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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2) - 사도시대

이상봉 2010.04.29 11:46 조회 수 : 8164

2.교회사의 시대 구분

 

1.고대교회사 (A.D.1-590)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고레고리우스 1세 (교황) 즉위까지

 

1. 사도시대 (30-100) - 그리스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시대 (100-313) - 사도 요한이 죽은 후부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3. 니케아회의시대 (313-590) - 콘스탄티누스 황제부터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 즉위 전까지

 

2.중세교회사 (590-1517) :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부터 종교개혁 전까지

 

1. 로마교회 초기시대 (590-800) - 그레고리우스 1세부터 샤를마뉴 황제 즉위 전까지

 

2. 로마교회 성장시대 (800-1073) - 샤를마뉴부터 그레고리우스 7세 즉위 전까지 (동서교회 분리)

 

3. 로마교회 전성시대 (1073-1303) -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 교황 사망까지.

 

4. 로마교회 쇠퇴시대 (1303-1517) - 보니파키우스 8세 사후부터 종교개혁 전까지.

 

3.종교개혁사 (1517-1648) : 종교개혁부터 30년 전쟁까지

 

4.근대교회사 (1648-현재)

 

1. 근세시대 (1648-1800) - 베스트팔렌조약 체결부터 프랑스혁명 전까지

 

2. 최근세시대 (1800-현재) - 프랑스혁명부터 현재까지





 

제1부 고대교회사


1.사도시대 (1-100년)

 

사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시작하여 사도들의 활동이 끝나는 때까지의 시기이다. 사도 요한이 대략 주후 98년 경에 사망한 것으로 볼 때 주님이 오신 후부터 주후 100년 무렵까지가 사도시대에 해당한다.


 

1.교회의 탄생과 성장

 

일반적으로 주 예수님은 주전 4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본다. 주님은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여 약 3년 동안 제자들을 택하여 가르치시며 무리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리던 중 주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하던 이스라엘의 기득권층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장로들과 제사장 등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혀 주후 29년경에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주님은 죽은 지 삼일 째 되는 날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그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여서 열흘동안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고 오순절이 되자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표적과 함께 강림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증거를 듣고 주님을 영접했으며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입고 힘껏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 활동 범위는 예루살렘부터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였다. 그는 아그립바 일세 때 잠시 투옥되기도 했으나 천사들로부터 건짐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소아시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교회를 핍박할 때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열두 제자 중 가장 젊었으므로 가장 오래 살아서 교회를 돌보았다. 그는 소아시아 교회의 장로였으며 많은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했다.

 

초대 교회의 조직은 매우 간단하여 교회 안에는 오직 머리이신 성령님과 몸의 각 지체인 신자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은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였으며 그들 외에 교회의 실질적 필요에 의해 몇 사람을 그 은사를 따라 일꾼(집사)으로 뽑아 봉사하게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교회에는 장로직이 생겨서 그들이 교회를 돌보고 섬기도록 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것은 유대교의 장로제도나 쿰란 수도단의 장로제도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는 2세기 초까지 대체로 비슷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의 모든 일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스스로 하였고 나중에는 성도들이 감독과 장로들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행정과 제반 문제를 관할하는 감독자 역할을 했다. 또한 교회의 경제적인 살림을 맡은 집사들이 있었고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도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이 모든 직분들은 교회의 봉사와 질서 유지를 위한 섬김의 직분이었지 계급이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를 무너뜨릴 것을 우려하여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핍박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주후 70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그 결과는 스테반과 사도 야고보의 순교로 이어졌고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있었다. 이때 많은 성도들이 흩어졌는데 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가이사랴, 다메섹 등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바깥으로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북쪽 460km에 위치한 시리아의 안디옥은 크게 번영하는 상업도시였는데 헬라, 시리아,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예루살렘의 핍박 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도시로 와서 복음을 전한 결과 이곳은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었고 초기 이방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자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곳도 이 안디옥이었다. 예루살렘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년 동안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중심지였고 안디옥은 그 다음 20년 동안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시대 교회의 생성과 성장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

 

2.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한 터를 닦음

 

3. 예수님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

 

4.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양육하심

 

5.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사도들을 비롯한 무리들에게 권능을 주심

 

6. 사도들이 도처에서 복음을 전함

 

7.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한 초대 교회가 탄생함

 

8. 유대교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각 지역으로 흩어짐

 

9. 최초의 이방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세워짐


 


2.사도 시대의 특징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처음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노력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아시아와 그리이스, 로마 등지로 퍼져나갔다.

