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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3) - 속사도시대

이상봉 2010.04.29 12:11 조회 수 : 6210

2.속사도시대 (100-313년)


1.속사도시대의 특징

 

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의 시기를 續사도시대(Post-Apostolic Age) 또는 前니케아회의시대 (Ante-Nicene Age)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교회가 보다 구체적으로 형성된 시기요 발전된 시기였다.

 

1.박해로 인한 순교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가 로마제국 정부로부터 큰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로 (Nero) 황제로부터 이 시대의 말기까지 약 250년간 박해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순교자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이그나티우스(안디옥), 폴리갑(서머나), 유스티누스(로마), 키프리아누스 (칼타고) 등이 이 시기에 죽은 대표적 교회 지도자들이다.

 

2.카톨릭 교회(Catholic Church)의 형성

 

박해와 기타 안팎에서 오는 여러 도전에 직면한 교회는 그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가기 위해 통일과 규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점차 가정 교회의 상태에서 교회 간의 연합을 통해 커지고 조직화되었으며 교회 내에서도 감독의 비중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카톨릭 교회가 되었다. 이때의 카톨릭이라는 말은 공동, 보편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중세 이후 로마 교회가 스스로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소위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것이다. 이 시대의 카톨릭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古카톨릭교회'라고 부른다.

 

교회만 통일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초가 되는 여러 가지가 정리되고 통일되었는데, 사도신경이 이 시대에 생겨났고 신약성경 정경도 대략 이 시대에 편성되었다.

 

3.여러 사상들의 발흥

 

온갖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왕성하게 증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상적 활동도 왕성하게 이루어져서 가히 사상의 발효시대라고 할만 했다. 헬라 철학, 동방 신비종교, 유대의 율법주의 등 여러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복음과 뒤섞임으로써 신앙적 혼란이 초래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문제가 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이 새로 연구 검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영지주의(Gnostism)나 신플라톤주의(Neo-Platonsim) 등의 절충 사상으로 사상적 혼란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2.기독교의 확장

 

1.교회 확장의 중심지

 

(1) 예루살렘 -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 각처로 흩어졌던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기독교를 확장시켰다.

 

(2) 수리아의 안디옥 - 바울이 서쪽으로 전도해 나가는 근거지가 되었다.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 전도의 거점

 

(3) 에베소, 서머나 - 소아시아에서는 서남방 해안 지방에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였는데 에베소, 서머나가 그 중심이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복음이 소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4) 빌립보, 데살로니가 - 마게도냐 지방 전도의 중심지

 

(5)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다음으로 기독교가 흥왕한 곳이었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헬라인과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3세기에는 성경의 애굽어(콥트) 번역도 이루어졌으며 신학교도 세워졌다. 또한 그노시스파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6) 고린도, 아덴 - 헬라(그리스) 지방의 복음 전파의 거점 도시였다. 아테네에서도 변증자들과 순교자들이 나왔다.

 

(7) 로마 - 서유럽 전도의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각처에 교회가 있었고 북은 갈리아, 남은 북부 아프리카, 서는 스페인에 이르렀다.

 

2.성장의 요인

 

(1) 성령의 충만한 역사

 

(2) 신자들의 비상한 전도열 - 성령 충만을 받은 신자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함

 

(3) 왕과 상류 계급이 교회로 들어옴

 

(4) 가난한 자와 어려운 자들에 대한 구제 - 소외되고 고난당하던 하류층들이 대거 교회로 들어오게 됨

 

(5) 봉사와 상부상조 - 신자들이 서로 격려하고 도움으로써 박해 중에서도 신자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함

 

(6) 고상한 도덕적 생활 - 이것이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불러일으킴

 

(7) 박해에 대한 인내




 

3.박해

 

1.원인

 

A.간접적 원인

 

(1) 오해

 

기독교인은 부도덕한 자들이다 - 동굴 속에 남녀가 모여 음행한다 (숨어서 집회를 가지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 불의한 자들이다 - 자식을 잡아 먹는다 (성찬식에서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2) 미신

 

기독교인 때문에 로마의 신들이 노하여 천재 지변이 일어난다고 생각함

 

B.직접적 원인

 

(1) 사상의 부조화(不調和)

 

로마인들은 국가를 최고의 선(가치), 최고의 권위로 생각하였으므로 국가는 모든 일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최고 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평소에는 국가에 충성하지만 국가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 상치되는 경우에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신본주의를 취했기 때문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제국이 영원하다고 생각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세상에는 종말이 있으며 심판이 있다고 생각함

 

로마인들은 가장 명령에 절대 복종하였으므로 가장의 종교가 온 식구들의 종교가 되었지만 기독교인들은 가장이 불신자이면 그의 종교에 따르지 않음

 

(2) 사회 생활의 부조화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죄로 여기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은 죄로 여겨 참여하지 않음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과 융화되지 못함을 보고 사회와 정부를 뒤엎고 개조하려는 것으로 봄

 

(3) 로마의 정책과 맞지 않음

 

로마 지도자들은 제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황제 예배를 강요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에 반대하고 호응하지 않음

 

로마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비밀 단체 결성과 회집을 금지하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모임을 계속 가졌기 때문에 충돌이 생김

 

또 기독교인은 침략 전쟁에 나가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군 복무 문제로 충돌이 생김

 

2.박해의 방법

 

(1) 기독교를 포기한다는 증거로 성경과 교회 기물을 버리게 하거나 파괴하도록 만듬

 

(2) 직업을 갖는 것을 방해하거나 재산 몰수, 공직 박탈 등을 통해 신자들을 직간접적으로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함

 

(3) 폭력과 방화를 행사함 - 화형에 처하거나 십자가 형벌을 가했으며 맹수와 결투를 시켜 죽게 함

 

(4) 기독교에 반대하는 많은 사상을 내세워 교리적 사상적으로 압박을 가함

 

(5) 이러한 박해와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사면해 주었다.


 

3.박해의 결과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더 성장하고 확대되고 강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 보다는 고난 당하고 죽는 쪽을 택하였다. 박해와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결과 그리스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들의 구주이심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껴서 신약 정경(Canon)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핍박과 그것을 사랑과 진리와 무저항으로 이겨낸 성도들 간의 투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가 있구나 하는 충격과 감동을 주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유명해지게 만들고 널리 퍼지게 만들었다. 특히 사도들과 교부들의 순교는 기독교가 생명있는 그 무엇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가에 융합되지 않으려 한 교회의 태도는 훗날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가 서로 뒤섞일 수 없으며 반드시 구분되어 서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명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4.이 시대의 10대 박해


 

일 세기에 일어난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잔인한 박해는 주로 개인적인 원한과 이기적인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는 주로 정치적인 자극을 받아 일어난 것이다. 디키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제국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것으로서 기독교를 완전히 섬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졌지만 그 외 여덟 번의 박해는 특정 도시나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1.네로(54-68)의 박해


 

로마시의 방화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지워 박해함


 

2.도미티아누스(81-96)의 박해


 

기독교인들이 독립된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는 이유로 박해함. 이로 인해 카타콤에서의 비밀 집회가 생겨남


 

3.트라야누스(97-117)의 박해


 

비밀 결사를 하여 정치적 음모를 꾀한다는 것과 로마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사회 생활 부조화를 이유로 박해를 가함. 황제상에 절할 것을 강요함.


 

4.하드리아누스(117-138)의 박해


 

기독교인들을 미워하여 박해함. 기독교를 불법화함


 

5.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161-180)의 박해


 

가정교사의 사상적 영향(스토아사상)으로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박해함. 177년 리용과 비인에서 특히 심한 박해가 있었다.


 

6.셉티무스 세르베루스(205-211)의 박해


 

열심있는 이교도였던 부인의 영향으로 교회를 핍박함. 특히 전도 금지령을 내려서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함

 

7.막시미누스(235-238)의 박해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박멸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려고 함. 이 시기에는 사형은 하지 않았고 투옥과 유형으로 박해를 함


 

8.디키우스(249-251)의 박해


 

로마가 옛 신들을 섬겼을 때는 부강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자 나라가 쇠해졌다고 믿고 칙령을 내려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디키우스는 원칙에 따라 작심하고 박해했기 때문에 이 때의 박해가 가장 심했다. 그의 목적은 신자들을 죽여서 순교자를 내는 것보다 악형과 감금과 공갈로 우상을 숭배케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산시키는데 있었다.


