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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6) - 로마교회의 성장기

이상봉 2010.04.29 12:36 조회 수 : 73594

2.로마교회의 성장기 (800-1073)


 

이 시기는 주후 800년에서 1073년까지의 시기인데 로마교회가 교리적 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조직화된 시기이다. 또 유럽 각지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기독교 진리에 대한 연구가 성행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로마교회의 기반이 구축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800년은 프랑크 왕국의 카를(샤를마뉴) 대제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받게 된 때이며, 1073년은 힐데브란트가 그레고리우스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때이다.



 

1.카를 대제의 등장


 

1.카를 대제


 

샤를마뉴(Charlemagne)로도 불리는 카를(Karl) 대제는 모하메드 군대를 격파한 카를 마르텔의 손자이며 프랑크의 카롤링거의 초대王 小 페핀(Pepin)의 아들이다. 카를은 768년에 왕으로 즉위하여 46년간 재위하면서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800년 크리스마스날 카를은 이탈리아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교황이 이렇게 한 것은 카를 대제의 로마 교회와 교황에 대한 충성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관식은 서방과 교황청에 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와 황제의 권세와 교황의 권위가 중세기 내내 논쟁거리가 되었다.


 

2.업적


 

(1) 영토 확장과 교회 옹호


 

카를은 정치와 군사면에서 타고난 재능가였다. 그는 50여회의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결과 그가 죽을 즈음에 그의 영토는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화란,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절반, 이탈리아 반 이상과 스페인의 동북 지방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 후 처음으로 그 제국 판도에 가까워진 것이다. 카를은 어거스틴의 저서 [하나님의 도성]을 좋아하여 항상 가까이하였다. 그 책의 이상은 곧 카를의 건국 정신이 되었다. 게르만 민족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교의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그를 지배한 사상이었다. 그는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는 교회와 협력하여 지상의 행복을 실현할 것을 결심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교회의 옹호와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2) 교육의 진흥


 

카를은 교육과 종교에 대한 열성도 컸다. 그 자신은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지만 교육에 대한 관심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커서 어린이들에게 시편, 음악, 문법을 가르치게 하였고, 궁정 학교를 개설하여 사방에서 고명한 학자를 초빙하여 강연하게 하였다. 그의 궁정에 가장 탁월한 학자이며 고문이었던 사람은 영국인 학자 앨퀸(Alcuin 735-804)이었다. 그는 782년에 초청을 받아 궁정학교 교장과 투르의 수도원장이 되어 이 수도원을 프랑크 왕국 학문의 중심이 되게끔 하였다.


 

(3) 기독교의 진흥


 

카를은 각처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훌륭한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을 배출하였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주일을 엄수하게 하였고 그 자신이 이를 실행하는 모범적 신자였다. 그는 또 교회 유지를 위해 십일조를 꼭 바치도록 권장했고 전도 사업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화상 예배를 강하게 금지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다른 수단을 쓰지 않고서도 그 심령에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강경항 화상 예배 금지 정책에 의해 11세기 초까지는 알프스 산 이북에 있는 교회에서는 화상 예배를 하지 않았다. 교회사가 샤프 교수는 그에 대해 "카를은 중세의 모세라 일컬을만 하다. 그가 쌓은 공적은 8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어떤 황제가 쌓은 업적보다 큰 것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더라도 그에게 필적할만한 인물은 프러시아의 프레드리히 3세와 나폴레옹 뿐이다. 그러나 신앙적 인격적으로 말하면 그는 단연 최고다" 라고 칭찬했다.



 

2.신성 로마제국의 등장


 

1.대제국의 분할


 

카를의 큰 권력은 개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그의 제국은 급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① 그의 사후 아들 '경건자 루이'(Louis the Pious)가 즉위했으나 그는 훌륭한 인격자였으나 대국을 통치할 정치적 능력을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교황 세력이 다시 일어났다.


