하고, 자기와 신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초월한 상황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신을 실감하는 것(파나)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신의 유일성을 체험한 사람을 성자(聖者; 왈리)라고 한다. 수피파는 그 성자의 전형(典型)을 예언자 마호메트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일체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신에게만 사념(思念)을 집중하는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이슬람법은 이와 같은 수행을 의무로 규정짓고 있다. 이리하여 고전 이슬람이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통교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것에 비해 수피즘은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통교하는 개인형(個人型)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곧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었다. 12,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오로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이화(簡易化)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성자에 대한 신앙으로 수피즘은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교단(타리카)의 형태로 이슬람세계 전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슬람의 광범위한 포교와 발전에 활력을 준 것은 주로 수피적 이슬람과 수피교단의 성자 및 상인들이었다.


 

16,17세기를 정점으로 한 발전의 시기가 지나고 이슬람세계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피들은 체험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며, 이성(理性)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은 주술(呪術)화되었다. '신에게로의 귀의'(타와쿨)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무활동·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었고,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5. 서유럽 전도


 

1.프랑스 전도


 

유럽의 개종 역사는 사도 바울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차츰 한 나라씩 개종되기 시작하여 11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 왕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전 유럽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거의 복음화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은 이레네우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2세기 후반에 리용의 감독으로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프랑스 지역에 적극적인 전도의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투르의 군신이요 수도사인 마르틴(Martin, Bishop of Tours ; 361-400)이다. 그는 프랑크족과 그밖의 북방 족속들이 고올로 침입한 뒤에 이곳에서 선구자적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군인이었으므로 선교도 군대식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기독교로 입교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수도사들을 데리고 다리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상 사원과 무덤을 헐고 복음을 전하였다.


 

프랑스 전도에 크게 공헌한 왕들


 

1.클로비스 (Clovis)


 

프랑크족은 클로비스의 지도 하에 점차 전 고올 지방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고올(Gaul)을 프랑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프랑크족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프랑크 왕 클로비스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비슷한 회심의 계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에서 치열한 전쟁에서 하늘에 있는 십자가 형성을 보았고 그것을 본 후 승리했기 때문에 그의 승리가 십자가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그리고 496년 성탄절에 그의 3만 명의 무사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전 종족이 신자가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는 타의적이고 대중적인 집단 개종으로 인해 기독교화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교적 요소들을 그대로 안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2.샤를 마르텔 (Charles Martel, 715-740)


 

프랑크 전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왕은 캐롤링 왕조의 샤를 마르텔이다. 그는 패팽(Pippin)의 아들인데 투르 전쟁(732)에서 이슬람교 군대의 서유럽 진격을 영구히 막아낸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정권 확장에 교회 이용의 필요를 느껴서 선교 사업을 후원했다. 그는 서부 독일 대부분을 기독교화하고, 프랑크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청과 프랑크족과의 관계를 접근시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선교 사업과 개혁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 왕자 시절의 마르텔은 수도사가 되어 기독교를 더욱 높은 지위로 격상시켰으며 왕은 교황 보니파키우스의 주선으로 742년 프랑크 교회 대회를 소집하여 ①규칙과 계율을 엄수할 것, ②교직자의 부도덕 행위를 엄금할 것, ③신부(神父)의 결혼을 금지할 것, ④금욕 생활을 장려할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747년에는 감독 회의를 소집하여 교황의 사법권을 인정하였다.


 

2.독일 전도


 

독일 전도는 프러시아의 사도라고 불리는 윌리브로드(Willibroad, 657-739)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영국인으로 아일랜드 교회의 감화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아일랜드의 한 수도원에서 12년을 보낸 후 690년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프러시아 선교를 떠났다. 그는 695년 교황의 임명으로 프러시아 감독이 되었고 698년에는 에터낙에 수도원을 세워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후에 그는 화란과 덴마아크에도 선교를 했고 많은 고생을 하며 북부 유럽에 로마교회의 터전을 세우는데 진력하였다.