 

2. 아주 초기의 교회는 성령님의 직접적 역사를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약화되고 그 대신 인간적 조직과 제도가 발전하여 신앙(교회) 유지의 상당 부분이 사람의 지혜와 경험에 의지하는 행태가 일반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3. 사도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다. 사도들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교회들이 거짓 무리들의 준동으로 인해 처음 진리와 생명에서 멀어져 가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4.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적 신앙의 본으로 인해 신자들의 생활이 성령 충만하고 진실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들이 가는 곳마다 큰 역사가 일어났다.


 

3.기독교와 로마 제국과의 관계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고 통일 대 제국을 수립한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매우 유용한 환경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판도 확대

 

(1) 지중해를 중심한 전 유럽과 소아시아 전 지역이 로마 영토가 됨. 이와 같이 넓은 영토가 한 정체 체제 안에 들어 있었으므로 복음이 비교적 쉽게 넓은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2) 나중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때 전 유럽을 손쉽게 복음화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서 로마를 기지로 해서 세계 전역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3) 로마 제국의 다양한 영토 안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있었으나 로마 문화는 그 모든 문화를 포용하여 하나의 통일된 문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헬라의 철학, 사상과 문화적 면에다 자신들의 법률과 질서, 조직과 같은 문화적 장점을 접목 융화시켜서 훌륭한 새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로마의 특성 중 하나는 이처럼 여러 문화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능력이었다. 이로 인해 복음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여러 민족들에게 큰 거리낌 없이 전파될 수 있었다.

 

2.교통의 편리

 

로마를 중심으로 각지로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망이 있었기 때문에 도시간의 왕래가 편리하였다. 그리고 여행자의 안전도 전보다 훨씬 잘 보장되었다. 또 수로도 개발되어 육로와 수로를 통하여 무역과 여행이 자유롭게 되었고 우편제도와 화폐제도도 확립되었다. 이로 인해 전도 여행, 문서 전달, 성도 개인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동하는 많은 군대들과 여행하는 상인들, 팔려 다니는 수많은 노예들의 왕래는 도처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수단이 되었다.

 

3.언어 통일

 

제국 내의 언어가 헬라어와 라틴어로 통용되어 전도에 크게 도움이 됨. 라틴어는 표준 공용어였지만 로마가 헬라문명을 계승했기 때문에 헬라어는 상인들과 일반 시민층에서 여전히 많이 사용되었다.

 

4.군제통일

 

로마 군대는 군율이 엄하고 잘 훈련된 군대였다. 이 훈련된 군대는 제국 내의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이나 소요에도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로마의 잘 발달된 법률과 조직, 군대를 통한 훌륭한 치안 유지의 능력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모든 영토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전쟁이나 사회적 혼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은 복음 증거에 큰 도움이 되는 환경이었다.

 

5.유대인의 분산

 

로마 제국 시절이나 그 이전의 헬라 혹은 바벨론, 페르시아제국 시절에 많은 유대인들이 핍박이나 상업적 목적, 기타의 이유로 이스라엘 밖의 다른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고 분산되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이방에 퍼진 이러한 유대인(디아스포라)의 숫자는 본국 내 유대인의 5, 6배나 되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제일 많았고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에까지 골고루 퍼져 있었다. 그들은 민족성이 강한 데다가 배타적이라 이방인들이 싫어했으나 상업술이 능하고 도덕심, 선교열이 강해 이방 관리들이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 회당(시나고그)를 세워 구약을 연구하였으므로 복음 전도의 좋은 접촉점을 제공하였다.