 

② 루이가 죽은 후 그의 아들 3형제가 분쟁하다가 843년 베르덩 조약(treaty of Verdun)에 의해 제국의 영토는 삼분할되었다. 장남 로타아르(Lothar) 1세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 프랑크를 차지하고 로마 황제가 되었다. 차남 루이(Louis)는 동 프랑크 왕이 되었는데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는 땅이다. 이 때문에 독일 건국의 기원은 843년이다. 삼남 카를(Karl) 2세는 서 프랑크 곧 지금의 프랑스 지역의 왕이 되었다.


 

③ 장남 로타아르는 세 아들에게 그의 제국을 분할해 주었다. 장자 루이 2세는 이탈리아의 왕이 되고 중부 프랑크 땅은 다른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 두 아들이 다 요절하였으므로 그 틈을 타서 숙부인 루이와 카를 2세가 그 땅을 나누어서 차지해 버렸다. 이로써 동과 서 프랑크의 경계는 맞붙게 되었다. 이것은 870년 메르센 조약(treaty Mersen)에 의해 정해졌다.


 

2.혼란한 나라


 

카를 대제는 절대적인 힘으로, 안으로는 분열과 싸워서 통일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사면에서 침범해 오는 여러 민족들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으므로 혼란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


 

(1) 외적의 침입


 

외적 중 제일 먼저 침입해 온 것은 북방의 노르만족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북부 지역에 노르망디 왕국을 세웠다.(911년) 또 이탈리아 남쪽 해안으로는 사라센제국이 침입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926년에는 헝가리인들이 로마 부근까지 이르렀다.


 

(2) 국내 혼란


 

세 형제 왕은 서로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만 정신이 팔려 서로 우애와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러므로 외적과 내부적 분열을 효과적으로 합력하여 막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국가적 연합과 방어가 불가능하게 되자 봉건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각처의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쥐고 다투게 되었다. 봉건제도는 군무에 봉사한 댓가로 받은 토지 보유 원칙(土地保有原則)에 기반을 둔 것인데, 중앙의 권위가 무너지고 노르만족의 침략이 심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지역 방위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는 한 봉건제도는 분열과 지방의 권력 다툼을 조장하는 제도에 불과했다.


 

이렇게 되자 무예는 크게 발달했지만 문예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찬란하던 고대 문명은 이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북방의 야만족이 침입해 옴으로써 언어와 문자마저 잊혀지게 되어 라틴어로 쓰여진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사람마저 드물게 되어 소위 무학(無學)의 시대가 오게 되었다. 후대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이 시대를 암흑 시대라고 불렀다.


 

3.신성 로마제국 건설


 

분열의 세력에 지배되어 있던 이 시대에 있어서도 통일과 결합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혼란에 식상한 국민들은 강력한 권력자의 등장을 바라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로마제국 회복 운동이 생기게 되었고 그 결과 신성(神聖)로마제국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은 5대 제후가 국왕을 서로 뽑는 제도를 세웠는데 초대 왕으로 콘라트 1세(911-918)를 뽑았다. 그러나 그가 무능하여 외적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자 왕위는 작센가의 하인리히 1세(919-936)에게 물려졌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오토 1세 (Otto, 936-976 재위)가 동 프랑크 3대 왕으로 세워졌다. 오토는 영리하고 비범하여 카를 대제를 계승한 듯한 인물이었다. 그는 카를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옹호 사상을 왕국 건설에 결부시켰다. 그는 외적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제후들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보헤미아, 폴란드를 항복시키고, 이탈리아에 출병하여 교황을 원조하였다. 이로 인해 교황 요한12세는 그의 공적을 찬양하며 962년 2월 2일에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러한 대관식은 프랑크 왕국들의 세력 판도에 하나의 변화를 일으켰다. 프랑크 왕국들 중에서 독일 곧 동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가장 커져서 독일 왕이 이탈리아 왕을 겸하게 되고 전 유럽에 세력을 떨치게 된 것이다. 이제 독일 왕은 대관식을 세 번 하는 권세를 누렸다. 독일에서 한 번, 이탈리아 왕으로서 밀라노에서 한 번,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로마에서 한 번 대관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973년 오토 대제가 죽은 후 독일 왕들은 이탈리아 정책에 열중했기 때문에 독일 국내는 제후들의 권세가 강화되었고 분립과 혼란 상태가 조장되었다.