 

9.바렐리아누스(253-260)의 박해


 

기독교인들로 인해 질병과 흉년이 생겼다고 믿고 257년과 258년에 큰 박해를 했다. 신자의 집회를 엄금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주요 신자들을 유형보내고 재산을 몰수했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기독교와 같이 다루기 어렵고 강력한 조직체가 제국 내에 있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 기독교를 박해함. 그도 조직적인 박해를 했는데 예배당 파괴, 성경 압수, 성직자 투옥, 악형에 처하고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게 하는 등 핍박을 했는데 304년에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한 제4칙령을 내렸다. 무서운 박해로 디키우스 때처럼 순교자도 많이 나고 배교자들도 많이 났으나 기독교인들을 이해한 민중들이 이전처럼 적대하지는 않았다.



 

4.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1.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


 

루키아누스는 120년 수리아에서 출생했고 200년에 헬라 또는 애굽에서 사망했다. 에피쿠로스 학파 소속의 학자였다. 그는 풍자와 조소의 문장으로 기독교인들의 생활과 풍습을 비방했다. 그는 <페레그리누스의 죽음>(De Morte Peregrini)이라는 책을 180년경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165년 올림피아 경기 때 키니크 학자 페레그리누스(Peregrini)가 불속에 투신 자살했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 형식으로 된 소설이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페레그리누스는 부모를 죽이고 간음한 자였는데 후에 예수 믿고 목사까지 되었고 나중에 악행이 탄로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의 도움으로 출옥했다. 출옥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추방되어 키니크 학파에 가입했으나 허망한 명예욕에 사로잡혀 기독교인과 키니크학파를 조롱할 목적으로 이 소설을 지었으나 별 효과는 없었다.


 

2.켈수스(Celsus)


 

루키아누스의 뒤를 잇는 기독교 비판자는 켈수스인데 그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인이며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다. 저서 {참 말}(참 강론)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이 책에 반박하게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켈수스를 반박함}이라는 책을 지었다.


 

180년경에 쓴 이 책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약 70년 뒤에 쓰여진 오리게네스의 저서 {켈수스를 반박함} 안에서 상당 부분이 실려 보존되고 있다.


 

오리겐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켈수스는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 상식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리 깊지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 나올 정도로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매우 격렬하고 신랄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과 식인을 저지른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정도로 경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표라고 했다. 만약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하셨을 리 만무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는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다른 사람들뿐이다. 켈수스는 제자들의 증언이 예수 생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꾸며 기록에 삽입했을 것으로 보았다.


 

3.신플라톤 학파 (Neo-Platonsism)


 

1.발생 원인


 

여덟 번째의 데키우스 황제와 아홉 번째의 발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시행된 박해는 로마의 기존 여러 신들을 끌어들여 로마 제국을 다양한 외적들로부터 보호해 보려고 하는 중에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고 박해자인 발레리우스가 260년에 페르시아 원정 중에 생포된 다음에 새로 왕위에 오른 갈리에누스 (Gallienus)는 261년에 사실상 박해 정책을 포기하고 관용을 베푸는 조서를 내렸다. 이렇게 한 것은 갈레리우스가 전임자처럼 물리적 힘으로 기독교를 누르려고 한 군인이 아니라 철학으로 기독교를 누를 수 있다고 믿은 지성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래 신플라톤학파는 출발부터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생겨난 종파였다.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하자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의 재래 종교들이 없어질까 하여 이런 철학적 종교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비평만 하는 것을 표방하지 않고 아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 종교를 표방하였다.


 

신플라톤학파는 재래의 철학사상에다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신비 철학을 구성한 것이다. 시조는 암모니우스 삭카스(Ammonius Saccas, 243년에 죽음)였는데 부모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나 후에 옛 종교로 돌아간 자이다. 이 학파의 중요 학자는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우스이다.


 

2.플로티누스 (Plotinus)


 

신플라톤 학파의 최고 지도자는 {플로티누스(Plotinus)}인데 삭카스의 제자였다. 그는 208년 애굽에서 출생하여 244년경부터 270년까지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영혼이 감각에 속한 것들(물질)로부터 해방되어 그 근원인 신께로 돌아가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배척함은 물론 영지주의적 기독교도 배척했다. 그에 의하면 우주 만물은 신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영(Spirit)과 마음(Soul)과 물질(Body)의 삼 단계로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귀하기 위해서는 첫째, 덕을 쌓아야 하고, 둘째, 신과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에로스(쾌락적 애정)를 통해서 엑시타시 현상에 이름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다.


 

3.포르피리우스(Porphyrius)


 

플로티누스의 제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타락, 성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고 박해 기간에 기독교에 대한 비판서를 썼다. 그는 다신교의 옹호자로서 무려 15권의 저서를 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서는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것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비방했다. 또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사후에 주님의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철학으로서 종교를 대신하려고 한 신플라톤 학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그 원인을 다음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敎祖가 없었다. 신앙이나 추종의 대상이 될 분명한 인격적 신이나 교주가 없었으므로 철학적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둘째,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인도하는 방법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 축복과 평안을 어떻게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5.교부들의 신앙 세계

 

1.교부의 정의

 

교부들이란 사도들의 직계 제자로서,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교회의 건설과 진리의 체계화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후세에 권위를 떨친 인물들을 일컫는다. 특히 교부의 자격 중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교리에 정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상이 순수하지 못하거나 정통적이지 못하면 교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첫 교부는 1세기 말에 활동한 로마의 클레멘스를 꼽고 마지막 교부로는 동방교회에 있어서는 다메섹의 요한(725년 사망)을, 서방교회에 있어서는 그레고리 1세(604년 사망)을 꼽는다.


 

교부는 시대에 따라서 니케아회의 이전의 교부와 그 후의 교부로 크게 나누어 지역과 언어에 따라서 동서로 구별한다. 즉 ①속사도교부 또는 사도적교부(Apostolic Fathers) ②변증가 (Apologists) ③헬라교부(Greek Fathers) ④라틴교부(Latin Fathers)로 나눈다.


 

2.주요 속사도 교부들


 

1.로마의 클레멘스 (Clements of Rome)


 

클레멘트 또는 클레멘스는 1세기 말에 로마에서 사역한 유명한 장로이다. 그의 저서로는 <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있다. 그의 저서에는 구약 인용이 많아서 약 4분의 1이나 된다. 그는 바울의 정신을 많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야고보와 같이 윤리적 가르침을 많이 베풀었다. 클레멘스의 관심사는 바울과 같이 진리를 세우고 확고히 하는 데 있었다기 보다는 교회 형제들의 선행과 덕행을 격려하는데 있었다. 그는 신앙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2.이그나티우스 (Ignatius)


 

안디옥 감독으로 트라야누스 황제 때 로마에 끌려가서 맹수의 밥이 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상은 교회의 통일, 감독의 권위, 순교자의 영광 등이다.


 

그의 저서로는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쓴 7통의 서신이 있다. 이중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라리아> <로마인에게>는 서머나에서 집필한 것이고 <빌라델피아> <서머나> < 폴리카르푸스에게>는 드로아에서 집필한 것이다. 그는 이 서신에서 대속 문제, 성육신 문제(주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이단인 假現說者들을 취급하면서), 유대주의자들 문제, 감독직의 권위 문제를 취급했다.


 

3.폴리캅(Polycarp)


 

2세기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폴리캅은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으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이그나티우스 친구였으며 후일 이레네우스의 스승이 되었다. 폴리캅은 155년에 서머나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 한 통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바울 서신들과 베드로서, 요한일서 등이 인용되어 있다.


 

4.파피아스(Papias)


 

브프리기아(브리기아)의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서 150년 경에 버가모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저서로는 다섯 권으로 된 <주의 가르침의 설명>이 있다. 이 책은 사도들과 사도들의 제자들이 전한 것을 한 데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단지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속에 단편적으로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파피아스는 열정적으로 천년왕국을 주장하였다.