 

영국 사람들이 회심한 후에는 위대한 선교사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그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 독일에 전도를 한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이다. 그는 영국 귀족 출신으로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 일찍부터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다가 신부가 되어 선교사로 나갔다. 처음에 그는 화란에서 선교하고 있는 윌리브로드에게 가서 제자가 되어 그를 도우며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화란 왕의 전도 사업 거절에 실망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 왔다가 로마로 갔는데 거기서 교황의 신임을 얻어 독일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독일의 오지 중 하나인 헷세로 가서 거기 사고 있던 많은 '이교적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여 정통적(카톨릭) 기독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이 일로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에 의해 독일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723년 그는 헷세에서 군중들에게 표적을 나타냄으로써 많은 군중들을 압조하여 기독교로 개종을 시켰다. 그것은 전에 그의 복음 전파를 통해 기독교로 개종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로 우뢰의 신 토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벌인 일이었다. 그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우뢰 신이 산다는 참나무를 직접 도끼로 찍어 넘어뜨렸다. 그러나 그가 무사하자 많은 사람은 다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20년간 10만 명에게 세례를 받게 만들었다.


 

보니파키우스는 서북 유럽과 중앙 유럽의 복음 전파와 교회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고 732년에는 대감독이 되었다. 그는 744년 쾰른 남방 풀다(Fulda)에 베네딕투스계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후에 독일 중서부 전체의 학문과 성직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3.영국 전도


 

1.패트릭 (Patrick, Patricius; 389?-461)


 

영국에는 400년 경 그곳에 주둔하는 기독교인 로마 군인들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이미 소개되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전도에 의해 초보적이고 약간은 이단적 성격을 띤 교회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 본격적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제도와 조직을 정비한 선교사는 패트릭 또는 파트리키우스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패트릭은 웨일즈 혹은 스코틀랜드의 한 신자 가정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해적들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북 아일랜드의 한 추장집에서 6년간 목동 생활을 하였다. 후에 그곳을 도망쳐 나온 그는 고올로 가서 수도사 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그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일랜드인이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환상을 보고, 432년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아일랜드로 가서 30년간 전도를 했다.


 

그의 선교 지역은 주로 아일랜드 동북지방이었는데 그의 성실함과 열렬한 전도로 인해 그는 일반 시민들과 귀족들로부터 신망을 받았고 수십 개의 교회를 세우고 수천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수도사 학교도 세웠는데 그의 수도사 학교는 그의 후계자들이 세운 수도사 학교와 더불어 영국 학문과 경건 생활의 요체가 되었다. 패트릭의 사역과 설교는 당시의 아일랜드 뿐 아니라 중세기 전체의 아일랜드, 영국 및 유럽 대륙의 선교생활과 교회생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2.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of Canterbury)


 

영국 전도에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선교사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수행원 40명이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596년 이들을 영국으로 선교하도록 파송했다. 그들은 영국 동남부의 켄트 왕 에텔버트(Ethelbert)로부터 수도 캔터베리에 자리를 잡고 전도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켄트 왕은 먼저 신자가 되어 있던 부인으로 인해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데 그 후 켄트 왕 자신과 만 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601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국의 대감독이 되어 계속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는 607년에 세상을 떠났다.


 

3.컬럼바 (Columba, 521-597)


 

컬럼바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의 전도자로서 563년에 동지 12명과 스코틀랜드의 아이오나(Iona) 섬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을 세워 꾸준히 전도 사업을 했다. 그는 34년이나 전도를 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기적을 행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다. 나중에는 심지어 왕들도 그의 축복을 받으러 올 정도가 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를 위해 누구보다 많은 봉사를 한 전도자였다.


 

4.아이단 (Aidan)


 

아이단은 영국 북부에서 전도 활동을 한 아이오나 출신의 수도사로서 노섬브리아 왕 오스왈드의 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635년 감독 안수를 받고 린디스판 섬에 주재하며 육지와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의 복음 전파 때는 그가 그곳 말을 배우기까지 왕이 그의 말을 통역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642년 그를 지지하던 오스왈드 왕이 전사하자 노섬브리아는 그의 두 친척 오스위와 오스윈 두 사람이 양분하여 다스렸는데 오스윈(Oswin)이 오스왈드와 마찬가지로 그를 후원하여 선교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아이단은 검소하고 근면한 생활을 했으며 돈이 생기면 노예 석방에 사용했다. 그가 늙었을 때 왕은 그에게 좋은 말과 안장을 주어 순행하도록 해 주었는데 그때도 그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자기는 도보로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이런 삶을 통해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5.파울리누스 (Paulinus)


 

켄트 왕의 누이이며 에델버트의 딸인 켄트 공주는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에게 출가할 때 궁중 목사였던 파울리누스를 동반했다. 파울리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수행원 40명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에드윈 왕에게 전도하여 세례를 주고 에드윈 왕으로 하여금 국내의 유력한 자를 모아 기독교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결국 기독교를 채택하기로 결의하였고 파울리누스는 627년에 요크의 감독이 되었다.