 

3. 로마 교황권의 부패


 

신성로마제국과 로마 교회는 중세 유럽을 지배한 양대(兩大) 통일 세력으로서, 이 두 세력의 교합과 충돌로 말미암아 중세의 여러 역사가 전개되었다. 로마 교회의 권력이 증대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레오 1세나 그레고리우스 1세와 같은 탁월한 교황들이 나타나서 교회의 힘을 떨친 데 기인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책략과 모략도 동원되었다. 그 중 하나가 9세기 중엽에 나타난 소위 {역대 교황 교령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1.역대 교황 교령집(歷代敎皇敎令集 , 이시도르 문서)


 

이 책은 스페인 사람 이시도르(Isidore, 636년 사망)가 지은 것으로 조작되었으나 사실은 아니었으므로 [가짜 이시도르 전집]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교회 규칙과 로마 감독의 편지를 망라한 것으로서 그 대부분은 위조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서}(Donatio Constantini ad Sylvestrum)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가짜 문서인데 여기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실버스타와 그 후계자에게 라테란 궁전과 로마의 토지와 이탈리아 토지의 전부를 기증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그밖에 위조 문서들도 대체로 성직제도의 신성불가침적 특권을 유지시켜 주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성직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계급으로서 다만 하나님께만 책임을 지며 지상에서는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재판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특권은 감독에게 있어서는 더 하며 교황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한다. 교황은 논쟁의 최고 심판자로서 하나님 외에는 그 위에 설 자가 없다는 것이 가짜 이시도르 문서에 나타난 사상이다.


 

9세기 등장한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유능하고 대담한 자로서 가짜 이시도르 문서를 십분 이용하여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그는 이전 교황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한 대담한 권력 발휘를 주저없이 하였다. 한 예로서, 프랑스의 랑스 대감독 힌크마르와의 싸움을 들 수 있다. 힌크마르의 아래 감독 중 하나인 로타드는 한 신부를 간음죄로 파면했는데 힌크마르는 로타드에게 그를 복직시킬 것을 명했다. 그러나 로타드는 그것을 거부했고 힌크마르를 그를 파면했다. 이에 로타드는 교황에게 상고했는데 그 결과 그는 다시 감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또 한 예는 황제 로타르 2세가 그의 첩과 결혼하기 위해 처와 이혼하였는데 교황이 이를 허락지 않음으로써 그 일이 성사되지 못하게 한 일을 들 수 있다.

 

이후 교황들은 그 시대의 세속적 정치적 분쟁에 거의 휩쓸렸고 수많은 교황들이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등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잇달았다. 샤프 교수는 이 시대의 교황청이 전적으로 탐욕과 폭력과 음모로 점철되었으며 완전히 사탄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말했다.


 

2.부패상


 

특히 10세기에는 교황권을 둘러싸고, 교황청이 독일당과 이탈리아당으로 내분되어 계속 투쟁했다. 이로써 교황청 내부는 크게 부패하여 폐위와 살인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가장 심한 것은 테오도라라고 하는 부유한 과부 일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다.


 

로마의 부유한 과부 테오도라(Theodora)는 돈 많은 미인이었는데 행실이 난잡하였다. 그에게는 마로지아와 小 데오도라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장녀 마로지아는 904년 그녀의 남자 정부(情夫)를 교황의 위(位)에 올려서 세르지오 3세라고 불렀고, 914년에는 차녀 데오도라가 그녀의 남자 첩을 요한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의 위에 올렸다. 이때 마로지아는 알베리크라는 자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931년 당시 교황이던 스테판 8세를 살해하고 알베리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기 아들을 교황으로 세워 요한 11세라고 불렀다. 그러나 小 데오도라가 그녀의 언니를 죽이고 4명의 교황(레오 7세, 스테판 9세, 마리누스 2세, 아가피투스 2세)을 세웠다가 죽여 폐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18세의 자기 아들 옥타비안을 교황으로 세우고 요한 12세라고 불렀다.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대관식을 거행한 교황이었다. 그러나 요한 12세는 남의 아내와 간통하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데오도라 일가의 축첩정치가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교직 매매와 음모와 살인 등의 죄악의 역사가 10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4. 교리 논쟁


