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따름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3-16)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그의 여러 서신을 통하여 보여주려고 애쓰는 핵심적인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결코 종교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생활 속에서 체험하며 누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종교는 처음에 다 사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는 예외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유대교도 사람의 종교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안에 있던 율법과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 제도와 안식일과 각종 절기와 의식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물론 그것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율법과 율법의 제도 역시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목적)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주신 것이지 어떤 종교 생활을 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그 형태와 모양이 어떤 것이든 간에 다 하나님을 알고 누리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의식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지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서의 '유대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릇된 시스템이었다. 율법은 거룩하고 가치 있는 것이나 율법을 구원의 방편이나 인간을 자랑하는 방편으로 삼는 유대인들의 삶의 태도(유대교)는 그릇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유대교의 큰 문제점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의식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전통들로도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율법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므로 사람의 생각과 자랑이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유전(遺傳) 곧 전통이라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과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처음에는 전통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받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거의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받들고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언제나 그랬다. 특히 그 전통이라는 것이 율법이나 복음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말씀을 귀히 받드는 데서 생겨난 부산물이거나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서 생겨난 것인 경우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기 마련이었다.

바울 역시 이러한 조상들의 전통에 매우 충실하고 열심인 사람이었다. 그는 충실한 종교인이었다. 충실한 종교인은 겉으로 보면 그가 믿는 신을 충실히 위하는 자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가 믿는 종교의 원리에 충실한 자이다. 그러므로 열렬한 종교인은 알고 보면 자기가 섬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알라신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신과 관련되어 있는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열렬히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교라는 종교의 유전(가르침)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즉 유대교의 열심분자로 있던 그때에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교라는 인간의 종교를 유지하고 굳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 변화의 핵심은 그가 섬기는 대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도 물론 하나님을 섬겼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그는 주님을 만난 후에 완전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1:15,16에서 이렇게 증거한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이 말은 곧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을 진짜로 만났는데 그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그에게 나타내시고자 했는가? 바로 그의 영원하신 아들이었다. 이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함과 동시에 사실은 아들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너는 다른 일을 열심히 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며 나를 나타내는 일을 열심히 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유대교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높이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자신을 깊이 알고 사랑하며 그 인격과 생명을 누리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오직 그가 주신 계명(율법)에 충실하는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과 형통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한 분명하고 새로운 계시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살아계신 참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오셨다가 지금은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모든 믿는 자 안에 다시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을 알고 누리며 증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들이거나 성령님이라는 영이실 뿐 아니라 아들로 표현되고 영으로 사람 안에 부어진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접하는 사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함께 접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임하신 성령님을 접하는 사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함께 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살아 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불러 그 아들을 알게 하셨으며 그를 세상에 전하도록 시키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교인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대교를 비롯하여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교리와 전통과 율법과 의식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 자신 곧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사시며 말씀하시며 인도하시는 한 인격을 누리며 따르는 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과 열망은 사람이 그의 아들을 알고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여 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요1:12, 갈4:5,6)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든 당신의 아들을 사람 안에 계시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을 기뻐하신다. 바울을 불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일도 하시지 않았고 어떤 일도 요구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일은 오직 그의 아들을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신 일은 오직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일도 기뻐하지 않고 오직 그 아들을 나타내시는 것만을 기뻐하신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도 최선을 다해 산 사람이었고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에도 최선을 다 해 잘 산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삶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후가 너무도 달랐다. 유대교에 있을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했다. 그것은 그들이 무슨 부도덕한 일을 하거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바가 자기가 믿는 종교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겠지만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괘념치 않았다. 이것은 곧 회심하기 전의 바울(사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의 열렬한 신자로서 바리새인이었고 그 부모 역시 바리새인이었다.(행23:6) 1:14에서 그는 자신이 자기 동족의 여러 동년배보다 유대교를 훨씬 열심이 있었고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유대교의 가르침에 큰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통에 맞게 행동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알고 누리는 것 대신 교리와 선악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그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마음이 어떠한가 하는 것(하나님의 인격)이 아니라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종교적 가르침과 전통'뿐이었다. 그것은 유대교가 그에게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보다 율법의 의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난 것이라는 증거이다.