 

6.도덕적 타락

 

로마가 전대미문의 대제국을 이루어 오랫동안 평화롭고 부유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 이하 대다수의 국민들이 갈수록 교만하고 사악하고 부도덕한 생활에 빠져들고 있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과 종교 또한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다. 로마인들의 신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대체로 음탕하고 저급한 것이었다.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많았다. 복음이 전파될 당시 로마에는 노예 매매가 성행하고 있었고 검투사를 양성하여 서로 싸우게 하거나 맹수와 싸우게 함으로써 피를 보기를 즐겨하는 잔인하고 포악한 풍속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가정에서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는 등 사회의 내적 안정을 해칠 정도로 도덕적 문제가 심각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신이나 종교가 그들 영혼의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택하여 하나의 통합된 수준 높은 종교를 가지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사회적으로 만연한 도덕적 타락은 로마인들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죄의식을 갖게 하였고 거기서 벗어날 구원의 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7.저질적 종교의 횡행

 

로마의 종교 상태는 한 마디로 불확실하고 복잡했다. 로마 제국의 지식층들은 범신적 일신교로 기울어져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선한 신이 세상을 다스리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것을 믿고 있었으나 일반 민중들은 미신적 잡신에 빠져 온갖 우상들을 다 섬기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로마 지도층은 그것을 타파하지 않고 대신 황제와 국가 숭배를 요구함으로써 신을 섬기더라도 민중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밖에 헬라 철학도 사람들에게 종교적 영향을 미쳤는데 헬라 철학은 주로 사람들에게 신비적 종교 체험, 동물 희생, 미래에 대한 소망, 미에 대한 경배 등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잡신 숭배나 황제 숭배, 헬라 철학적 종교 행위가 민중들의 영적 갈증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정한 생명의 종교를 갈망하게 되었는데, 마침 당시에 나타난 기독교가 자기들이 찾던 생명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임을 차츰 알게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8.철학 사상의 발달

 

(1) 스토아 철학 (Stoicism) - 이 철학은 로마 고유의 것이 아니라 옛 이방의 고상한 윤리 사상이었는데 기독교와 비슷한 점도 있고 배치되는 점도 있었다. 제노, 클레안데스, 세네카, 에픽테투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등이 그 철학자였다. 스토아주의는 유교처럼 종교라기 보다는 윤리사상이었다. 이것은 엄격한 금욕주의 , 만물을 통할한다는 로고스론, 최선을 다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칭송을 받을 것이라는 만민동등주의, 만인형제사상 등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사상은 기독교 사상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2) 에피쿠로스파(Ephicurianism) - 이 사상은 인간의 최고선은 쾌락이라는 주장으로 쾌락주의라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그들이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쾌락이다. 그들은 참 행복 유데모니아는 외부의 물질과는 관계없는,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 평온한 정신 상태라고 했다. 에피큐로스는 사람의 최고 목적은 마음의 행복인 바, 번뇌없는 수동적 상태에서만 그것을 얻을 수 있으므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플라톤 신 플라톤주의 - 영구한 참 지식은 보이는 '현상'에서 얻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데아' 곧 정신적 세계에 있는 영구 불변의 우주적 원형에서 얻을 것이라고 했다. 플로티누스(A.D.205-270)의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나왔다. 2세기 후반부터는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신학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사상은 범신론 무신론으로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4. 사도 바울

 

1.생애

 

(1) 출생 : 길리기아 다소 (Stoicism의 중심지)

 

(2) 가정 : 순수 베냐민 지파, 귀족이며 재산이 많음, 유대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

 

(3) 교육 : 전통적 유대인 가정 교육을 받고 예루살렘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바리새주의를 수학함

 

(4) 회심 : 기독교를 분쇄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회심하게 됨. 아라비아에서 얼마를 보낸 후 전도자로 나섬

 

(5) 죽음 :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함

 

2.활동

 

1.제1차 전도 여행

 

출발지 - 안디옥

 

동행자 - 바나바

 

여행지 - 구브로,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결과 - 바울이 후에 갈라디아라고 부른 소아시아 남부 지역에 교회들을 세움.