 

1.성찬식


 

성찬식은 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으로 간주되고 있었으나 성찬식 자체가 하나의 희생 제사라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성찬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교리가 널리 용인되고 있었다.


 

신체적인 임재(corporal)를 막연히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화체설(化體說)이 주류를 이루었다.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사제의 기도에 의해 먹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관념은 오랫동안 막연하게나마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 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유치하여 성경 말씀을 물질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신앙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9세기에 와서 당시 석학이었던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Paschasius Radbertus)가 <주님의 몸과 피의 예식>이라는 책을 써서 이 이론을 구체화 시켰다.


 

이 설에 대한 유일한 반대자는 베렌기우스(Berengius)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떡과 잔을 자기의 살과 피로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떡과 잔이 실제로 살과 피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215년 라테란 회의에서 화체설이 교리로 결정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의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화체설은 라틴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카톨릭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2.미신에 저항


 

성찬식 논쟁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그동안 점점 증대되어 온 미신적인 신앙에 관한 문제였다. 교회 내에 만연된 미신적 신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싸운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클라우디우스(Claudius)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크 왕 루이의 궁정학교 교사였는데 820년에 투린(Turin)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신학적으로 어거스틴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구원 문제에 관해 시대의 흐름을 넘어서는 사상을 가졌는데, 특히 성자(聖者) 예배와 화상 예배를 반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교구에서 이를 실행하는 담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로마 교황청의 특권도 부인했는데 그것은 그의 용기 있는 신앙과 아울러 프랑크 왕 경건자 루이의 보호와 격려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839년에 죽었다.


 

클라우디우스와 같은 시대에 리용의 대주교로 있던 아고바르(Agobard)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신학에 있어서는 클라우디우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학식이 많고 감화력이 큰 인물이었다. 그 역시 화상 예배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거짓된 모든 형식과 의식들을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성경의 영감은 언어와 문자에 이르기까지 축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현대적인 주장까지 했다. 그는 840년에 죽었다.




 

5. 동서 교회의 분리


 

1.원인


 

기독교회는 오랫동안 카톨릭 교회라는 큰 조직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나 중세에 와서 동서의 두 교회로 분열하여 하나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고 다른 하나는 그리이스 정교회가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합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1) 여러 환경적 원인


 

우선 정치적으로 오랫 동안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지중해 연안국들의 교회인데 비해,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 북서 지역의 국가들과 아프리카 서북 지역 국가들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또 인종적인 면을 볼 때, 동방 교회는 헬라인들에다가 슬라브인과 서부 아시아인들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인해 내세지향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강한데 비해, 서방 교회는 라틴인에다가 고트인과 게르만족의 새로운 피가 섞였으므로 현세 지향적 신앙의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처럼 동방과 서방은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 때문에 신앙과 생활이 달랐고 이로 인해 결국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여지를 안고 있었다.


 

(2) 교황의 서방 편향적 입장


 

주후 800년 로마 카톨릭 교황이 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주었다는 것 역시 동서교회의 분리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로마 교회가 정치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의지하지 않고 오직 프랑크인의 왕국만 의지한다는 것을 선언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헬라 정교회와 분리가 된 것이다.


