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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내용은 개역성경의 번역만으로는 다소 이해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영어 번역(NIV)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Fourteen years later I went up again to Jerusalem, this time with Barnabas. I took Titus along also. I went in response to a revelation and set before them the gospel that I preach among the Gentiles.
14년 후에 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때는 바나바와 함께 갔으며 또한 디도도 데리고 갔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주의 계시에 의해서였으며 이방인들에게 내가 전한 복음을 그들(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내놓기 위해서였다.

But I did this privately to those who seemed to be leaders, for fear that I was running or had run my race in vain.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보이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이나 해 온 일이 헛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Yet not even Titus, who was with me, was compelled to be circumcised, even though he was a Greek.
그러나 나와 동행한 디도는 헬라인이었지만 (그들로부터) 결코 할례를 받도록 강제되지 않았다.  

This matter arose because some false brothers had infiltrated our ranks to spy on the freedom we have in Christ Jesus and to make us slaves.
따라서 (본래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가운데 몰래 침투해 들어온 어떤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We did not give in to them for a moment, so that the truth of the gospel might remain with you.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복음 진리가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잠시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As for those who seemed to be important (whatever they were makes no difference to me ; God does not judge by external appearance) those men added nothing to my message. On the contrary, they saw that I had been entrusted with the task of preaching the gospel to the Gentiles, just as Peter had been to the Jews.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나의 메시지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처럼 내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든지 나에게 문제가 안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For God, who was at work in the ministry of Peter as an apostle to the Jews, was also at work in my ministry as an apostle to the Gentiles.
하나님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사도로서 사역하도록 역사하신 것 같이 내가 이방인들에게 사도로서 사역하도록 역사하셨다.

James, Peter and John, those reputed to be pillars, gave me and Barnabas the right hand of fellowship when they recognized the grace given to me. They agreed that we should go to the Gentiles, and they to the Jews.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주어진 은혜를 깨달았을 때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하며 그들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곧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유대인에게로 가서 사역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All they asked was that we should continue to remember the poor, the very thing I was eager to do.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이라고는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항상 갈망하는 바였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그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역설했다. 이어지는 2장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이 증거하는 이 복음 진리는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의존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가 사람들의 인정과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동의하고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일이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었음을 말한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전하는 복음)을 인정해주거나 알아달라고 청하지 않았고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자기의 생각(복음)을 바꾸거나 왜곡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가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복음이 진리임을 알아보고 먼저 그를 인정하며 교제의 악수를 청해왔다고 그는 증거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 예루살렘 여행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방문과 같은 것이다. 즉 안디옥교회가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한 것이다. 이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그 어떤 의식이나 규례와도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뒤따랐는지에 대해 기쁨으로 보고했고 그것을 들은 형제들은 다 놀라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온 교회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그의 사역을 보고하기 전에 먼저 소위 '유명한 자들'을 사사로이(개별적으로) 만나 교제를 가졌다. 이 '유명한 자들'이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에는 어떤 조롱과 분노가 담겨 있는 듯 하다. 누가 누구를 조롱하며 누가 누구에게 분노한다는 것인가? 사실 이 용어는 바울이 먼저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이 먼저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이 유대의 사도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려고 이 말을 먼저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유대 출신의 사도들을 높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바울을 무시하고 낮추려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바울이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인 거짓 형제들이 바울을 조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들을 시기하거나 그들에게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의 복음과 사역을 멸시하며 거짓말로 진리를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분노하며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에게는 크게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만나 은혜의 복음에 대해 확증을 받고 율법 문제에 대해 지침을 얻고자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여러 이방 교회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계시와 교회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자기의 권위와 사역을 인정받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형제들에게 증거하며 그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이고 거기에 아울러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로부터 어떤 가르침이나 조언을 받기 위해서나 사도로서의 인준을 받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진리는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부르심과 사역의 인정 역시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다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펼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내셨지 그에게 어떤 정치를 하거나 타협을 이루라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만 주님을 찬양했고 형제들에게 그가 경험한 복된 소식을 보고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먼저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사사로이(개별적으로) 접촉했는가? 