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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명기 2장


1.에돔 등과 다투지 않음 (2:1-19)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에돔과 모압 암몬 족속의 땅이 있어서 그들을 거쳐야 한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고 모압과 암몬은 각각 롯의 아들 모압과 암몬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이다. 약 이 백만이나 되는 큰 무리가 이들 작은 지역을 통과하다보면 그 땅 거민들에게 물질적인 피해와 심리적인 부담(두려움) 등 여러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이스라엘에게 그 땅들을 통과할 때 절대로 그 원주민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투거나 땅을 빼앗지 말라고 일러두셨다.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신2:5,6)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2: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2:19)


 

그러나 가나안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들 곧 이스라엘이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있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똑 같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아니다. 같은 길목에 있었지만 바산과 헤스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을 때 에돔과 모압 등이 그렇게 했듯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에돔과 모압 등과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바산과 헤스본이 길을 막으면 그들을 쳐부수고 행군을 강행하라고 명하셨다. 바산과 헤스본은 에돔이나 모압 등과는 달리 가나안 족속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이 싸우기 힘든 대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조금도 보호하시거나 배려하시지 않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다 쳐부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같은 통과 길목에 있는 나라들 중 바산이나 헤스본 같은 나라들에게는 전혀 호의를 베푸시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에돔이나 암몬 등에게는 호의를 베푸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들 나라가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형제 나라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서와 모압과 암몬에게 일정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즉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29)


 

에서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는 이스마엘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스마엘에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다중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창17:20,2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창21:12,13)


 

에돔이나 모압 암몬을 배려하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조치였다. 그러나 에돔이나 모압 등의 나라들이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알고 화답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약속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형제의 위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형제라는 생각도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은혜를 베풀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에돔 왕에게 '우리가 당신들에게 아무 피해도 끼치지 않을 테니 우리로 당신들의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단호히 거절했다.(민20:14-22) 결국 이스라엘은 에돔을 비켜 먼 길로 돌아서 가나안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압은 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망하게 하려고 거짓 선지자 발람을 사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발람의 사주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에 참여케 하고 음행케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큰 시험에 빠뜨렸다. 그러므로 이들 나라에 대한 보호와 배려는 그들의 상태나 그들의 태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일방적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백성과는 실질적으로 전혀 무관한 이들에게 제한적이지만 일정한 은혜를 베푸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을 보존하시는 것이다. 아예 아브라함과 무관한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아브라함에 속하고 이삭에 속하기는 하지만 '야곱(이스라엘)에게는 속하지 아니하는' 다른 족속들 곧 약속의 백성이 아닌 나라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 이스라엘'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런 형제 나라들을 보존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에서의 새 생활은 애굽에서의 과거 생활과 어떤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가? 차이는 토질이나 자연 환경의 차이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이 깃들여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만일 자연 환경 문제라면 이스라엘의 생활과 그 주변 에돔이나 암몬의 생활이 같아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실제 삶은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의 삶은 무엇에 좌우되었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안은 잘 살았고 그렇지 못한 동안은 징계를 받아 기근과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유익과 관련하여 에돔이나 암몬을 보존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로 이스라엘의 몽둥이를 삼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그들은 형제 간의 경쟁심 같은 것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는지 언제나 이스라엘을 시기하며 괴롭히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좋은 징계 도구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에돔과 암몬 등의 나라를 배려하신 하나님의 행동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 나라들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습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시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도 나중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방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마땅히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이다.


 

그렇다면 바산과 헤스본 또는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한 가나안 원주민들은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보존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왜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생명만 아끼고 그들의 생명은 아끼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암을 두고서는 생명이 온전히 보존될 수 없듯이 죄를 두고서는 인류의 삶은 궁극적으로 보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죄와 관련하여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은 매우 단호하시다. 가나안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처리되고 제거되어야 할) '죄의 주체'(sin-maker)라는 차원에서 다루심을 받았다. 에돔이나 암몬 등에게도 물론 죄가 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게 될 땅에 있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므로 죄악된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그들 존재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대한 경계의 의미로 반드시 먼저 단호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지 않고 도려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원주민들뿐 아니라 궁극적으로(세상 끝날에) 모든 죄인들을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냉정하게 멸망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그의 생명을 받지 못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땅에서 그 모든 죄인들이 단번에 다 죽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기회를 얻고 있다. 그러므로 에돔이나 암몬 등은 단지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만 보존되거나 이스라엘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만 보존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점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즉시 심판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들이 구원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무정하게 대하시거나 미워하신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지 죄를 미워하고 사탄을 미워하실 따름이다. 사람들이 이런 미혹의 자리, 타락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때는 잘못된 삶의 틀을 단호히 깨시며(가나안 원주민들을 심판하신 것처럼)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죄인들에 대해 엄하게 다루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를 믿고 의로운 삶을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명이 붙어 있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을 이해하고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이나 모압 지경을 지나갈 때 그들과 다투지 말도록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남에게 폐를 끼칠 필요가 없는 부유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신2:5,6)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값을 지불하고 모든 것을 사 먹으라고 하셨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요 광야 40년의 긴 방랑을 거친 그들에게 무슨 돈이 있어서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과 항상 함께 계셨으며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40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2:7)