 

2.예루살렘 회의

 

동기 - 이방인의 할례 문제

 

결정 - 할례에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 얻음.

 

3.제2차 전도 여행 (약 A.D. 49-53년)

 

전도 여행 중 음식 문제(갈2:11-14)와 마가 문제(행15:36-41) 때문에 바나바와 의견 충돌이 생겨 헤어지게 된 바울은 로마 시민이자 예루살렘 교회 형제인 실라를 데리고 전도 여행에 나섰다. 갈라디아 지방을 지나던 중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데모데를 만나 동행케 했다.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섭리(환상)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게도냐(유럽)로 들어간 일행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전도를 했는데 그 때 두아디라성 출신의 여인 루디아 등을 건졌으나 시 당국과의 마찰로 인해 전도가 중단되었다. 옥에 갇히게 된 일행은 간수를 회심케 한 후 로마 시민의 특권을 내세워 석방되었다. 빌립보교회는 유럽 최초의 교회였고 바울이 아끼는 교회로서 바울에게 공적으로 재정 지원을 한 거의 유일한 교회였다.

 

그 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갔으며 거기서도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회심자를 얻어 교회를 세웠다. 데살로니가에 체류하는 동안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생계를 충당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의 사주로 인한 핍박이 있었으며 거기서 쫓겨난 바울은 베뢰아에서 사역하도록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혼자 아덴(아테네)으로 떠났다. 아테네는 고대 문명의 중심지이자 헬라 철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세상 종교와 철학으로 가득 채워진 아덴 사람들의 마음에는 복음이 들어갈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실망한 바울은 방탕한 대도시 고린도로 건너가서 18개월 간 전도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어서 고린도는 물론 인근 도시들에까지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은 에베소까지 동행했던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에게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후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후 작별했다.(행18:22)


 

4.제3차 전도 여행 (약 A.D. 54-58년)

 

안디옥으로 돌아온 지 몇 달이 못되어 세 번째 전도 여행길로 올랐는데 그는 우선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을 굳게 한 다음(행18:23), 에베소로 가서 거기 정착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아시아주(州) 수도(首都)인 큰 도시였다.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2년 이상 계속 되면서 아시아주 전체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행19:1-20) 그러나 바울은 로마와 그밖의 지역(스페인 등)에도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3년의 에베소 사역을 끝내고 여러 이방인 출신 형제들을 대동하고 마지막 예루살렘행 길에 올랐다.


 

5.로마행

 

유대인의 율법과 성전의 신성을 범하였다(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피소됨

 

가이사랴에 3년간 수감되었다가 로마로 호송되었고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파선됨

 

로마에서 수년간 전도의 기회를 가짐


5.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1.네로(Nero)의 박해 (54-68)

 

(1) 원인 - 로마의 대화재 사건. 64년 6월 18일 발생함. 이때 로마의 14구역 중 3구역이 전소되고 7구역이 반소됨

 

(2) 죄명 -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의 방화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움.

 

(3) 처형 방법 - 맹수에게 던짐, 십자가에 못 박음, 화형시킴

 

(4) 순교자 - 바울과 베드로를 비롯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5) 네로의 최후 - 국민의 신망을 잃고 원로원 결의로 퇴위, 68년에 자살

 

2.도미티아누스 (Domitian)의 박해 (81-96)

 

(1) 원인 - 황제 예배 불복 : 도미티안은 자기를 스스로 '主와 神'이라고 주장하며 모든 제국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를 경배하도록 했는데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박해를 시작함

 

(2) 죄명 - 기독교도 때문에 로마제국의 모든 신이 진노했다는 죄명

 

(3) 처형 방법 - 재산 몰수, 추방, 맹수에게 던짐

 

(4) 순교자 - 황제의 4촌 동생 등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5) 카타콤 -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에서 예배드림. 이후 이곳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파수 무대가 됨