그것은 그 형제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거의 틀림없이 자기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는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주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기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사정이 어떠한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들을 먼저 개별적으로 접촉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등의 지도자들로부터 어떤 가르침이나 규례를 받을 마음도 없었고 그들로부터 인정이나 위임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역시 바울에게 어떤 가르침을 더하거나 새로운 규례나 짐을 지우지 않았다. 6절에서 바울이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오직 주님의 계시와 복음 진리에 의해서 사역했지 결코 유대인의 전통이나 사람의 생각을 따라 사역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나 다른 사람들(이방 교회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할례든 세례든, 먹고 마시는 것이든, 절기를 지키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 진리에 첨가될 수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바울이 그동안 증거하고 강조해 오던 바로 그 진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결코 바울에게 그것을 바꾸라고 하거나 거기에 무엇을 덧붙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주요한 형제들이 다 모인 회의 자리에서 형제들은 과도기 동안 이방 신자들이 유대 출신의 신자들과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돕기 위해 이방인 형제들이 (행15:20,28,29 등에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상에게 드려졌거나 온전히 피를 뽑지 않은 고기 등을 공개적으로 먹지 말 것과,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음행(근친 결혼) 등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은혜의 복음에 덧붙이는 새로운 규범이 아니라 단지 유대인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데에 어떤 걸림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온 배려였다.  

실제로 바울은 이런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따른 규범들과 조언들에 대해 조금도 어떤 짐을 지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롬12:18, 14:1이하, 고전8:1이하, 9:19이하, 10:14이하, 10:23이하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제들과 화평을 도모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 전파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때로 자신의 특권(자유)들을 스스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여러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 율법주의자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은혜의 복음에 그 어떤 율법도 첨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울과 함께 동행한 헬라인(무할례자) 디도가 그들 가운데 있는 동안 결코 할례를 요구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그에게 예수 믿는 것에 더하여 할례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무할례자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할례자로 돌아왔다.

결국 안디옥교회에서 벌어진 유대인들의 소동(예수만 믿으면 안되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소동)과 주장은 어떤 근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사주를 받아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거짓 형제들의 준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4절에서 할례 문제가 대두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 까닭이 아니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더 말하는 것은 다 우리가 가진 이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위해 사탄이 말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든지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든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한다든지 선한 행실로 공덕을 쌓아야 한다든지 하는 모든 가르침들은 그것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든 신자의 의무로 제시된 것이든 간에 다 불필요하며 은혜의 복음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사람을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에 속박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항상 단호하게 배격했다. 어떤 때는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문제가 생명과 구원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다른 것을 함께 수용하면 결국 믿음은 밀려나고 행위가 주된 구원의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라도 그리고 부분적으로라도 거짓 가르침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 오직 복음 진리, 즉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만 항상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핵심적 진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 절대적 원칙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행동했다. 그는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감안하여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려고 했다. 또한 그에게는 어떻게 하든 일단 사람을 살려놓고 보자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생명의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에 복음 진리 외에 어떤 장애물도 놓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는 매우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행동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습관이나 전통, 사고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감함으로써 그들에게 동화하고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이것은 바울이 성육신의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상대방은 내게로 올 수 없고 나는 그에게 갈 수 있다면, 내가 낮아지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으니 내가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기까지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복음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모양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사랑과 기쁨으로 받으신 자들을 사람이 자기의 형편과 모양 또는 어떠한 인간적 사유로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2장 