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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명기 1장


1.열 하룻길을 40년에 걸쳐 행함 (1:2)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1:2)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오늘 신약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도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 이처럼 느리고 진보 없음을 지적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 주님을 배우고 따르는 길에 있어서 속도가 이처럼 한없이 느리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수치스런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기쁨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갈 만한 믿음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부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을 믿지 못한 채로 적당히 하나님과 동거하게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마땅히 배워야 할 진리를 온전히 배우기까지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열 하루만에 갈 수 있는 길이라도,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속히 갈 수 없다면 40년이 걸려서라도 '하나님 믿는 것을 배워서' '반드시 믿음을 가지고' 가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사람'이다. 가나안에 사람이 없어서 이스라엘을 부른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들이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 그 땅을 채우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11일이면 될 것을 40년 걸려서 배운다 할지라도 하나님 믿는 것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뒤는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갔다. 만일 바울이 가나안의 약속을 받고 달려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는 남들이 열 하루 걸려 가야 할 길, 아니 믿음이 없어서 40년이 걸려서 간 길을 아마도 일주일 이내에 돌파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그의 열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0-14) 이러한 그의 믿음과 태도가 그의 생애를 이러한 고백으로 마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이것은 40년이나 걸려서 온 길을 두고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는 선언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와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2.하나님의 말씀을 다 고함 (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고하였으니"(1:3)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할 소명을 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그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은혜와 복음 진리를 전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자아(自我), 복음과 인간의 사상, 은혜와 율법, 믿음과 자기 행위(공로)를 뒤섞어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모든 사람들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이고 순전하고 지극히 명료하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바울은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5) "우리는 수다(數多)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混雜)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모호한 말씀을 하시거나 '네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를 참으로 주목하는 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성경을 통하여, 기도의 응답이 될만한 내적 깨달음과 환경적 역사를 통하여, 형제들의 가르침과 판단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 주신다. 우리는 다만 그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된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나 백성들 가운데서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라고 말할 때 하나라도 자기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한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산에서 보이신 식양대로 또는 그에게 명하신 말씀대로 모든 것을 다 처리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글로 새긴 율법'은 더 이상 없으나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의 모든 삶을 완벽하게 규정하시고 인도하시고 통제하신다. 우리 삶은 오직 그의 그러한 인도를 철저히 순종하며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전할 때도 그렇다. 특히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과 계시의 말씀을 철저히 의지하여 담대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을 전해야 한다. 만일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 용서를 명하시면 우리는 아무리 그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라고 하시면 우리는 아무리 입이 떨어지지 않아도 그의 죄를 분명하고 강력하게 지적하며 책망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보태거나 빼는 것은 종의 자세가 아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든다. 일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의 종이요 그의 역사(役事)의 통로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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