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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재판 시에 유의해야 할 원리 (1:16,17)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1:16,17)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재판관이나 장로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을 판단하고 그 영적 상태를 진단하여 돕거나 멀리하거나 혹은 배우거나 가르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항상 있는 일이며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비판하고 정죄하거나 선생 노릇하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때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가르치며 지도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바로 모세가 한 위의 말씀에서 그 원리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형제들 혹은 다른 사람들 간에 있는 문제를 대하게 될 때, 먼저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우리 자신이 그 문제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일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세는 가장 지혜롭고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 바로 그렇다. 우리는 단지 죽을 인생이요 무지한 죄인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제 앞길도 보지 못하는 캄캄한 소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째 원리는 모든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정확하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의뢰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참으로 다른 사람을 분별하며 사정을 알며 그리하여 그를 돕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를 판단하고 헤아리는 자리에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을 절대적으로 취해야 한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사건을 대할 때 우리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느낌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마음의 편견과 주관적 감정을 버리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공의(공평한 정의)로 그것을 대하도록 해야 한다. 양편의 주장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 우리는 반드시 양편의 말을 진지하게 다 들어야 하며, 나와 상대방의 개인적 친소(親疎) 관계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명백한 사실과 증거에 의해서만 진실을 판단해야 한다. 친소(가깝고 먼) 관계뿐 아니라 '귀천(貴賤)'도 똑 같이 여겨야 한다. 죄는 영리한 자나 우매한 자나 똑 같이 짓는 것이며, 부유하고 존귀한 자나 가난하고 비천한 자나 똑 같이 짓는 것이다. 영리한 자는 영리한 방법으로 죄를 짓고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죄를 짓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교회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그 생명과 실제를 따라 좇지 않고 외모로 좇은 데 기인(起因)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그 실제대로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보지 못하고 아름답고 그럴듯한 그것의 외모를 따라 봄으로써 그것을 분명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받아들이며 타협한 데 기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의 판단을 따라 즉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멸망 받을 도성 바벨론(세상)을 새 예루살렘(하나님의 나라)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속은 추악하고 더럽지만 겉은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있으며 손에는 아름다운 금잔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지만)


 

교회사의 이대(二大) 실패는 '형제를 형제로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한 것'과 '세상을 세상으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것과 연합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외모로 보기 때문에 외모는 좋지 않으나 속은 신령한 형제들을 거절하는 일이 흔히 있으며 반대로 외모는 그럴듯하나 속은 형편없는 사람들 곧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과 실제가 없는 사람들, 말과 지식은 그럴듯하나 실제가 없는 사람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체의 열심과 자랑을 따라 선한 행위를 나타내는 사람들을 우대하고 따르는 일이 흔히 있다. 이것은 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대하는 것은 자기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대리인) 입장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의 낯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그 말을 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므로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일부러 무정하게 대하거나 박대해서도 안되지만 어떤 사람을 얻기(잃지 않기) 위해 그의 체면을 살려 좋은 말만 해주거나 면책(面責)을 하지 못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피차에 가장 좋은 일'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27:5)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우선은 좋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판단하고 말해주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요 가장 좋은 길이다.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그들이....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겔33:7-9,32,33)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하거나 말을 전하는 자리에 서 있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즉 그는 자기의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에 조금도 구애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깨닫게 하시고 말하게 하신 그것을 따라 판단하고 말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그는 하나님의 사자(대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요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일하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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