6절의 삽입구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을 그 육신적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종교와 인간의 전통 안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취하는 습관이 뿌리깊게 박혀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은연 중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부름 받은 직후는 물론이고 사역이 상당 기간 진행되기까지도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사람들을 접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인정받을만한 외모를 획득하고자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모든 사역의 권위와 근거를 오직 주님 자신에게만 두기 원했고 일체 사람에게 두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람의 가치는 그 생명과 인격에 있지 외모(육신적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명 역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 진실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인격은 육신적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명하고 탁월한 인물이 된 것 역시 그들의 육신적 성분이 좋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었으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과 복된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능력, 지식, 선한 행위와 같은 육신적 외형이 아님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성된 인격이나 성품이나 거룩한 행실이나 업적도 아니며 오직 그런 것을 가져온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하나님의 역사뿐이다. 오직 그것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만 있으면 어떤 사람도 변하며 어떤 사람도 아름답고 흠모할만한 생명과 인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며 이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증거를 받거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에 대해 말하며 당당히 전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주저함이나 부끄러움도 없었다. 사람의 증거를 가지고는 그렇게까지 당당하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자기가 소유한 것을 끝까지 타협없이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의 습관을 따라 육신적인 자격과 인정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사람들에게 내놓고 증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과 진리 자체보다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영광을 더 크게 생각하며 더 귀히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로 인한 은혜의 복음보다 육체의 자랑과 사람의 권위를 더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길은 바울이 오직 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의 인도에만 주의하고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는 전혀 괘념치 않고 걸어간 그 길과 같아야 하며 또한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계시, 그의 복음 진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주의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하거나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것에는 전혀 상관치 않고 걸어간 그 길과 같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진리에 충실하고 또 충실해야 한다. 우리의 길은 진리에 온전히 속박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진리를 옹호하며 진리에 충실함
갈라디아서 2:1-10
본문의 내용은 개역성경의 번역만으로는 다소 이해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영어 번역(NIV)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Fourteen years later I went up again to Jerusalem, this time with Barnabas. I took Titus along also. I went in response to a revelation and set before them the gospel that I preach among the Gentiles.
14년 후에 나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때는 바나바와 함께 갔으며 또한 디도도 데리고 갔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주의 계시에 의해서였으며 이방인들에게 내가 전한 복음을 그들(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내놓기 위해서였다.
But I did this privately to those who seemed to be leaders, for fear that I was running or had run my race in vain.
그러나 나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보이는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는 일이나 해 온 일이 헛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Yet not even Titus, who was with me, was compelled to be circumcised, even though he was a Greek.
그러나 나와 동행한 디도는 헬라인이었지만 (그들로부터) 결코 할례를 받도록 강제되지 않았다.  
This matter arose because some false brothers had infiltrated our ranks to spy on the freedom we have in Christ Jesus and to make us slaves.
따라서 (본래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가운데 몰래 침투해 들어온 어떤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We did not give in to them for a moment, so that the truth of the gospel might remain with you.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복음 진리가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잠시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As for those who seemed to be important (whatever they were makes no difference to me ; God does not judge by external appearance) those men added nothing to my message. On the contrary, they saw that I had been entrusted with the task of preaching the gospel to the Gentiles, just as Peter had been to the Jews.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나의 메시지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처럼 내가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든지 나에게 문제가 안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For God, who was at work in the ministry of Peter as an apostle to the Jews, was also at work in my ministry as an apostle to the Gentiles.
하나님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사도로서 사역하도록 역사하신 것 같이 내가 이방인들에게 사도로서 사역하도록 역사하셨다.
James, Peter and John, those reputed to be pillars, gave me and Barnabas the right hand of fellowship when they recognized the grace given to me. They agreed that we should go to the Gentiles, and they to the Jews.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주어진 은혜를 깨달았을 때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하며 그들 안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곧 우리는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유대인에게로 가서 사역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All they asked was that we should continue to remember the poor, the very thing I was eager to do.