 

6.예루살렘 멸망과 영향

 

1.멸망전 상태 (멸망의 원인이 되는 배경)

 

1.로마의 압정(壓政)

 

가이사랴 총독 펠릭스(51-62, 행24:26)와 알비누스(62-64)의 지나친 탐욕과 압정이 있었다. 개인 재산과 공공 재산을 빼앗아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고, 뇌물 만능, 황금 만능 풍조의 영향으로 관직이 돈으로 매관되는 등 부정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2.백성의 강포(强暴)

 

로마의 압정으로 인해 백성들도 강포해졌다. 감람산에 4천 여명의 폭도가 모여 로마에 대해 저항 민란을 일으킴. 이 중 4분의 1이 죽고 다수가 포로 되었다. 유대인들은 대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선동하기 쉬웠다. 이로 인해 로마는 유대인들을 주시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3.제사장들의 부패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하였는데 그 대표적 예가 대제사장 아나니아였고(행23:3), 그 중에는 무능하고 지도 역량이 부족한 자들도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엘르아살이었다.


 

2.멸망의 직접적 원인

 

헬라인들이 유대인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없다는 주장을 했을 때 로마 정부가 이것을 인정하자 이에 격분한 가이사랴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 예루살렘에서도 로마에 대해 전쟁으로 맞서자는 主戰派가 득세하여 로마 군영을 습격하여 많은 군인들을 죽였다.


 

3.멸망의 과정과 결과

 

가이사랴에서 로마군에 의해 유대인 2만명이 살륙을 당했다. 또 수리아 총독 갈루스(Gallus)가 3만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6만 명의 군대를 주어 예루살렘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태에서 네로의 자살로 군대가 일시 귀환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70년 4월 십만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여 고립시켜 놓음으로써 성중 유대인들이 식량부족으로 무너지도록 압박을 가했다. 그 결과 70년 9월 8일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성은 파괴되고 성전은 방화되었으며 110만 명의 죽었고 포로가 9만 7천명 정도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회당 안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각처로 흩어지게 되었다.


 

4.예루살렘의 멸망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

 

1. 유대교의 총본산이 함락됨으로서 기독교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 복음 전도 활동이 더 이상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뿌리를 뽑으려 하던 유대교가 터전을 잃음으로써 이때부터 기독교가 점점 득세하여 나중에는 유대교를 능가하게 되었다.

 

2. 예루살렘에 거하던 그리스도인들이 각지로 흩어지게 됨으로써 복음 전파가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3.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초기 증인들이 많이 죽거나 없어지게 되어 증거 자료(성경)의 필요성이 증대됨으로 정경(Canon) 형성이 촉진되게 되었다.

 

4.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의 본산이던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들의 신앙 거점과 터전을 어느 정도 상실한 셈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앙의 거점과 구심점이 되는 교회를 조직화 체계화하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교회는 점점 제도화 조직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7.사도들의 종말

 

1. 야고보 : 예루살렘에서 아그립바 1세에게 순교당함 (44년)

 

2. 베드로 : 로마에서 순교당함 (64년)

 

3. 바울 : 로마에서 순교당함 (67년)

 

4. 야고보 (주의 동생) : 예루살렘에서 순교당함 (62년)

 

5. 유다 : 수리아에서 전도함

 

6. 안드레 : 러시아 남방 시티아에서 전도하다가 죽음

 

7. 마태 : 페르시아와 에디오피아에서 전도함

 

8. 시몬 :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힘

 

9. 도마 : 수리아와 인도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

 

10. 바돌로매 : 아라비아에서 전도하다가 가죽이 벗겨져 죽음

 

11. 요한 : 밧모섬에서 유배, 100년 경에 죽음




 

8.사도 시대의 교회 집회와 생활상

 

1.직원

 