 

3.교부들의 신학


 

1.기독론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논쟁당누 논쟁은 없었다. 대체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믿었으나 신성을 더 강조한 편이었다.


 

①클레멘스 (Clemens of Rome)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엄한 홀(笏)이다.


 

②이그나티우스 (Ignatius) : 그리스도는 신이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다.


 

③헤르마스 (Hermas) : 그리스도의 선재설(先在說)을 믿었다.


 

2.삼일신(3 1神) 교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명백한 교리는 이 시대에 아직 확립되지 않았지만 희미하나마 삼위일체 교리를 믿은 듯 하다.


 

①이그나티우스 : 신자는 건축재(돌)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을 끌어올려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기계로, 성령님은 밧줄로 비유함


 

②클레멘스 : 사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충분한 확신을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견고하게 되고, 성령님의 보증을 얻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복음을 듣고 이것을 전하러 나아갔다"고 말했다.


 

3.속죄론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열고자 피를 흘리셨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건한 마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주신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는 以信得義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속죄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별로 철저하지 못했고 이신칭의의 근거에 대해서도 구약 말씀들에서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4.천년설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리스도게서 천년간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신다고 가르쳤으며 파피아스는 상상력을 크게 활용하여 천년 시대의 상태를 묘사하기까지 했다. 전반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윤리주의와 율법주의가 교회 내에 만연하였다. 따라서 바울이 크게 강조한 이신칭의의 복음 진리가 별로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고 행함에 대해 강조한 야고보의 사상만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지도자 자신들이 바울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리주의가 교회 안에서 만연되게 된 데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이방 철학 사상 특히 스토아주의의 영향이 컸다.




 

6. 변증가들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자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기독교의 참 진리됨을 변호하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이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교리화하고 신조화하는 데와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변증가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교자 유스티누스가 가장 탁월한 변증가였다.


 

1.헬라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1.유스티누스 (Justinus)


 

그는 125년에 사마리아에서 출생하여 166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핍박 때 죽었다. 그는 헬라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는 중에 진리를 찾아보려고 스토아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또는 피타고라스 학파 등을 전전하며 사숙하였으며 플라톤 학파의 학설에 깊이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가 플라톤 철학을 열심히 연구한 결과 거의 철학의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특별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날 해변을 산보할 때 한 노인을 만난 것이다. 그 노인은 유스티누스에게 구약 성경을 주면서 이 책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되었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노인을 만난 후 유스티누스는 모든 인간적인 지혜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노인의 충고에 따라 구약을 연구하였고 또한 신약을 연구하는 중에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하신 것을 발견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지도자가 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는 <대 변증서>와 <소 변증서>,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등이 있다. 이 중 대변증서는 황제와 원로원, 로마 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터무니없고 상투적인 비난 곧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며 국가에 반대하고 사람 고기를 먹는다는 등의 주장들을 반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기독교의 참된 신앙 됨과 고상한 도덕적 종교임을 변증하며 이방 종교에 비교할 때 기독교가 매우 우월한 종교라는 것을 강조했다.


 

2.아리스티데스 (Aristides)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 사람인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기독교를 변증했다. 이 글은 시내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참 신의 성질을 설명했고 이교의 신화를 공격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풍성한 삶에 대해 설명했다.


 

3.콰드라투스 (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그는 126년 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변증서 제출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예수님에게 병 고침을 받은 자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4.타티아누스 (Tatianus, 110-170)


 

앗시리아인으로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였다. 철학자인 그는 로마에 거주했는데 나중에는 그노시스 종파에 들어갔다고 한다. 저서에는 헬라인의 신화를 반박한 {헬라인에 대한 담론},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편집한 {디아테사론}(傳記)} 등이 있다. 디아테사론은 가장 오래된 예수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160-170년 경에 요한복음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으로 말미암아 증명된 것이다.


 

5.아테나고라스 (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 경에 쓴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에서도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이론가였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철학적으로 변호한 첫 그리스도인이다.


 

6.멜리토 (Melito)


 

소아시아의 사데 교회 감독이었으며 당시 유명한 대작가였으나 전해오는 저서는 없다. 힐라 신화를 비판한 글을 많이 썼다. 최근 {주의 수난}이라는 논문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존중하여 주님을 '본질상 神 人'이라고 칭했다.


 

2.라틴어를 사용한 대표적 변증가들


 

1.미누키우스 펠릭스 (Minucius Felix)


 

원래 유명한 로마의 법률가로서 230년 경에 활동했고 저서로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친구 간의 대화 형식으로 된 <옥타비우스>라고 하는 글이 있다.


 

2.아르노비우스 (Arnobius)


 

아프리카에서 수사학 교사를 지낸 아르노비우스는 주님을 믿은 후 세례받기 전에 (주후 303년 경) 7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내용은 다신교의 불합리성을 공격하고 기독교의 장점을 칭찬한 것이다.


 

3.락탄티우스 (Lactantius)


 

아르노비우스의 제자로서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며 그리스찬 키케로라는 이름을 얻었다. 저서로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는데 이 책은 독창적이지는 않으나 당시의 변증론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3.변증의 정신과 내용


 

1.정신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주는 편지> 1절을 보면 변증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


 

①세상에서 신자의 존재는 몸에 있어서 영혼(마음)과 같다. 영혼이 온 육체에 충만한 것 같이 신자는 온 세상에 널리 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머물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②육은 영을 미워하여 항상 대적한다. 이것은 영이 육에게 무슨 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영이 육신을 그 정욕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범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아무런 해를 입은 일이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함께 세상 쾌락으로 치닫지 않고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세상에게 부끄러움을 주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③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 육체를 사랑하며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다.


 

2.내용


 

변증서의 내용들은 기독교인이라고 까닭없이 박해는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박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비난의 내용 >


 

①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


 

②정부를 엎고 세상에 별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함


 

③그리스도인은 부도덕한 자


 

④예수는 마술사


 

< 변증의 내용 >


 

①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다만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일 뿐이며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한 참 유신론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②신자의 목적은 세상 나라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엎으려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음. 진리와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꺼이 순교하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세상에 나라를 세우려는데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


 

③예수님의 도덕적 가르침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탁월함을 설명함


 

④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신)이다. 그가 신기한 표적을 행한 것은 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한 것이다.


 

변증가들은 변증을 위해서 주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관계, 기독교와 세상 철학들의 관계에 대해 비교하며 유사점과 차이점을 부지런히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변증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신의 유일성과 기독교 도덕의 초월성이다.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증가들은 구약 성경 중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에 의해 지금까지도 이적이 계속되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 세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의 감화력과 결과를 들어서 증거로 삼는 일도 많아졌다.




 

7.헬라 교부들


 

1.소아시아의 신학자들


 

이들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70년 경으로서 변증가 시대의 끝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도 변증서가 계속 나오는 등 변증의 열심이 완전히 식어진 것은 아니나 교회는 점점 내부의 충실에 열중하였으며 신학교를 건설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또 이 무렵 헬라 신학자와 라틴 신학자가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지방과 언어가 다를 뿐 아니라 국민성의 차이로 사상의 경향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헬라파도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소아시아파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파이다. 소아시아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른 사람들로서 성경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건함이 이들의 장점이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한 대항적 자세를 취했다. 이 파의 지도자는 이레네우스와 히폴리투스이다.


 

1.이레네우스 (Irenaeus)


 

이레네우스는 가장 뛰어난 초대교회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제자인 히폴리투스와 함께 초기 카톨릭 논쟁자들 중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데오도레투스로부터 [서방교회의 빛]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그는 대략 115-140년 경 사이에 소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서머나 지방에 거하는 동안 폴리캅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선교사가 되어 고올(프랑스) 지방에 가서 전도하다가 그곳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정통 교리의 옹호에 힘썼다. 이레네우스는 성질이 온순하고 사상이 순수한 것이 장점이며 박학한 학자였다. 그는 헬라의 철학자들과 시인들의 책에 정통하며 반대자들의 사상을 잘 알아보는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에레네우스는 헬라의 신학자였지만 활동한 장소는 서유럽으로서 라틴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주후 177년에 리용과 비인의 교회 박해시에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여 그곳의 모든 시민이 신자가 되게 하는 등 전도에 크게 성공하였다.