그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이라고는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항상 갈망하는 바였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그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역설했다. 이어지는 2장에서 바울은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자신이 증거하는 이 복음 진리는 사람의 인정과 평가에 의존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가 사람들의 인정과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 동의하고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일이 실제로 그렇게 전개되었음을 말한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전하는 복음)을 인정해주거나 알아달라고 청하지 않았고 더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자기의 생각(복음)을 바꾸거나 왜곡시키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가 만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들이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복음이 진리임을 알아보고 먼저 그를 인정하며 교제의 악수를 청해왔다고 그는 증거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바울의 이 예루살렘 여행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방문과 같은 것이다. 즉 안디옥교회가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한 것이다. 이 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그 어떤 의식이나 규례와도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는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뒤따랐는지에 대해 기쁨으로 보고했고 그것을 들은 형제들은 다 놀라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온 교회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그의 사역을 보고하기 전에 먼저 소위 '유명한 자들'을 사사로이(개별적으로) 만나 교제를 가졌다. 이 '유명한 자들'이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에는 어떤 조롱과 분노가 담겨 있는 듯 하다. 누가 누구를 조롱하며 누가 누구에게 분노한다는 것인가? 사실 이 용어는 바울이 먼저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이 먼저 사용한 것이다. 즉 바울이 유대의 사도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려고 이 말을 먼저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유대 출신의 사도들을 높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바울을 무시하고 낮추려는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바울이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인 거짓 형제들이 바울을 조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들을 시기하거나 그들에게 결코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의 복음과 사역을 멸시하며 거짓말로 진리를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분노하며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바울에게는 크게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을 만나 은혜의 복음에 대해 확증을 받고 율법 문제에 대해 지침을 얻고자 하는 것은 바울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비롯한 여러 이방 교회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계시와 교회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 자기의 권위와 사역을 인정받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형제들에게 증거하며 그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한 것이고 거기에 아울러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로부터 어떤 가르침이나 조언을 받기 위해서나 사도로서의 인준을 받기 위해 간 것은 아니었다. 진리는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 오며 부르심과 사역의 인정 역시 오직 주님 자신으로부터만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다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펼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증거하라고 보내셨지 그에게 어떤 정치를 하거나 타협을 이루라고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만 주님을 찬양했고 형제들에게 그가 경험한 복된 소식을 보고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먼저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사사로이(개별적으로) 접촉했는가? 그것은 그 형제들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거의 틀림없이 자기를 통해서 펼쳐지고 있는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는) 주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기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사정이 어떠한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그들을 먼저 개별적으로 접촉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등의 지도자들로부터 어떤 가르침이나 규례를 받을 마음도 없었고 그들로부터 인정이나 위임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역시 바울에게 어떤 가르침을 더하거나 새로운 규례나 짐을 지우지 않았다. 6절에서 바울이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오직 주님의 계시와 복음 진리에 의해서 사역했지 결코 유대인의 전통이나 사람의 생각을 따라 사역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나 다른 사람들(이방 교회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할례든 세례든, 먹고 마시는 것이든, 절기를 지키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복음 진리에 첨가될 수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전적으로 바울이 그동안 증거하고 강조해 오던 바로 그 진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결코 바울에게 그것을 바꾸라고 하거나 거기에 무엇을 덧붙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주요한 형제들이 다 모인 회의 자리에서 형제들은 과도기 동안 이방 신자들이 유대 출신의 신자들과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돕기 위해 이방인 형제들이 (행15:20,28,29 등에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상에게 드려졌거나 온전히 피를 뽑지 않은 고기 등을 공개적으로 먹지 말 것과,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음행(근친 결혼) 등을 피하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은혜의 복음에 덧붙이는 새로운 규범이 아니라 단지 유대인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데에 어떤 걸림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온 배려였다.  
실제로 바울은 이런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따른 규범들과 조언들에 대해 조금도 어떤 짐을 지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롬12:18, 14:1이하, 고전8:1이하, 9:19이하, 10:14이하, 10:23이하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다른 형제들과 화평을 도모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 전파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 때로 자신의 특권(자유)들을 스스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했다.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여러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 율법주의자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은혜의 복음에 그 어떤 율법도 첨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울과 함께 동행한 헬라인(무할례자) 디도가 그들 가운데 있는 동안 결코 할례를 요구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그에게 예수 믿는 것에 더하여 할례를 또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무할례자로 예루살렘에 가서 무할례자로 돌아왔다.