어떤 교회든지 교회에 갓 입교한 사람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정도(아는 바)가 약해서 그렇지 추구하는 내용 자체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종교적 생활을 해 갈수록 그의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종교적 행습과 전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본다.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없으면서 "아, 하나님이야 당연히 믿고 당연히 알지. 내가 하나님을 안 믿으면 누구를 믿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 몸담고 있고 하나님과 관련된 집단(교회)에 속해 있고 출석하고 거기에 관련된 일을 한다는 것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고 따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일이 아니고 인격이다. 하나님은 교리나 규칙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 말고 하는 문제나 무엇을 지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이신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문제이다.  

사탄은 사람을 살아계신 참 하나님, 인격이신 아들을 알고 누리는 자리에서 벗어나 종교에 빠지도록 항상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누리는 생활과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에 따라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며 우리 삶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자리에서 떠나 종교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울을 사도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자기의 아들을 계시하셨다. 바울이 전파한 것은 율법이나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교리나 사상이나 의식은 죽은 무인격이지 살아 있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있으며 사람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것은 죽은 교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유대교인들과 달리)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것에 주의하지 말고 오직 이 산 인격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도 점치는 사람처럼 오늘의 운세나 오늘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아야 할지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신 하나님 자신을 만나야 한다. 무엇을 읽든지 무엇을 듣든지 그것은 다 하나님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읽거나 들을 때 우리는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고 어떤 가르침만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야 한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그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성전과 제사와 안식일 모두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오직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지난 주에 말했듯이 안식교나 유사한 신흥 이단들의 공통 특징은 모두 몸이요 실제인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그림자와 모형에 지나지 않는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은 율법 의식들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통로와 도구인 사람(사역자)를 하나님 자신의 자리에 갖다 놓고 과도히 중시하고 섬김으로써 지금도 엄연히 살아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뒷전으로 제쳐놓는 우를 범하고 있으며 오순절파의 교회들은 기적들 곧 병 고침과 방언과 예언과 각종 은사들을 그리스도(성령) 자신보다 더 중히 여기고 붙듦으로써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뒷전으로 제쳐놓고 있다. 내용과 형식은 어떻든 간에 이 모든 행위들은 다 하나님의 소원이신 아들을 버리고 종교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든지 말씀집회를 가지든지 형제들끼리 교제를 하든지 그 자리에서 참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감동이나 인간적 유익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삶에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가 추구되며 그가 우리의 모든 삶의 내용과 생명으로 취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정신과 인격이 형성되고 우리를 통해 그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이나 구원론이나 인간론이나 천년왕국이나 침례, 방언, 수건을 머리에 쓰는 것, 성찬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례, 안식일, 교회 행정과 사역, 봉사의 방법, 신자의 결혼과 직업 선택, 행복한 가정생활, 교회의 부흥과 확장 등에는 관심과 흥미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과 기쁨은 산 인격이신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주어 누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개인적 일들과 교회의 모든 일들은 다 그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고 나타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일을 독려하시며 거기에 개입하시며 역사하시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누리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일은 다 필요 없다.

그리스도의 삶에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리스도만 있으면 다른 것들을 근원적으로 다 해결되기 때문에 그다지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인격이 우리의 모든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세대의 성도에게 약속하신 것이 바로 이 인격, 이 생명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 요한은 어떤 자들이 이단이며 어떤 주장이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인가를 묻는 중대한 질문에 대해 다른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는 원론적인 말만 간단히 한 후 오직 '너희들 안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5-27)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려면 거룩과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인내,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을 간절히 추구한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그는 만유를 포함한 분이시며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거룩함이나 사랑이나 승리나 인내가 아니라 이 살아 있는 인격이다. 그가 없으면 모든 것도 없게 된다.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며 사랑과 인내와 승리와 거룩과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이 없는 이유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많은 것들을 사람에게 별도로 주시기를 원치 않고 오직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인격을 누릴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가운데서 되어지는 모든 것은 다 종교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 생명을 누리지 않는데도 착하거나 부인을 사랑하거나 정중하거나 인내를 잘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싸우며 그에게 마침내 굴복하는 것도 없는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예의가 바르고 성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종교이며 전통이며 도덕이다. 우리 이전 세대의 부인들은 남편들에게 매우 순종을 잘했다. 그때는 예수를 믿는 부인들도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동양 전통의 표현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혹시라도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교리나 전통이나 선한 생각을 좇아 훌륭한 신자의 모습을 연출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교회 생활은 인간의 가르침을 좇은 종교 이상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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