 

이레네우스는 변증가들과는 달리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을 막기 위해 싸웠다. 그는 성경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신약을 충분히 활용한 교부들 중 일인자로서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보여주었으며 사복음과 거의 모든 서신을 이단자 말시온의 성경과 대조하여 논증하는데 인용하였다. 그가 주로 논쟁한 상대는 이단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였다.


 

그의 사상은 변증가들이 사상처럼 철학적이고 사변적이지 않고 사도 이래의 전통을 존중하고 신앙의 표준을 중히 여겼다. 그는 특히 사도들에 의해 보존된 로마 교회의 신앙과 사상이 모든 교회의 신앙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관(神觀)에 반대하여 하나님은 자유 의지로 천지를 창조하신 유일한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였고 신의 피조물인 우주(물질) 역시 선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신 로고스이며 그의 독생자라고 하였다. 성령은 성부에 대해 순종하는 위치에 서서며 성자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했다.


 

이네네우스 신학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난 부분은 예수님께서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구주이심을 밝힌 부분이다. 즉 주님은 이방 종교의 교조들처럼 단지 선한 가르침을 베푼 분이 아니라 그 자신이 거룩한 가르침을 낼 수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주님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놀라운 인격과 권능을 소유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우스가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심으로 본 것은 그의 순종이었다. 인류는 바로 불순종으로 인해 타락하고 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로서 주님은 인류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주님은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포함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레네우스는 이러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목'에 대해 힘써 증거했다.


 

이레네우스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이미 로고스가 아니고 성육신과 속죄에 있었다. 오랫동안 거의 잊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신학은 이레네우스에 의해 다시 상기되었다.


 

2.히폴리투스 (Hippolytus)


 

히폴리투스는 이레네우스의 제자인데 170년에 태어나서 235년 죽었다. 그는 주석과 연대기와 부활절 계산, 변증가, 이단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는 로마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장로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하여 당시 등장한 두 가지 단일신론(Monarchian) 주장(삼위를 위해 일체를 희생시키는 養子論的 단일신론과 일체를 위해 삼위를 희생시키는 樣態論的 단일신론)에 크게 반대하여 로고스 기독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대표 저서는 < 모든 이단을 논박함(Against All Heresies) > 이다.


 

2.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자는 철학과 古文學의 소양이 풍부하였다. 그들은 이단을 반대하여 참 진리를 세우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으나 그 자유로운 연구 태도와 사상 자체는 복음적이 아니라는 비난도 받았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이 파의 대표자들이다.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유력한 교회가 되었을 때 기독교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학교(학파)는 처음에 판테누스에 의해 지도되었다. 판테누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고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며 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사적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의 제자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에 이르러 이 학파는 최고 번성기를 맞이하였다.

 

1.클레멘스


 

150년 경에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180년 경 판테누스를 만나 수학하였고 189년부터 12년간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다. 202년 셉테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 안디옥으로 피하여 거기서 저술과 설교에 종사했으며 후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가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서 213년 경에 죽었다. 클레멘스는 성격이 온화하고 명상적인 사람으로서 논쟁의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폭넓은 교양과 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철학과 기독교 간에는 모순이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는 철학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옛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사상의 좋은 점들을 모아 크리스찬 영지주의를 낳았다. 클레멘스는 이러한 활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방 종교의 헛됨을 설명함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권면>과 기독교인의 생활론으로 당시의 풍속, 습관, 도덕을 설명한 3권 짜리 책 <교육자>와 순서 없이 모은 철학, 종교, 신학의 비망록인 <잡설> 등이 있다.


 

2.오리겐(오리게네스)


 

185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서 출생한 오리겐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대 학자였다. 18세 때 스승의 클레멘스의 뒤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었고 암모니우스 삭카스에게 철학을 배웠다. 거룩한 삶을 향한 오리겐의 열망과 금욕적인 경향은 스승인 클레멘스보다 훨씬 더 하였다. 그는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사람 중 하나였으며 아무 소유도 없었다. 그는 211년 경에 로마로 갔으며 215년에는 아라비아로 가서 전도하였으며 230년 경에는 팔레스틴을 거쳐 그리이스 등지로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시기하는 자들의 비난과 고소로 인해 추방당했고 가이사랴에 가서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오리겐은 244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두로의 감옥에 갇혔으며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오리겐은 다방면에서 석학이었으나 구약 본문 비판, 주석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저술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성경에 관한 것으로서, 본문 비평과 주석이 있다. 비평서로서는 {헥사플라}(Hexapla; 6가지 번역 성경)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나온 기독교 학자들의 모든 저서 중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역시 신 구약 전체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 둘째는 교리상의 저서로서, {제1원리}(De Principis)라는 큰 책이다. 이 책은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인데 오늘날의 조직신학에 해당하는 최초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변증적인 저술로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다. 이것은 8권으로 된 방대한 책인데 전부 전해지고 있다.


 

오리겐은 성경을 중히 여겨 그것을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는 필로와 같이 성경을 철학과 조화시키고자 하여 구약 해석을 함에 있어서 풍유적 또는 우화적(allegorical) 해석법을 사용하였다. 이 해석법은 헬라 철학자들이 신화와 신에 관한 시를 해석할 때 사용한 방법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오리겐은 성경 말씀에서 한 가지 뜻만 찾지 않고 세 가지 뜻을 동시에 찾고자 했다. 그는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성경에서 육신의 유익을 찾고, 깨친 자들은 정신적 유익을 찾으며, 완전한 이들은 영적 유익을 찾는다. 사람이 영과 혼과 육으로 된 것 같이 성경도 그러하여 성경 안에는 문자적, 도적적, 영적 뜻이 함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문자적인 뜻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이며, 도덕적인 뜻이란 사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교훈을 말하며, 영적인 뜻이란 성경 말씀 안에 포함된 철학적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항상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조화시키고 철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우화적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던 것도 바로 성경에서 철학적인 뜻을 찾기 위해서였다. 헬라 사상에 의한 기독교 해석법은 오리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과학은 철학과 윤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리겐의 작업은 기독교의 과학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적 바탕은 신플라톤주의로 기울어진 플라톤 스토아 철학이었다.


 

교회, 사도적 전승 위에 자기의 신학 체계를 세웠는데, 우선 그는 종속설(從屬說)을 주장했다. 로고스(아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이지만 아버지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주장이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오리겐은 영혼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내세관은 연옥설과 지옥유한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에 가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불이 있어서 깨끗하게 된 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의 구원관은 만인구원설이어서, 선인뿐 아니라 악인도 일정한 사후의 시련을 통해 비록 그 길이 멀고 험하기는 하지만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리겐의 우주관은 플라톤의 영향을 입어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 세계 배후에는 이데아의 세계 곧 현세의 영적 실재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영혼은 그 세상에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우리를 타락시켰다. 그래서 구속 얻은 자들만 거기로 돌아간다고 했다.


 

오리겐은 바울 이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죽으심의 속죄적 가치를 강조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만인에게 미쳐서 성도뿐 아니라 악인들까지도 마침내 구원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마귀들까지 구원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이 다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리겐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대학자로서 그의 정신 세계의 규모와 수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의 모든 이론들이 다 참된 진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 성향을 띤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세상이 보다 열등한 주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와 아울러 물질 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플라톤주의적)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이점에더 오리겐은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 영혼의 선재라든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을 주장한 것을 놓고 보면 그의 사상이 기독교의 정통 사상에서 벗어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어쨌든 오리겐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 이전까지의 교회에 있어서 최고의 지적 성취로서 이후 동방 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대의 기독론 논쟁에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그를 인용했기 때문에 그의 고향 알렉산드리아 회의(399-400년)와 유스티누스 황제 회의(543년), 제5차 교회 대회(553년)에서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다.