결국 안디옥교회에서 벌어진 유대인들의 소동(예수만 믿으면 안되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유대인들의 소동)과 주장은 어떤 근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사주를 받아 진리를 무너뜨리려는 거짓 형제들의 준동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4절에서 할례 문제가 대두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 까닭이 아니라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고 말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더 말하는 것은 다 우리가 가진 이 자유를 빼앗고 우리를 종으로 만들기 위해 사탄이 말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든지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든지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 한다든지 선한 행실로 공덕을 쌓아야 한다든지 하는 모든 가르침들은 그것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든 신자의 의무로 제시된 것이든 간에 다 불필요하며 은혜의 복음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사람을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에 속박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항상 단호하게 배격했다. 어떤 때는 정치적으로 타협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문제가 생명과 구원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다른 것을 함께 수용하면 결국 믿음은 밀려나고 행위가 주된 구원의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시적으로라도 그리고 부분적으로라도 거짓 가르침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들 가운데 오직 복음 진리, 즉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만 항상 유지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울은 핵심적 진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 절대적 원칙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매우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행동했다. 그는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감안하여 복음을 전하며 사역하려고 했다. 또한 그에게는 어떻게 하든 일단 사람을 살려놓고 보자는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생명의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에 복음 진리 외에 어떤 장애물도 놓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는 매우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행동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습관이나 전통, 사고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공감함으로써 그들에게 동화하고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이것은 바울이 성육신의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즉 상대방은 내게로 올 수 없고 나는 그에게 갈 수 있다면, 내가 낮아지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으니 내가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는 주님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기까지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복음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모양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사랑과 기쁨으로 받으신 자들을 사람이 자기의 형편과 모양 또는 어떠한 인간적 사유로 거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2장 6절의 삽입구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곧 하나님은 사람을 그 육신적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상 모든 종교와 인간의 전통 안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취하는 습관이 뿌리깊게 박혀 있으며 그것은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은연 중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부름 받은 직후는 물론이고 사역이 상당 기간 진행되기까지도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던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사람들을 접촉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사람으로부터 어떤 인정받을만한 외모를 획득하고자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모든 사역의 권위와 근거를 오직 주님 자신에게만 두기 원했고 일체 사람에게 두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는 이 말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람의 가치는 그 생명과 인격에 있지 외모(육신적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생명 역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생명, 진실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인격은 육신적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명하고 탁월한 인물이 된 것 역시 그들의 육신적 성분이 좋거나 노력을 많이 해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었으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과 복된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능력, 지식, 선한 행위와 같은 육신적 외형이 아님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성된 인격이나 성품이나 거룩한 행실이나 업적도 아니며 오직 그런 것을 가져온 근원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하나님의 역사뿐이다. 오직 그것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만 있으면 어떤 사람도 변하며 어떤 사람도 아름답고 흠모할만한 생명과 인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며 이런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증거를 받거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에 대해 말하며 당당히 전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어떤 주저함이나 부끄러움도 없었다. 사람의 증거를 가지고는 그렇게까지 당당하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자기가 소유한 것을 끝까지 타협없이 주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여전히 인간의 습관을 따라 육신적인 자격과 인정을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사람들에게 내놓고 증거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과 진리 자체보다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영광을 더 크게 생각하며 더 귀히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로 인한 은혜의 복음보다 육체의 자랑과 사람의 권위를 더 크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길은 바울이 오직 주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의 인도에만 주의하고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에는 전혀 괘념치 않고 걸어간 그 길과 같아야 하며 또한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계시, 그의 복음 진리에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주의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하거나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것에는 전혀 상관치 않고 걸어간 그 길과 같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진리에 충실하고 또 충실해야 한다. 우리의 길은 진리에 온전히 속박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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