 

6.영국 교회의 반동과 싸움


 

영국 교회에도 파란과 곡절이 있었다. 남부 켄트(Kent)에서 기독교는 에델버트가 죽기 전에 벌써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는데 그가 죽자 기독교의 입지가 어렵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제국(諸國)들 중에서는 북부의 노섬브리아가 점차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노섬브리아의 왕 에드윈이 파울리누스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시 교세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중부 메르시아(Mercia)의 이교(異敎)왕 펜다가 에드윈을 격파하여 죽이자(633년) 노섬브리아에서는 이교 반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파울리누스는 귀향하였고 노섬브리아 왕가는 남·북계로 분열되어 마찰이 심했다. 그러다가 아이오나 섬에 망명하던 중에 신자가 된 오스왈드가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어 아이단의 도움으로 기독교를 재건했다. 그러나 642년 펜다가 다시 침략하여 오스왈드는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그러나 아이오나에서 형과 함께 개종한 오스왈드의 동생 오스위(Oswy)가 왕이 되어 국토를 회복하고(651년) 그의 권위가 널리 인정되어 영국 기독교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서게 되었다. 오스위는 켈트와 로마의 종교 의식의 차이를 조정하기 위해 644년 휘트비(Whitby)에서 영국 대표와 로마교 대표를 모이게 하여 회의를 가지게 했다. 그 결과 앵글로 색슨 왕은 로마 교회에 속하기로 하고, 제도와 예배 의식은 로마 교회의 법대로 하기로 하며, 부활절도 서방처럼 주일에 지키기로 결정했다.


 

6. 이 시대의 교리와 신학.


 

이 시대에는 주요한 교리 논쟁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화상(畵像) 예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니케아 신조의 문구에 관한 것이다.


 

1.화상 예배


 

니케아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예배는 점점 이교(異敎)화하여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상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화 될 정도였다. 7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회 내에 성상과 그림 사용을 허락한 일이 있지만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붙인 바 있다. 8세기 들어와서는 이 문제가 큰 문제가 되기게 이르렀다. 그것은 무지한 신자들이 성상이나 그림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등 미신적 분위기가 팽배하여 모하메드교도와 유대인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런 비난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두 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첫째는 726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을 두는 것은 허락하나 그것을 만지거나 입맞추는 것을 불허하며 화상을 만질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라'고 한 것이다. 민중들과 수도자들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다메섹의 요한 같은 이도 반대했다. 심지어 그리이스 서부 주민들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으나 격파되었다.


 

둘째 칙령은 그 직후인 730년에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아예 '교회당에서 모든 화상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715-731년)와 3세(731-741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특히 그레고리우스 3세는 화상을 반대하는 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도록 명하였다.(731년)


 

그러나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년)는 아버지보다도 더 열렬히 화상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회를 소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화상 뿐 아니라 십자가와 모든 휘장도 반대하고, 교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집과 수도원에서도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어려서 동로마 황제의 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섭정을 한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화상예배를 원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와 협의하여 787년에 니케아에서 7차 세계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동서교회가 함께 연 최후의 대회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화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등을 화상 앞에 켜서 밝히며 향을 태우는 것은 가하다고 했다. 다만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들은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곧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니케아 신조의 문구


 

이 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논쟁은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올 뿐 아니라 아들이신 성자(聖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추가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스페인의 신학자들은 아리우스파와 싸울 때 '아들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질로서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에다 아들과의 관련성을 덧붙여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주장하며 그런 내용을 붙인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으며 범서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 말미암아서도 나오심을 인정하나, 특별한 문구를 덧붙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로마 카톨릭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분리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3.바울파 (Paulicians)


 