 

8.라틴 교부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의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1.터툴리안 (Tertullianus)


 

터툴리안은 신학을 라틴 신학으로 개편하였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에게서 형성된 라틴 신학은 키프리안과 암브로시우스로 계승 발전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부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즉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과 그것에 근거하는 계시와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매개로 하여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


 

터툴리안은 160년 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출생했으며 40세에 회심하였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 만연된 부도덕성으로 인해 자신부터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도덕성에 대해 많이 강조했으며 극장 관람조차 강력하게 정죄했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는데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서}(Apolpgy)였다. 이 책에서 그는 탁월한 법률가로서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취급해 본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단호하며 우울하고 열정적인 그는 중년에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계속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불공정하고 광신적이었다. 그는 약 225년에 죽었다.


 

터툴리안은 몬타누스주의자가 된 후에도 계속 교리적 오류(이단)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무렵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은 {프락세아스를 대항함}(Against Praxeas)이다.


 

신학 발전에 대한 터툴리안의 최대 기여는 속죄론의 기초가 되는 죄악론을 주장한 데 있다. 시조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미 이레네우스가 가르친 것이었지만 그는 아담의 죄와 지금 우리의 죄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사람의 영혼이 부모에게서 유전된다는 유전설을 주장하면서 죄도 함께 유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죄는 육체에 있지 않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터툴리안이 독창적으로 주장한 원죄설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삼일신(三一神) 사상을 최초로 내놓았다. 이것은 삼위일체 사상보다는 조잡하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프락세아스를 대항함'에서) 또 그는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세례를 반대했다. 이것은 세례 후의 범죄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는 철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오직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 했다. 그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했다. 그는 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일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철학적 관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엇을 이루었는가(성경적 관심)이다. 이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바이며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는 모두 무용하고 위험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2.키프리안 (Cyprianus)


 

스스로를 터툴리안의 제자라고 일컬은 키프리안은 3세기의 가장 위대한 감독이자 교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200년 경 카르타고의 부자집에서 출생했는데 어릴 때 훌륭한 헬라 교육을 받아 나중에 저명한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그는 문학, 수사학, 법률 및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으며 이로 인해 248년에 가르타고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248년 그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어 많은 일을 했으며, 250년 디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사막으로 피난하여 교회에 서신을 보냄으로써 그가 없을 동안이라도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사막에서 돌아온 후에는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를 만나 사막으로 다시 귀양을 갔다가 258년 참수당하여 순교했다.


 

키프리안 신학의 중심은 교회론에 있었다. 터툴리안은 人性(人間)의 부패를 말하면서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쳤다. 이에 비해 키프리안은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난 자는 타인이며 俗人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말한 교회는 오직 카톨릭 교회 하나였다. 그는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은 자이다" 라고 하여 분리된 교회 또는 이단에 가담한 사람이 받은 세례를 무효로 보았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과 감독(교황, 성직자)에 대해 크게 강조함으로써 중세 카톨릭 교회의 근본이 될 사상 체계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교회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교회 외의 일상 생활과 자연 만물의 신성과 가치를 인정치 않았다. 키프리안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불가시적(不可視的) 영적 공동체' 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들의 유기적 공동체'로 보지 않고 단지 (인간 감독에 의해 다스려지는) 외적 조직과 제도를 갖는 가시적(可視的) 공동체로 보았으며, 그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말씀}보다는 보이는 {사람}(감독들)에 의해 확실히 유지되는 것으로 보았다.


 

카톨릭교회 곧 可見的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감독 없이는 신앙도 없다는 강경한 주장을 한 키프리안은 아마도 카톨릭의 성직 제도를 확고히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단과 핍박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던 당시의 사정에서는 이런 주장을 할 필요성이 어느 정도 있었을 터이나, 성령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신약 교회의 특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인간의 제도에 근거하여 교회를 유지하려고 의도한 키프리안의 신학은 한쪽으로 크게 치우친 잘못된 신학이며 훗날 나타나게 될 교황 제도를 합리화시켜 줌으로써 교회를 크게 황폐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9.사죄(고해) 제도의 등장


 

초대 교회는 일반적으로 모든 죄가 고백(悔改)만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다 사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하나님께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교회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신앙의 부정(否定)-背敎-과 성적 불륜(姦淫), 자살이었다. 이런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축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로 간주되던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이런 수찬 정지는 구원을 위태롭게 했고, 이런 징계를 받은 자들은 그것을 완화해 주기를 바랐다. 여기서 참회하는 죄인을 받아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터툴리안은 세례 받은 후에 한 번 회개하는 것은 허용했으나 배교, 음행, 살인의 죄는 제외했다. 그는 두 번째(세례 후)의 회개에는 공중 앞에서 금식하며 통곡하고 장로들 앞에서 굴복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문제는 죄인이 얼마 동안 회개해야 회복되며 누가 회복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죄의 사유권을 교회에, 나중에는 베드로와 교권(성직자)에게 맡겼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사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게 되자 음행과 간음한 자 및 배교를 한 자들까지 교회가 받아주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서 지도자들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로마 감독 칼리스토스(217-222)는 어떤 죄든지 합법적으로 회개하면 자기가 사해준다는 성명을 내었다. 이것은 교황권의 발전을 의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배교자는 제외했으나 박해로 인해 무수한 배교자가 속출하자 그것도 결국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넘어진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자고 했다. 여기에 대해 엄격파들은 그 입장을 거부하고 로마의 신학자 노바티안을 따름으로 분열하였다. 대다수인 나머지는 관용적 입장을 취하였다. 결국 로마 회의(251년), 카르타고 회의(252년)에서 다수파인 관용파가 승리하여 교회는 회개한 배교자들의 교회 가입을 결의했다.


 

그러나 모든 죄인들을 똑같이 대할 수 없고 사안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키프리안의 주장에 따라 교회들은 배교자 등 죄인들의 죄책 등급을 다루게 되었고,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등급에 따른 고해 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 교회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햇수(年數)가 결정되었다. 고해(告解; penance) 개념은 세례의 속편(續篇)으로 발전한 것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고해로써 과거의 모든 죄를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세례는 한 번만 받는 것이므로 반복할 수 없었고 세례는 세례 받기 전까지의 죄만 씻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후의 범죄에 대해서는 다른 구제 방법이 필요했다. 당시 사람들은 순교를 제2의 세례와 같이 생각했다. 곧 순교는 세례를 받은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사하는 피의 세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 같은 사람이 순교를 그렇게 갈망하고 그것을 자청했던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는 다른 수단이 필요했는데 이에 등장한 것이 고해였다. 이런 사상은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쓰여진 {헤르마스의 목자}에 나타난다.




 

10.이단과 분파들


 

1.이단들


 

교회는 초기에는 유대교와 로마제국의 박해와 핍박을 받았고 2세기부터는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각종 이단 종파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이런 이단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복음을 로마의 문화권에서 이해하고 곡해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 특히 유대교적 이단 종파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은 복음을 유대교적으로 이해하였는데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엘카이파가 다 그러했으며 그노시스파(영지주의) 역시 그런 경향을 나타내었다.


 

1.에비온파


 

에비온파는 요단 동편 지방에서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성행한 이단인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반역자로 생각하고 배척하였으며, 따라서 에비온파는 그들이 유대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간주한 마태복음만을 사용하였으며 바울 서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독교회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에비온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을 해야 하며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믿었으며 그리스도는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자천(自薦)한 사람이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메시아 자각을 했으며 그의 가르침에 많은 무리가 따르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에비온파는 사실상 기독교회가 아니고 유대교의 일파라고 할 수 있다.


 

2.엘카이파


 

엘카이파는 접신적(接神的) 신앙을 가지며 금욕주의와 고행주의를 주장하는 기독교회 내의 유대인 집단이다. 그들은 에비온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주 세척(洗滌)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신과 화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그들 사이에는 접신적 행위와 점성술이 성행했고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심신의 수양을 쌓고 인간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다.


 

3.그노시스파


 

그노시스파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도 하는데 그때까지 나타났던 어떤 이단보다도 간교하고 위험한 이단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3세기 초에는 로마 제국 전역의 대부분의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크게든 작게든 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지주의라는 용어의 어원은 '지식'이란 뜻의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다. 이 지식은 보통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지식, 지혜로서 특수 계층에 속하는 영적인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적 진리와는 전혀 무관한 여러 가지 세상 종교적 신비적 요소들 곧 당시 유행하던 점성술과 마술, 이집트 인도 페르시아의 신화들과 여러 가지 다른 철학들과 페르시아의 이원적 우주론의 혼합물에다 애매한 기독교적 요소를 가미하여 만든 일종의 새로운 종교 철학이었다.