초대교회는 2 세기 초까지 사도들과 교사와 예언자들의 지도를 받았다. 사도들은 복음을 증거하여 교회의 기초를 쌓는 역할을 담당했고 교사들은 각 지역교회에서 사도들의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장차 닥쳐올 일이나 사람들 안에서 일어난 일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다. 교회는 이들 은사(직분자)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깨달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사도들은 사도 시대에만 국한한 존재였으며 그들이 죽은 후에는 그들의 역할을 교부들이나 감독들이 맡게 되었다.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인데 사도들에 의해 각 지역교회들을 돌보도록 세워진 자들이다. 장로란 명칭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 말이고 감독이란 명칭은 헬라 전통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다수인 교회에서는 장로란 명칭이 많이 쓰였고 이방인들이 다수인 교회에서는 감독이란 명칭이 일반적으로 쓰였다. 또 장로 외에서 집사가 있었는데 이들은 교회의 재정 관리와 구제 업무를 맡아 봉사했다.

 

2.집회와 의식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 개인의 집 등이었다. 그것은 당시에 오늘날처럼 교회 전용 집회소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집회는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안식 후 첫날) 두 날에 모였다가 나중에는 점차 주일로 단일화 되었다. 안식일 후 첫날을 주일(Lord's day)로 삼은 것은 그날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에 적합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모임의 내용과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① 성경 낭독 - 구약과 사도들의 서신, 주님의 교훈을 주로 읽었다. ② 강론 - 회장의 권면이 있었고 설교와 예언이 행해졌다. ③ 기도 - 사회자의 공고로 기도가 행해졌는데 금식 기도와 회중 기도도 있었다. ④ 찬송 - 시편 및 성경 내용 중에서 가사를 발췌하여 노래했다. ⑤ 성찬 - 집회 2부 순서로 성찬이 행해졌다. 1부 모임에는 아무나 다 참석할 수 있었으나 2부 모임에는 세례 받은 사라만 참석할 수 있었다.

의식으로는 세례와 성찬이 있었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침례를 행했으나 병자 혹은 물이 없는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적시는 약식 세례도 행해졌다. 세례의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세례자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 고백적 의미, 둘째, 세례자와 그리스도가 생명의 관계를 맺고 일체화된다는 의미, 셋째, 세례자가 세상에 대해 죽었으며 세상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만 천하에게 공포하는 의미 등이다. 세례 후 성령강림을 바라는 안수도 행하였다.

성찬은 매주일 모임 때마다 행하여졌다. 세례 받은 자만 참여할 수 있었고 기도로 떡과 잔을 받아 먹는 형식으로 시행되었다.

 

3.신자들의 생활의 특징

 

1.성령충만한 삶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었고 주님의 삶을 본받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성령을 의지하는 정도가 오늘날보다 훨씬 강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누렸으며 그로 인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많이 행사했고 복음 증거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더러는 신앙이 知情意 중에서 감정쪽으로 치우쳐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2.재림의 확신

 

확고한 재림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잘 참았으며 박해를 이겨내었다. 그러나 세상사에 대한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정치 개혁이나 사회 개선, 정의 사회 구현 등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3.사랑과 덕이 있는 생활

 

지위 고하,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서로 사랑하며 교제했다. 주인과 종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봉사활동을 할 정도였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졌다. 또 주님의 행위를 본받아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았다. 특히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교회 안에서는 여성(부인)의 지위가 세상보다 현저히 향상되었다.

 

4.거룩한 삶

 

고대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일부다처제를 철저히 배격하고 바른 가정생활을 하려고 애썼다. 또 세상적 쾌락과 탐욕을 배격하다보니 금욕주의적 경향을 띤 신자들이 많았고 육식을 하지 않거나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홀로 사는 독신자들도 많이 생겼다. 음주와 음란한 행실을 배격했다.

 

5.질서를 위한 징계의 시행

 

교회의 순결을 위해 범죄하는 신자들에 대해서는 징계가 따랐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충고했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다음에는 회중들 앞에서 징계했다. 매우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일시적으로나 영구히 추방했으며 형제들로 하여금 그 사람과 교제를 하지 못하도록 단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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