 

(3) 사상적인 이유


 

이밖에 사상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동로마 교회는 교리 중심인데 비해 서로마 교회는 제도 중심이었다. 동로마 교회는 헬라의 학문적 정신으로 점점 사색과 철학, 형이상학적 신학을 형성해 나간 반면에 서로마 교회는 로마의 법률과 정치 제도의 영향을 받아서 교황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회 안에서의 구원 즉 제도로서 교회의 구원 기관적 기능을 강조했다. 서방 교회는 '교회는 주께서 성령의 활동을 약속해 주신 곳이요,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에 근거해 자라는 참된 발전의 소유자이다. 교회가 채택하는 모든 사상, 제도, 조직, 의식, 경험, 생활은 다 참된 것이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영원한 발전이 가능하고 그 활동은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4) 교리적 이유


 

교리적 이유로서는 성령론 문제가 주 원인이 되었다. 동로마 교회는 서로마 교회가 니케아 신조에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한다'고 명문화하자는 것을 반대하고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나오신다는 기존 문구를 고수하는 입장을 취했다.


 

가장 중요한 입장 차이는 성상(화상) 숭배에 관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7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 서방 교회에는 다 같이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성자들 및 순교자들의 초상이나 화상이 교회당에 많이 걸어두고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를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차츰 이 성상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동방의 레오 황제는 그것을 철거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이로써 성상 숭배 찬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방 교회는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 비해 서방 교회는 성상 숭배를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5) 직접적인 원인 - 교권 쟁탈 문제


 

동서교회 분리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의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사이에 얽힌 교권 다툼에 있었다. 로마의 교권이 점점 더 강해져서 세계를 압도하려는 것을 보고 동방의 대주교는 그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 분립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두 교회는 9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분열하고 말았다. 이 일은 한 사건으로 발단되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이그나티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857년에 동로마 황제 미카엘 3세의 외삼촌 바르다스가 며느리와 간통한 것을 책망하였다. 황제는 노하여 그를 반역죄로 감금하고 861년에 그를 파면하였다. 그리고 후임에 포티우스(Photius)를 세웠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직접 로마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로마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이그나티우스를 계속 대주교로 지지하였다. 이에 대해 신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포티우스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수장은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고 4년 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주교들은 로마 교황을 부인하기로 결의하였다.


 

거기다가 불가리아 교회의 소속 문제까지 더해져서 동서방 교회의 대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869년 바실이라는 자가 동로마 황제 미카엘을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콘스탄티토플에서 교회 대회를 열고 포티우스를 파면시키고 도로 이그나티우스를 복직시켰다. 포티우스 시절에 불가리아 왕 보고리스는 포티우스의 동방 교회를 멀리하고 로마 교회 쪽에 붙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포티우스가 격분하여 로마 교황의 사절을 불가리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등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성사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포티우스가 파면되었으므로 불가리아는 자연스럽게 로마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불가리아 왕의 마음이 다시 바뀌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관할 하에 속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방 교회의 대주교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지원하여 동방 교회의 대감독과 교사를 불가리아로 보내고 로마 교사들은 추방하였다. 이렇게 되자 로마 교회는 다시 이그나티우스를 반대하고 포티우스의 복직을 선언하는 등 동서방 교회의 대립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2.결과


 

9세기에 일단 분리된 동서 교회는 교권 쟁탈 문제로 극심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11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포티우스 사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취임할 때 교황에게 신앙고백서를 봉정하고 중대사를 재가 받는 등 화해의 움직임이 약간 일기도 했으나 1054년 케룰라리우스 대주교 때에는 라틴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폐쇄하고 그런 수도사들을 추방하였으며, 불가리아 주교와 합세하여 교황의 오류를 맹렬히 비난하였으므로 로마 교황 레오 9세는 1054년 7월 16일 성 소피아 회당의 제단에 파문장(破門狀)을 두고 케룰라리우스를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케룰라리우스도 응수하여 교황을 파문에 처하였고 동방의 대주교들도 모두 케룰라리우스에게 찬성함으로써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헬라 정교회는 15세기에 터키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성 소피아의 대주교가 러시아로 피난한 후 실제로 러시아 정교회가 모든 헬라 정교회의 종주 교회가 되었다. 그들은 이집트, 시리아 등 14개국에 헬라 정교회 연맹을 조직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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