 

그들은 구약에서 유대교적 요소를 거절하였으며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하여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과 부활 등의 실재를 부정했다. 대속자에게 있는 인간적 요소는 단지 사람을 속이는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금욕과 방랑생활을 좋게 여겼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 속에서도 위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물질적인 것은 악하므로 순수한 쾌락마저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우선적인 문제는 이 우주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에 어찌하여 죄가 있고 재해가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역사의 해석 문제였는데 특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기독교의 구원과 헬라 철학의 발출설(發出說), 동양과 헬라의 이원설(二元說)을 채택하여 계통있는 사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공통적 사상을 보면 신으로부터 유출된 아이온(Aeon ; 영원히 존재하는 자)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이르게 되는데 물질은 아이온의 최하급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급에 속하는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Demiurgos ; 조물주)가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불완전하며 결점(罪)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조물주인 하급 아이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최고의 아이온이다. 그는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지식을 주고 구원을 이루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제하지 않으며 가현(假現)이다. 인간의 구원은 물질의 구속(拘束)을 벗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속죄는 참 지식(gnosis)을 가지고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인류는 선악의 혼합으로 삼분(三分)되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인간들인데 이들은 물질적(hylic) 계층에 속하며 사탄과 자신의 육욕에 사로잡혀 희망없이 살아가고 있다. 둘째, 정신적(psychics) 인간들인데 이들은 신앙 이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선행으로 세상의 중간층까지만 간다. 셋째, 영적(pneumatic) 인간인데 이들은 특수계층에 속하며 참 지식(gnosis)을 가졌으며 그 지식으로 신앙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


 

4.마니교


 

마니교는 로마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3세기에 일어난 종교로서 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은 동방에 있으며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종교인데 서방으로 퍼짐에 따라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그 시조는 마니(216-276)인데 페르시아 귀족의 아들로서 젊을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았으며 여러 해 동안 인도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많은 제자들을 얻었으나 반대자들로부터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들의 교리는 페르시아의 이원론에 기초한다. 이 세계는 광명과 흑암과의 싸움이며 인류는 악마가 광명국에 침입하여 생긴 것으로 본다. 사람은 빛을 이 흑암 속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해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해탈(解脫)의 방법은 육체를 정복하여 금욕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마니교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과 혼인과 망령된 말을 금했는데 이 점에서는 불교와 비슷하다. 마니교의 최고의 덕목은 세 가지를 인봉(印封)하는 데 있다. 첫째는 입의 인봉인데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이고, 둘째 인봉은 손의 인봉인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인봉은 가슴의 인봉으로 정욕과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마니교는 초기의 기독교와 유사하거나 더 질서정연한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다. 마니 밑에 12사도가 있고 그 밑에 70인의 감독이 있었으며 그 밑에 교사들이 있었고 또 그 밑에는 행자(行者)가 있었는데 행자 중에는 택한 자와 듣는 자 두 종류가 있었다. 이 중 택한 자란 세 가지 인봉을 가진 자를 말한다.


 

마니교는 동서로 전파되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지에 이르렀고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까지 존재했다. 어거스틴도 젊을 때 8년간이나 마니교에 탐닉한 적이 있다.




 

2.교회의 분파들


 

1.몬타누스파


 

몬타누스파는 교회가 영지주의 등 이단들의 도전으로 흔들리고 사도들의 타계로 인해 그러한 교회들을 굳게 할만한 사람들도 적어지고 게다가 초대교회를 특징지웠던 성령의 충만과 놀라운 은사들도 적어지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이때는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예언들도 의심받게 되었다.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초기의 영적 생명력은 결핍되고 경직성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몬타누스파는 이러한 경향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반발(반동)으로 나타났다. 이 운동은 156년 프리기아의 몬투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성령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열광적인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 후에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분리되었다.


 

몬타누스파가 주장하는 진리(교리)는 거의 당시 카톨릭 교회와 같았으며 소위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특별한 주장을 하는 것이 없었다. 성경의 모든 책을 다 정경으로 인정하고 전통적인 신앙 고백들을 다 굳게 지켰다. 그들은 뿌리를 정통 기독교에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노시스파와 그밖의 여러 가지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 내의 진보적 사상들을 막고 초대 기독교를 부흥시키려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생겨난 것이었다.


 

몬타누스파는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특히 반대하였으며 엄격한 규율을 실시하여 교회의 규율 문란으로 인한 신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예수께서 속히 오셔서 천년왕국을 건설하시리라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 계급제도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교사와 교역자의 자격과 임명은 안수나 감독의 임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의 뜻에 따라 직접 맡겨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주의(萬人祭司長主義) 원리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몬타누스파이다.


 

또 이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시하여 금욕과 고행을 장려하였으며, 재혼을 금하였다. 여자의 사치스런 의복을 금하고 처녀는 너울을 쓰도록 하였다. 또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두 번째 회개(세례 후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박해 때 숨는다든지 도망하는 것을 정죄하며 변절했던 사람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 세례를 칭송함으로써 장려했다.


 

2.노바티아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가 생긴 것은 디키우스 황제(249-251)의 심한 박해 때 교회 안에 많은 변절자들이 생겨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해가 지난 뒤 변절했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로마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대부분의 로마 교회 지도자들을 비롯한 서방 교회의 감독들과 동방 교회 감독들은 변절자들에 대해 관대히 대했다. 그러나 노바티아누스는 이들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다툼이 생기게 되어 노바티우스는 한 분파를 세우게 되었다. 로마 감독들은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후 노바티아누스를 파면하고, 변절자들을 적당히 회개시키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노바티안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앙을 배반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로서 이 세상에서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범죄자는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밖에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살인, 음행 등의 죄도 중죄로 간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혼도 실질적 간음으로 보았다. 교회들은 이들을 분파주의로 정죄하고 그들의 행위가 교회의 질서를 문란시키고 분열을 일으켰으며 이단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과 기존 교회들 사이에 생긴 간격으로 파문을 당하고 분파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끝까지 고수하였으나 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도나투스파


 

도나투스파는 4세기 초, 곧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가 끝날 무렵에 일어났다. 이 파는 일찍이 몬타누스파와 노바티아누스파가 가지고 있던 청교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이들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도나투스파가 직접 생긴 원인은 박해 기간 중에 강압이나 두려움에 의해 성경을 버리거나 부인하는 자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도나투스파는 교회는 이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이 떠난 교회이므로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지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관용 정책을 써서 박해시에 범죄한 자들을 비호하고 반대로 도나투스파와 같은 강경론자을 탄압했다. 그래서 강경론자들은 새 감독을 세웠는데 316년에는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강경론자들이 세운 새 감독 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서 카르타고에는 두 사람의 감독이 있게 되었고 북아프리카의 교회는 그후 약 100년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도나투스파는 급속히 발전하여 로마 제국의 다른 지방에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콘스탄틴 황제에게 자기들을 보호하고 후원해 달라고 호소하였으나 콘스탄틴은 처음에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그러나 박해를 당하자 도나투스파는 더 광신적인 열정으로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자 콘스탄틴은 태도를 바꾸어 321년에 그들에게 완전한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주는 새 법을 선포했고 카톨릭에 대해서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들을 대하라고 권고했다.


 

도나투스파는 우선 엄격한 교회 규칙의 적용과 교인의 순결 유지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고 세속적인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우는 것을 절대 반대했다. 교회 일에 대해 세속 권력자가 간섭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러나 제도는 카톨릭적인 감독 정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도 카톨릭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 세례에 의한 중생 곧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유아세례도 시행했다.