 

하나님은 처음부터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이스라엘에게 큰 은혜를 베푸사 많은 것들을 챙겨 나올 수 있도록 하셨다.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1:2,3,12:36) 또 이런 방법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스라엘을 부유하고 넉넉한 상태로 만드실 수 있었을 것이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항상 드리우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솟는 생수를 공급하시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삶의 필요를 아시며 그것을 채우시는 아버지셨다.


 

이스라엘이 에돔과 다투지 않으며 심지어 헤스본처럼 하나님이 보존코자 약속하신 땅이 아닌 땅을 통과할 때도 최대한 피해를 끼치지 않고 통과하고자 하는 여유를 보인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대로 적용될 원리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꾸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도리어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고 주며, 달라는 대로 줄 뿐 아니라 달라는 것보다 더 주는 자이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갖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0-42)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을 돕고 섬길 때도 즉 나가서 전도하고 선행을 할 때도 그 대상이 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 도움도 청하지 않는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마10:9,10)


 

왜 그렇게 하는가? 부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로 모신 백성은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만 그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된다. 전도자들의 경우 일은 세상에게 하지만 일의 대가(?)는 하나님에게서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공급받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형제가 아닌 세상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세상에 빚지게 하는 일이다. 세상에게 동정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난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임금(마귀)보다 못하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고 오직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 곧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감사함으로 무엇인가를 자발적으로 공궤하는 사람에게서만 무엇을 받았다.


 

우리 인생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행 길과 같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가는 동안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우리 길을 가로막고 반대하는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세상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거기에 협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에돔과 모압 땅을 거쳐야만 했지만 그들이 거기에 협조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어떤 때에는 꼭 이런 저런 세상 사람들의 협조와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결코 돕지 않는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반대 세력과 방해 세력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들로 인해 마음이 상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본래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건설되는 것이지 마귀와 그 졸개들의 도움을 받아서 건설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초부터 세상의 도움과 협조를 받음으로 주님을 쉽고 편하게 따르겠다는 생각 따위는 갖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도할 때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는 우리 삶을 세상에다 의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한, 세상(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것 없이 홀로 모든 삶을 꾸려갈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돈을 사랑하고 돈에 벌벌 떨며 생업과 직장에 목을 매달고 또한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과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세상의 사람과 물질을 의지해서는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는 돈과 직장과 사장님과 고객들과 물건들로 인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5,6)


 

이스라엘은 결코 에돔이나 모압이나 암몬을 칠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로부터 무엇을 뺏거나 훔칠 필요가 없었다. 도리어 이스라엘은 그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증거하며 나누어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비록 외형적으로 볼 때 가난하고 작고 힘없는 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무궁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다투어서는 안된다. 약간의 이익을 위해 꾀를 내고 속이고 불법을 저지르는 쪽은 언제나 세상이고 우리는 차라리 그것으로 인해 속임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쪽이어야 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남을 속일 필요가 없으며 남의 것을 탐내거나 뺏을 필요가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풍성으로 풍성케 된 자들은 남과 다툴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 빠듯한 사람, 자기가 애써서 삶을 확보해야 하는 사람이 무엇을 놓고 남과 싸우지 모든 것이 넉넉하고 남아도는 사람은 남과 싸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처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가난하고 비천한 자리에서 부르셨지만 그와 함께 사는 동안 그 아들의 무궁하고 풍성한 생명으로 인해 우리를 계속 부유하게 하신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7-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6상)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을 지나면서 돈 주고 밥과 물을 사 먹으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어떻게 환난과 핍박과 가난 가운데서 모든 사람에게 항상 관용(여유)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바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하)라는 이유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항상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넉넉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여유는 우리 자신의 어떠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으며 우리를 돕는다는 데 근거한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아버지도 재산도 없는 길거리의 고아와 같다. 그러므로 여유를 부리고 싶어도 부릴 건더기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그것들 곧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사람들의 칭찬과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그들에게서 이런 것들이 없어진다면 그들은 단번에 쓰러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질 것들로 인해 세상과 다투어서는 안된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방해하고 어떻게 괴롭히고 무엇을 요구하든지 그것이 진리를 가로막고 우리 생명을 훼방하는 것만 아니라면 다 받아주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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