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4.유사(有司)를 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1:9-15)


"나는 홀로 너희 짐을 질 수 없도다....그런즉 나 홀로 어찌 능히 너희의 괴로운 것과 너희의 무거운 짐과 너희의 다툼을 담당할 수 있으랴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들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1:9,12,13)


 

모세가 백성들 중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들을 택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의 유사(재판관, 관리의 역할을 하는 중간 지도자)로 세운 것은 자기 혼자 백성들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는 끊임없이 '다툼'과 '괴로운 일'들이 발생했고 그것은 모세에게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분쟁과 다툼과 문제가 계속 발생한 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라는 기대와 소망, 그리고 속히 거기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의 발걸음은 괴롭지 않고 즐거웠을 것이다. 무릇 합격통지서를 받으러 가는 자의 발걸음이나 당첨된 복권의 당첨금를 받으러 가는 자의 발걸음은 가벼운 법이다. 그런 사람은 혹 가는 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발을 밟히더라도 그다지 짜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약속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다(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미 받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챙기러 가는 사람들이다. 가나안 복지에서의 새로운 삶은 장차 힘써 쟁취해야 할 미래의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이미 확증되고 보장된 것이다.


 

아니 미래(가나안)의 새 삶은 고사하고 현재의 그들이 이미 확보해 놓은 자유와 해방을 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들 안에서는 아무 불평이나 원망과 다툼이 나오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얼마 전까지 애굽에서 죽지 못해 사는 고생스런 종살이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의 이러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실상을 볼 줄 아는 눈이 없었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지식이 없었다. 그들이 왜 애굽에서 살게 되었는지, 그들이 왜 애굽에서 나와야 했는지, 또한 그들이 어떻게 애굽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장차 어떤 삶을 살도록 약속 받고 보장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재 그 복된 땅으로 인도되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며 감사할 줄 몰랐다.


 

이스라엘이 본래 가나안에 살다가 애굽에서 살게 된 것은 그들을 기근 가운데서 건지사 큰 민족이 되도록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을 섬겨야 할 택함 받은 백성인 그들이 하나님 없는 곳이요 우상 숭배하는 곳인 애굽에서 더 이상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을 일으키사 그들을 고역(苦役)과 고통 가운데 두셨고 그 가운데서 모세를 보내사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아래서 그들이 본래 살던 땅이요 조상에게 약속된 영원한 그들의 기업(基業)인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유념했다면 이스라엘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로 불평과 원망과 다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으면 그들 안에서는 감사와 찬양, 인내와 양보, 서로 돌아봄과 격려가 나왔어야 마땅했다.


 

오늘날 교회 생활을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는가? 신약 교회는 광야 교회보다 훨씬 큰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의 실제를 이미 누리고 있다. 물론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에서도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라 천국으로 가는 길, 성령님과 함께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 길에도 약간의 불편함과 고난은 따른다. 그러나 광야 길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 만나 등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성령님을 통하여 더욱 완전하고 완벽하게 우리를 돌아보시며 인도하고 계시므로 다만 우리가 그를 의지하고 담대히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불평과 다툼을 반드시 일으키게 할만한 그런 문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을 따르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주님은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의 온 힘을 마귀를 대적하고 그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에 쏟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그 자리 곧 자기 부인(自己否認)으로 인한 승리를 추구하는 그 절박한 영적 전쟁의 자리에서 엉뚱하게도 자기들 중에서 '누가 큰 자이며 장차 누가 더 크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으로 다투고 있었다.(막10:35-45, 눅22:24-32) 사도행전 6장은 초대교회 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헬라파 신자들과 히브리파 신자들 간에 구제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들은 이 일로 인해 그들이 수행해야 할 본래적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결국 교회의 무거운 짐들을 나누어지게 될 7명의 집사들을 세우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교회든 어디든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믿음이 없어서, 성령을 의지하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다툼과 괴로운 일들로 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게 되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게 되는 것은 면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신(구원하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간과 힘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 곧 그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서 쓰여져야지 우리 자신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허비되어서는 안된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