 

몬타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 노바티아누스, 도나투스 같은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이나 말썽꾼들이 아니며 교회가 바른 길로 나아갈 것을 염원하며 그렇게 될 수 있는 나름대로의 행동 원칙을 가지고 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탁월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언제나 개인주의적 편협함과 고집, 완고함 등이 부분적으로 작용하여 종종 광신적인 상태에 빠지거나 그들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던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이들이 보다 폭넓고 명철한 판단을 하여 개혁을 균형 있게 진행했더라면 오류들은 줄어들었을 것이며 그들의 활동은 교회 생활과 신앙 사상의 개혁과 발전에 훨씬 더 큰 유익을 남겼을 것이다.


 


11.성경의 편집과 신경(信經)의 작성

 

1.신약 성경의 편집

 

최초의 복음서는 적어도 주후 60년 경에 가서야 쓰여졌다. 이 기간을 전후로 하여 바울의 서신들이 기록되었고 그보다 후에 요한이나 기타 사람들의 서신들이 기록되었다. 1세기 말엽에 가서 바울의 서신들이 최초로 한 데 모아졌다. 2세기 중엽에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들이 하나의 묶음으로 모아졌다. 요한복음은 얼마 있다가 공인을 받았다.


 

오늘날의 신약 성경은 속사도 시대 동안 편집되고 확정되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 의하면 일요일의 모임 때 예수님의 언행을 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복음서였을 것이다. 유스티누스의 제자 타티아누스가 사복음서를 종합하여 한 줄기의 전기로 만들어서 {데아테사론}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160년 전후의 일이다. 사도의 서신을 복음서와 같이 성경의 일부로 취급한 최초의 사람은 그노시스파의 마르키온이다. 마르키온은 주후 140년 경에 최초의 정경 목록을 내놓았는데 여기에는 완전치 못한 누가복음과 바울 서신 중 10개만 포함되어 있었다. 마르키온은 그의 잘못된 사상 때문에 구약 성경을 일절 배척하고 성경을 오직 복음서와 사도 서신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처럼 마르키온의 정경 형성 작업은 그노시스파가 사도들의 이름을 붙인 자기들의 복음서와 묵시록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일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올바른 정경 형성 작업을 촉구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와 함께 몬타누스파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소위 '새로운 계시'의 등장도 정경 형성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2세기 말에는 소위 사도들의 '행전'들이라는 책이 몇 가지 나왔는데 여기에는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사도들의 선교 활동 내용이 들어 있었다. 거기다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나 빌라도의 생애에 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몇 가지 복음서들도 나왔다. 이런 책들은 기독교 소설에 가까운 책들이었다. 특히 이런 책들은 가현설자나 결혼을 거부하는 주장을 하는 일부 이단들의 주장을 널리 퍼트리는데 기여했다.


 

2세기 말에 기독교 저술가들은 교회가 공인한 책을 모두 밝힐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오직 네 권의 복음서가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무라토리 단편}으로 알려진 최초의 정경 목록은 일반적으로 주후 200년 경 로마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1740년 이탈리아의 역사가 무라토리가 밀라노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인데 첫 부분은 분실되었으나 남은 부분에는 네 권의 복음서와 바울의 13개의 서신서들 및 사도행전과 요한의 두 서신, 유다서와 요한계시록, 솔로몬의 지혜서, 그리고 공인이 유보된 베드로 묵시록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전후서와 히브리서, 야고보서, 요한삼서는 빠져 있었다. 1세기의 교부 로마의 클레멘트는 이미 히브리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었다.


 

페시토라는 성경도 있는데 2 세기 중엽 이전에 에뎃사에서 만들어진 시리아역 신약 성경이다. 그 안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의 13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요한1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요한2,3서가 추가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3서를 인용하지 않았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빌레몬서, 요한2,3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를 인용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 시대 즉 150년 경에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을 합한 신약 성경이라는 것이 일반 교회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에는 이미 그것이 있었다. 지금의 신약 성경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히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2세기 말 경에는 오늘날 신약 성경에 수록된 문서의 대부분이 이미 성경으로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에 아직도 성경으로 승인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2,3서, 히브리서, 요한계시록 등이었다.


 

3세기 초까지 정경의 주요 목록에 대해 전교회적인 의견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몇 권의 책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방교회는 히브리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몬타누스파가 히브리서 6장을 배교자들의 회심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 요한계시록은 천년왕국을 주장하는 책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론을 반대하는 동방교회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4세기 초까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된 책은 베드로후서, 요한2서와 3서, 유다서였다. 요한계시록도 어떤 사람들에게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결국 367년에 신약 성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또한 정경에 들지는 못했지만 훌륭한 신앙 문서로 평가된 {디다케(열두 사도의 교훈집)}와 {헤르마스의 목자서}는 교회에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허용되었다. 정경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유익한 글로 인정된 또 다른 책은 {클레멘트 1서}와 {바나바 서신}이다. 그밖에 시리아 교회는 수 세기 동안 타티안의 {디아테사론(사복음서의 기사를 한 권으로 간추려 놓은 책)}을 네 권의 분리된 복음서 대신 사용했다. 후에 시리아 교회는 요한계시록을 거절하였고 히브리서 등 공동 서신들의 권위를 낮게 평가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모든 책을 인정하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 정경이 확정되고 공인된 것은 393년의 힙포 공의회와 397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였다.


 

2.사도신경의 형성


 

교회가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 종파들과 투쟁하는 동안 교회에는 세 가지 산물이 형성되었는데 첫째는 신경이고 둘째는 교회법, 셋째는 조직이다. 이 중 신경(信經;Creed)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교훈을 집약하여 하나의 신앙고백 형태로 만든 것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정해 놓은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회 복음의 유일성을 의미하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적 전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유력한 설은, 초대 교회 당시 세례식을 거행할 때 세례주는 사람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이것을 받는 수세(受洗) 후보자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 고백이 점점 일정한 형식으로 되어서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날의 사도신경과는 같지 않은 듯하다. 그후 교회에 아리우스, 그노시스파 등의 이단이 일어남으로써 정통 교리를 표시할 만한 문구를 넣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전문(全文)이 완성된 듯하다.



 

12.로마 교회


 

2세기 말 교회에서 나타난 현저한 두 가지 현상은 첫째, 지역 교회에서 성직제도가 거의 확립되어 감독(주교, 목사)의 역할과 권위가 다른 신자들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것이고, 둘째, 다른 지역 교회들에 비해 로마 교회의 역할과 권위가 크게 신장된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나 폴리갑은 그런 감독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은 이제 교회의 여러 은사자(직분자) 중 하나가 아니라 초대교회 때 성령께서 담당하셨던 역할을 대신할 정도의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말하기를 "감독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지역교회에서 감독이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처럼 로마교회도 다른 모든 교회들 중에서 이런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로마교회는 온 세상 모든 교회의 감독과 같은 위치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회의 비중이 이렇게 커진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거기서 순교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로서 실제로 모든 면에서 다른 교회들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큰 교회였지만 100년 경에 이르러서는 로마교회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93-97년에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고린도교회에 보낸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형이 아우에게 말하는 어조로 고린도교회의 순종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로마교회는 부유하였으므로 규모가 큰 자선 사업을 시행할 수 있었으며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많은 교회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2 유대전쟁(135년)이 일어나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된 후에는 세상 어디에도 로마와 지도권을 다툴 교회는 없게 되었다. 로마는 영지주의, 몬타누스파와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서 사도신경과 신약 정경이 결정되었을 뿐 아니라 서방에서는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교회가 로마교회 뿐이었기 때문에 이단에 반대하는 모든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지도를 바랐다. 이레니우스는 185년에 쓴 그의 글에서 모든 교회는 베드로와 바울이 세운 로마 교회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초기의 교부들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은 로마교회가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다른 교회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교회가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교회라고 믿었다.