이 시대에 바울파라고 불린 한 무리의 신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나친 제도화 및 의식화, 형식화를 반대하여, 교회는 오직 성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외치며 교회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움을 받아 이단으로 정죄되고 핍박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실상은 항상 왜곡되게 전해져 왔다. 그 동안 그들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으나 1891년 아르메니아 남방 에드미아찐(Edmiatzin) 도서관에서 그들이 지은 {진리의 열쇠}라는 책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에 관한 실체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파는 로마 교회의 형식화된 제도들 곧 성직 제도와 화상 예배를 비롯한 미신적 신앙의 헛됨과 수도원의 폐해, 왜곡되게 운용되고 있는 카톨릭의 여러 예식들(성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그 제도 일체를 거부했다. 그들의 삶은 순결하고 개혁 정신이 강했으며 순회 전도와 성경을 복사하여 보급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1) 바울파의 등장 배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참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한편 교회가 국가의 힘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회는 언제든지 그 힘을 자기들 조직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갈 때에는 어떤 어려움과 압력이 있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님의 교훈과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여러 세기의 역사는 끝없는 폭력과 계략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자 한 동·서방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의 세속적인 욕망의 전개 역사이다. 그 역사는 또한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이교도의 손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신자 또는 형제라고 불리던 사람들 곧 공권력과 결탁한 세상적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고난을 받은 역사이다.


 

이 기간 동안 진실은 그것을 왜곡하고 진리를 호도하려는 자들에 의해 비열하고 교묘하게 조작되었다. 박해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과 저서들이 말살되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터무니없이 이단자 또는 분열자로 낙인찍혔고 전혀 그들이 주장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들이 명백히 반대한 악한 교리들이 그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교활한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조작하고 유포하였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했지만 카톨릭교회는 그들을 분파 또는 자신들이 원치 않던 이상한 이름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증거하는 많은 기록들이 왜곡되고 거짓으로 조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숨겨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초기 3세기 동안에도, 교회를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여러 요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고, 또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들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풍조에 저항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그때에도 많이 있었다. 한쪽에서 교회가 타락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개혁의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Armenia) 지방에서도 그러한 갱신의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 지역들은 처음부터 순수한 진리와 경건한 삶을 유지해 오던 교회들의 피난처였다.


 

복음은 그 초기에 안디옥으로부터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워나갔다. 이 무렵 이미 성직자가 다스리는 소위 [카톨릭 교회](보편교회 ; 스스로를 유일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가 급속히 그들의 제도와 조직을 강화해 나갔으나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다. 4세기에 이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이에 아르메니아에서도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원리를 지키려는 교회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니교가 유행하게 된 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진실한 많은 신자들에 대해 종종 마니교도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였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전혀 마니교도가 아님을 밝혔고 또한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지만 카톨릭교회는 무조건 그런 누명을 씌웠다. 종교 사회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이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형제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들을 송사할 만한 근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로마 카톨릭의 제도적이고 세상적인 교회 체제 안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한 터무니없이 붙여진 '분파'라는 이름이나 기타의 이름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온 세상의 모든 신자들과 자신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이스와 라틴, 아르메니아의 교회들이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거의 완전히 세상에 속하게 되자 형제들은 "저들이 국가와 연합함으로써 유아 세례 제도와 기타의 방법으로 불신자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주의 만찬을 베풀며 구원을 선포하고 기타 세상의 여러 악행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카톨릭 교회와 형제들 사이에는 큰 갈등이 생겼으며 카톨릭은 형제들을 종종 바울파(Paulician) 또는 형제들이 많이 살던 지역 이름을 따서 톤락(Thonraks)이라고 불렀다.


 

(2) 콘스탄틴 실루아노


 