 

로마교회가 왕성할 때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약해졌다. 2세기에는 소아시아, 시리아가 제국 판도 내에서 가장 기독교화 되어 에베소, 안디옥이 유수한 기독교 중심지였다.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들 간에 부활절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 교회의 주장은 소아시아 교회들의 주장을 이기고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에서조차 로마 교회의 위상은 견고하게 되었다. 유대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지도력 쇠퇴와 2세기 안디옥 교회 및 소아시아 교회들의 쇠퇴로 말미암아 200년 경의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로마의 감독은 감독들 중 가장 우월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로마의 감독은 교황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3세기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큰 우위를 나타내고 있던 알렉산드리아나 카르타고 같은 북아프리카의 도시들도 제국의 수도 교회인 로마 교회의 지도권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13.속사도시대의 생활상

 

이 시대에 이르러 성경과 신조가 교회의 내부적 통일의 핵심이 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정치는 점점 조직화되게 되었다. 유능한 지도자와 경제적 풍부함을 지닌 대도시에는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이들 대도시 교회들은 많은 신자들을 갖게 되었다. 또 이 시대에 이르러 교회는 구원의 구심점으로써 확고히 그 위치를 세우게 되어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감독의 권위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감독과 장로가 일반 신자와 다르다는 사상이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감독이 권력이 커지게 되었으며 모든 힘이 감독에게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교회를 대표하는 지위에 섰으며 가르치고 예식을 집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특히 박해 시기에는 흔들리는 신자들과 교회를 이끌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리하여 점차 감독은 사도의 직분과 권위의 후계자라는 사상이 발달하였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는 감독에 의하여 설립되어야 하고 감독 없이는 교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당시 이미 감독이 교회의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기독교의 세계적인 대 회의는 없었다. 다만 각 지방의 대회는 있었는데 3세기 들어서서 도시를 중심으로 지방 대회가 열렸다. 카르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에서 지방 대회가 열렸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초기에만도 미디아, 알렉산드리아, 스페인의 엘베리스, 고올의 아를르에서 대회가 소집되었다.


 

교회를 잘 이끌기 위해서는 직원도 필요하였다. 속사도시대 초기에는 감독과 장로가 직제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감독은 공식적으로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며, 장로는 감독이 임명하게 되어 있었으나 회중들 앞에서 동의를 얻어 감독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점점 교회 조직이 정비되어 감독 1명에 여러 명의 장로로 구성된 장로단(長老團) 또는 수십 명의 집사로 구성된 집사국(執事局)이 있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3세기 후반에 와서는 이 조직이 더 세분화되어 안수직(按手職)인 감독과 장로단 그리고 비안수직인 집사 외에도 이들을 보조하는 하급의 직분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부(副)집사, 시송악사(詩誦樂士), 귀신쫓는 자, 성경낭독자, 회당지기, 노래하는 사람 등이었다. 감독은 지방 교회 평신도들이 선거로 선출하였고 3명의 인근 감독이 안수하였다. 장로와 집사는 교회와 교직자들이 선출하였는데 감독이 안수하였다.


 

1세기 말에 처음 시작되어 2세기와 3세기를 거치면서 키프리아누스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발달한 감독제도는 차츰 세력이 커지고 통일화되어 드디어는 세계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 정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황 정치에 있어서는 감독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그 중에서도 특히 로마 감독 곧 교황은 다른 모든 감독들보다 우위에 서며 오류가 없는 절대자라고 주장되었다.


 

로마 각 주의 대감독구 도시의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이것은 교직제도를 세우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감독(Archbishop)이란 말은 이런 특별한 대도시에 있는 감독들에게 일찍부터 쓰였던 것인데 나중에는 이것을 대주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중요한 대감독은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로마에 있었으며 얼마 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도 대감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감독은 교회 정치의 수반으로서 행정을 관리하였고 집회와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설교를 하였고 종교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장로는 일반적으로 예배에 관련된 일들을 관리하였고, 안수례를 행하였으며 신자들을 교육하였고, 종교 회의에서 감독의 상담 역할을 맡아 행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집회는 초기에는 개인 집에서 모이거나 셋집, 혹은 회당 등에서 모였으나 약 3세기에 이르면서부터는 별도의 건물을 지어서 가졌다. 회당은 직사각형 모양의 본당과 강단을 갖추었다. 모임은 주일(일요일) 집회(예배) 외에 주간 중에도 모였다. 집회에서는 사도들의 언행록과 선지자들의 글을 비롯한 성경을 읽었고 다 읽고 나면 회장이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을 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도 있었으며 성찬도 매주 행했던 것 같다. 자원에 의해 바쳐진 헌금은 보관하였다가 고아와 과부, 병들어 곤궁한 자, 옥에 갇힌 자, 나그네와 유랑민 등을 구제하는 데 쓰여졌다. 일요일에 모임을 가진 것은 그 날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날(첫날)이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기 때문이다.


 

찬송가로는 시편과 이사야 6장, 누가복음 1:46-2:29, 마태복음 21:9 등을 불렀다. 더러는 찬송가는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찬송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지은 것이다. 설교는 처음에는 단순하였으나 갈수록 정교하고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말하는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설교를 통해서 생활의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과 아울러 (거짓 사상과 이단들의 발호로 인해) 성도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설교가 웅변적이고 교리적이며 짜임새 있는 글처럼 되어갔다


 

이 시대의 교회들은 예전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서 세례 외에도 각종 절기를 지켰다. 세례의 경우 세례 받으려는 사람에게 기도와 금식,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을 치며 2년간 준비 기간을 가지게 했다. 세례는 주로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침례를 행했다. 세례는 축일에 행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부활절 전날 밤에 많이 행했다. 또 찬성과 반대 양론 속에서 유아 세례도 실시되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출생 후 되도록 빨리 세례를 베풀 것을 권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어린 아이의 세례에 반대하여 성장 후로 미룰 것을 권했다. 그러나 라틴 교회는 전반적으로 유아 세례를 시행했다.


 

절기 중 큰 절기로는 부활절이 있었는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날짜가 달랐다. 동방은 유대인의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니산월 14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유월절에 해당되는 일요일 즉 춘분 후의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일짜를 통일하기 위한 동방과 서방 간의 논의가 계속 되어 마침내 325년 니케아 회의 때 일요일에 하기로 결정되었다.


 

부활절 전 일 주일은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여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냈다. 로마에서는 주님이 40시간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을 기념하여 40시간 동안 금식과 철야 기도를 했다. 이 40시간은 나중에 니케아 회의(325년)에서 40일로 변해 사순절(四旬節)로 정해졌다. 부활 주일 전야에는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세례를 받은 이들이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했다. 부활 주일 새벽에 모든 금식이 끝나고 즐거운 오순절이 시작되었다.


 

부활절 후 50일간은 환희의 때로서 매일 만찬식을 행했고, 제40일에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제50일에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을 기념하였다. 이 시대에는 아직 성탄절의 풍습이 없었다. 헬라 교회에서는 예수의 세례 받으심과 그의 나타나심을 축하하여 1월 6일에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라는 축하 행사를 했다. 서방 교회에서 나중에 성탄절이 시행되자 주현절의 성질이 달라직 되었다.


 

당시 교회는 형제 사랑에 크게 힘을 썼고 특히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는 더욱 일치단결하여 서로 돌보았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감독 우르바누스 1세(223-230년)는 로마 전체에는 그리스도인 거지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3세기 중엽에 로마 교회는 1500명의 과부와 그밖에 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시리아, 아라비아, 갑바도기아에까지 구제금을 보내기도 했다.


 

정절을 중히 여기는 정신은 종종 다소 소극적이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타났다. 초대 교회는 결혼의 정당성과 소중함을 인정했으나 이 시대에 와서 결혼은 정욕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독신자(獨身者)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재혼은 더 좋지 않게 생각되었다. 306년 스페인의 엘베리스에서 개최되었던 지방 대회에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여자는 교회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직에 있는 자는 독신이 좋다는 사상이 점점 널리 퍼지게 되었으나 강제적 규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독신자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은 아직 이 시대에는 없었으나 번잡한 세상 생활을 피하여 혹은 박해를 피하여 산과 들로 나가서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은 더러 있었다.


 

이 시대에 신자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일반적으로 중히 여겨졌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또 순교자들에 대한 존경은 특별하였다. 그리하여 2세기 중엽부터는 이들의 유물이 존중되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무덤에서 이적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교회는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각 순교자들의 순교일에 성만찬식을 행했으며 3세기 초부터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헌물을 바치기도 했다. 순교자 다음으로는 박해를 받을 때 신앙을 굽히지 않은 수절자(守節者)가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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