바울파라고 불린 형제들의 무리를 처음으로 이끈 지도자는 [콘스탄틴 실바누스](Constantine Silvanus, 650-660)이다. 그는 사도적인 정신과 능력, 겸손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와 믿음을 가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653년 경에 사라센인들(이슬람)의 포로가 되었던 한 아르메니아 사람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콘스탄틴의 집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 아르메니아 사람은 콘스탄틴이 비범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성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들어 있는 성경을 선물하고 떠났다. 콘스탄틴은 이 책을 깊이 연구하였고 곧 삶이 변화되었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울의 동역자인 실라의 이름을 따라 실라(Siluano, Silvanus)라고 바꾸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비잔틴(동로마) 교회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지고 있던 화상(畵像) 숭배와 각종 미신적 행위를 거부하는 신자들과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카톨릭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아르메니아의 키보사(Kibossa)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약 30년 동안 여러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유프라데스강 유역을 따라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소아시아의 서쪽까지 여행을 했으며 거기서 거둔 성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투스(Constantine Pogonatus)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684년에 콘스탄틴과 함께 하는 신자들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콘스탄틴을 완전히 매장시키고자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의 시행을 위해 그는 시므온(Simeon) 이라는 관리를 채용하였다. 시므온은 콘스탄틴을 박해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돌로 그를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 죽음을 감수하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콘스탄틴에 의해 양자로 키워지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유스투스(Justus)라는 한 청년이 자신의 은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유스투스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으로 칭송되면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키보사에서 보고 들은 일들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았고 거기 속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과 그들이 진실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및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궁전에 머물면서도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3년 동안 갈등을 겪은 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키보사로 도망가서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디도(Titus)라는 이름을 얻고 전에 자신이 핍박하여 죽게 한 콘스탄틴이 하던 일을 맡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도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년 후 배반자 유스투스가 형제들의 생활 양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대한 정보를 감독에게 고했고 감독은 그것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2세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잡혀서 순교하게 되었다. 황제는 나머지 '이단자들'을 공포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시므온을 포함한 많은 형제들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였다. 그러나 고통 중에서도 담대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던 형제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신앙과 용기를 자극하여 헌신과 증거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그 무리에 참여하였고 많은 교사와 전도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카톨릭이 박해를 그치기까지 무저항으로 고통을 이겨 나갔다.

 

(3) 성상 파괴 운동


 

바울파 등장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는 성상 숭배였다. 성상 숭배는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용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나무와 못을 가져온 후 성화와 성상, 성물들이 가치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성물을 유치하거나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소박한 집에서 가졌던 주님과 제자들의 모임은 이제 숭배의 대상으로 받들어지는 형상과 그림들과 성물로 가득찬 전시장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교회 모임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형제들의 찬양과 교제의 장소가 아니라 마리아나 성자들에게 봉헌된 종교 신전 분위기의 건물 안에서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나 참석하기 싫은 사람이나 다 참석해야만 하는 의무적 의례(儀禮)와 같은 것이 되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동정녀나 성자들에게 드려졌고, 이방 종교에서 차용한 우상 숭배가 갖가지 성물들과 사제들, 그리고 온갖 조잡한 미신과 함께 나타났다.


 

한편 이교도적 우상 숭배나 미신이 카톨릭교회를 점령했던 시기에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께 두고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은 계시된 말씀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표였다. 그들은 죄와 무지가 만들어낸 우상 숭배의 조직으로 빠져 들어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까스로 제외된, 남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바울파나 그밖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무리들은 널리 번지고 있는 우상 숭배를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큰 핍박을 받았다. 이들이 많이 살았던 지방은 타우르스 산맥 근방인데 거기서 후에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되어 화상 예배를 반대한 인물로 유명한 레오 3세가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사라센제국으로부터 지켰고 제국의 영적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그는 동방과 서방 모두가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우상 숭배와 미신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러한 악을 뽑는데 앞장섰다. 그는 726년에 성상 숭배 금지령을 처음으로 내리고 그 뒤 화상(畵像)들을 강제로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고 우상숭배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한 세기나 지속된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가장 강력한 반대를 편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이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와 동정녀, 그리고 성자들과 그리스도의 종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형상들을 숭배하고 기념한다고 비난하는데 그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는 형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 세상에서 사셨으며 기적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살아나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후에,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당시에 살고 있지 않던 우리들로 하여금 믿고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지식이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교부들께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간단하게 기억시키기 위해 이것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을 승인했다. 때로 우리가 마음 속으로 주님을 향한 열정이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면 구원의 기쁨이 되살아나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형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형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이다..... 동쪽을 향해 예배드리는 것, 십자가나 그와 유사한 많은 상징물을 경배하는 성사 숭배는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하나의 중요한 전통인 것이다."


 

다메섹의 요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레오의 조치에 반대하였는데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성상을 파괴한 이유로 '성상 파괴자'(Iconoclast)란 별명이 붙었던 레오 3세의 뒤를 그의 정책을 아들 콘스탄틴 5세와 손자 레오 4세가 이어 받았다. 레오 4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 이레네가 정책을 바꾸었으므로 그의 아들 콘스탄틴 6세 때에는 다시 성상 숭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그 후 성상 숭배를 반대한 데오필루스(Theophilus) 황제 때를 거쳐 그의 미망인 데오도라(Theodra)가 어린 아들 미카엘(Michael) 3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하던 때인 842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지원하고 있던 사제들의 영향으로 데오도라는 즉시 성상을 재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교회에서는 이 일이 큰 행사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숨겨져 왔던 성상들과 그림들이 나타나고 교회와 국가의 고위성직자 고관들이 이것들에 경배하였다.


 

성상문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고 관장되었던 한 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그때 성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반대자들을 성상 파괴자 또는 모하메드교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켜서 787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세계교회대회에서 성상에 대한 예배가 합법화된 사실을 주지시켰지만,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이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결국 성상에 대한 예배, 참배,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 및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는 행위와 동정녀 및 아기 예수를 조각한 것들에 입맞추는 행위 등 성상에 대한 일체의 경배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교회 안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의 행동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허락할 수도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3가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종래의 의결 내용이 거부되고 '어떤 언어로도 기도 드릴 수 있다는 새 규례가 확정되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이며 당시 아퀴타인(Acuitaine)의 왕이었던 루이(Louis, 814-84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롤링거(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후에 성경 주석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학자 클라우디우스(Claudius)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황제가 되자 클라우디우스를 튜린(Turin)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덕스러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감독은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성상 반대의 원칙을 철저히 집행해 나갔다. 그는 튜린의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성상과 십자가 등을 예외없이 제거함으로 인해 그 회의의 결정 사항을 넘어서서까지 철저히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튜린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조치에 찬성했으므로 별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공공연하게 베드로의 지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며 베드로로부터 로마 감독(교황)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소위 '열쇠의 능력'이라는 것도 교황 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 제도 자체에 넘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로마 감독은 오직 사도적 생활을 할 때만이 사도적 능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칼의 위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신자들과 교회가 이때 희생되었고, 이방 로마 제국이 박해를 가하는 동안 고난을 견디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북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다. 참으로 이슬람교는 이방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이든 우상 숭배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4) 바울파의 행적과 가르침 및 평가


 

성상 파괴 운동 덕분에 박해받던 소아시아 지역의 형제들이 다소간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왕후 데오도라의 치하에서 다시금 성상 옹호자들이 승리하자(842년) 그들은 '성상을 끈질기게 반대하며 우상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종류의 예배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며 심지어 자신들 모두를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단들' 곧 바울파로 불리는 형제들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


 

형제들은 셈바트(Sembat)와 같은 유능한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다가오는 시련의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셈바트는 8세기 말경 아르메니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카톨릭은 그를 바울파의 창시자라고 지목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로 세르기우스(Sergius)가 있었다. 그는 34년(800-834)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발이 닳도록 동서남북을 뛰어다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도들을 돌아보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분열을 치유하며 성도들을 연합시키며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그릇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했다. 그는 믿음을 가진 한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본래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으며 평신도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그 여인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제들과 마귀의 속임수'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그는 직접 성경을 읽고 믿었으며, 오랫동안 매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의 편지들은 널리 읽혀졌고 그의 활동은 그를 쫓던 자들에 의하여 도끼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탁월한 영적 능력과 헌신적인 봉사로 인하여 여러 믿음의 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 요셉, 사가랴 , 바네스, 셈바트, 세르기우스, 이들은 연이은 박해로 인한 파멸을 죽음으로 극복하고 그 이름을 보존한 사람들이다. 이런 형제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고,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꾸지 않고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종종 성경으로부터 사람과 교회 이름을 취하여 사용했다. 즉 콘스탄틴은 실라로, 시므온은 디도로, 게네시오스는 디모데로, 요셉은 에바브로디도로 불리웠다. 이와 달리 대적자들이 붙인 이름도 있다. 예를 들어 사가랴는 돈만 아는 목자,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그들의 신앙과 삶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비잔틴제국은 대체로 바울파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내에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상 숭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은 그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로 형제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심지어 강력한 성상 숭배 반대자요 아르메니아 출신이여 형제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레오 3세와 같은 왕조차도 희랍 교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울파에 대한 공격을 허락함으로써 형제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데오도라 왕후의 박해 때 형제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시기에는 왕후의 명령에 의해 교수형과 화형, 수장형 같은 조직적인 살육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842-867년 사이에 데오도라와 재판관들의 열렬한 박해로 인해 형제들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박해도 형제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형제들은 데오도라 치하의 박해와 그 뒤에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0세기 경에는 바울파에 대한 태도가 조금 관대해졌다. 그 동안 형제들은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지역으로 주로 옮겨갔으며 유럽에서도 상당히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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