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데 무슨 일로 그가 안디옥에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어떤 이유로 안디옥 교회에 왔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한 잘못으로 인해 바울에게 큰 책망을 받았다. 그러나 베드로가 한 일은 단지 그가 안디옥 교회의 형제들 곧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유대인 형제들이 그 자리에 들이닥치자 자리를 피한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기에 대단한 잘못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아예 문제도 되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을 심각한 실패와 잘못으로 여기고 베드로를 책망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끼리 자주 모여서 함께 교제의 식탁을 나누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가정에서 먹는 음식을 형제들의 모임 자리로 가져와서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것은 형제 사랑에서 나온 좋은 습관이지만 몇 가지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런 자리가 빈부의 영향을 받았고 안디옥교회에서는 민족적 차별을 따라 이루어졌다. 즉 고린도 교회의 부자 형제들은 가난한 형제들과 식탁을 같이 하지 않았으며 안디옥 교회의 유대인 출신 형제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방 출신 형제들과는 식탁을 같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함께 모여 먹는 행동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들이 이런 일을 온전히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고 인간적인 습관과 전통에 따라 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삶을 함께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시행되던 습관이었을 뿐 아니라 율법에 근거한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여기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들과 성별을 추구한 유대인들의 행태는 오래되고 뿌리깊은 것이다. 요한복음 4:7-9을 보면 주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다가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한 것이 나온다. 그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그리고 요한은 이어서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다니엘서를 보아도 충실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유지해 나갔는지를 볼 수 있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다니엘은 궁중 진미를 제공 받았음에도 그것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했다. 그 이유 역시 '이방의 것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단1:8)

마태복음 15장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전통, 가르침)으로 인해 손을 씻지 않고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습관 역시 유대인의 뿌리깊은 성별 관념에 의한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먼저 씻는 것은 단순히 위생상의 이유로 그런 것이 아니라 혹시 그들이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그들에게 속한 물건을 만짐으로써 자신이 부정하게 되지 않았을까를 염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런 식이었으니 충실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가 (같은 그리스도인 형제이든 아니든)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법한) 유대인들 형제들이 들이닥쳤을 때 자리를 피한 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가 그것을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했든지 아니면 유대인 형제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비난을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했든지 간에 충실한 유대인인 베드로에게는 있을 법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정면으로 책망함으로써 이 일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실패요 중대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그는 이 일이 단지 실행상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근본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라고 보았다.  

과연 바울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제기할 만한 이의를 제기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혹은 앞선 형제를 시기하고 낮추기 위해서 형제의 작은 실수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소란을 피운 것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이 문제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며 진리의 근본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임을 요목조목 설명했다. 이 문제는 신학 이론적으로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투명하므로 복음 진리 위에 굳게 서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현실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문제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고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즉 구원을 받으려면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되느냐 아니면 그것과 함께 유대인의 세계 곧 이미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백성으로 규정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예수만 믿으면 된다면 할례든 무엇이든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구약의 모든 율법 규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만일 예수만 믿어서는 안되고 또한 유대인이기도 해야 한다면 그런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지키지 않는 (부정한) 사람들과는 그가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 할지라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교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한 다음의 말에서 그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우리는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이 진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미 거기에 거의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믿음과 율법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계시를 분명히 보았고(행10장),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요구하지도 않았고, 또한 바울이 참석한 예루살렘 공회에서 어떤 바리새파 신자들이 일어나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시키고 율법을 준수케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그것에 반대하고 오직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역설한 사람이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15:5-11)

그런 그가 어째서 자기가 알고 믿는 지식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했는가? 나는 그 이유가 다음 두 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는 그의 정신이 해이해져서 그런 것이다. 베드로에게 계시 자체가 부족하거나 진리의 지식 자체가 부족하여 그런 실패가 왔다고는 볼 수 없다. 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구보다 먼저 주의 계시를 보았고 그것을 대체로 잘 실행해왔다. 그러다가 부지 중에 어느 곳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이 복음 진리(지식)에 철저하게(충실하게) 행하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 문제이며 주님의 의지하는 문제이며 시험에 대비하여 어떻게 깨어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매일 자기를 진리로 무장하고 진리로 단련하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라도 육신에 오래 배어 있는 인간적 습관과 상식과 본능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실패의 첫째 원인은 그가 자기처럼 중요한 인물에게 사탄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인가를 예상하고 철저히 자기를 진리로 무장하고 단련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신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리보다는 사람을 더 배려하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베드로는 그 기질상 급격한 변화와 변혁에 민첩하게 대처하며 행동하는 혁명가적인 인물이기보다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인간 관계를 무리 없이 원만하게 유지하려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이전의 모든 질서와 차별을 폐지하시고 사람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하실 뿐 (즉 아들의 생명을 소유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만 사람을 구분하실 뿐) 사람을 더 이상 할례자나 무할례자,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 유대인이나 이방인으로 가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계시를 통해 분명히 보았고 또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런 과정에서 생기는 과도기적 현상들 곧 유대인들의 혼란에 대해서는 동정적이며 이해하는 입장에 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 자기 혼자서 혹은 진리를 이해하는 유대계 형제들과는 얼마든지 무할례자(이방인)들과 식사도 하고 교제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제들이 나타났을 때는 (그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마치 율법을 어기며 이방인들과 교제를 가지지 않았던 것처럼 자리를 피하려 한 것이다. 그는 유대 출신의 형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와 복음 진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구습에 매여 있는 것에 대해 동의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런 약한 자의 사정을 깊이 이해했고 따라서 복음 진리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삶의 질서와 자유라도 그것을 너무 무리하게 추진해서 충돌과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유야 어쨌든 간에 그는 야고보에게서 온 형제들이 그에게 "왜 당신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무할례자들(이방인들)과 교제를 했소" 라고 비난을 해 올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리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무엇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평안 없음의 원인이 되는 '생각'과 '걱정'과 '배려'가 있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이 전적으로 옳으며 그의 일하심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신뢰한다면 진리가 전파되고 성령이 그 진리로 사람 안에서 벌이시는 역사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간섭하거나 배려할 것도 없다. 성령은 어린아이가 아니시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베드로의 태도가 (그의 사정이야 어떠했든지 간에) 결국 진리에 충실하지 못한 태도요 외식(外飾)이라고 간주하고 그를 책망한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세우기 위해 때로 형제를 책망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못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이차 문제이고 우선적인 것은 진리를 세우는 일 자체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서 형제를 책망하거나 권면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을 섣불리 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일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요컨대 책망은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과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양자가 결합될 때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책망은 책망을 받아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 책망을 하는 사람과 동일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책망이 먹혀든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대로만 행하고 진리에 충실한 바울이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사심 없이 책망할 수 있었고, 또한 그와 동일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동일한 진리의 바탕 위에 서 있는 베드로였기 때문에 그러한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여서 자신과 후대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소화할 수 있었음을 본다.

다시 말하지만 책망은 그것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일체가 되어 궁합이 맞을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판단하는 마음,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 정죄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그런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책망을 하면 사람을 진리 안에 바로 세우지 못하고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책망을 하면 감정이 상하고 반발이 일어날 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어떤 때에 책망을 하고 어떤 때에 침묵해야 할 지를 판단하여 신중히 모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면책은 오늘날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절대적 복음 진리를 확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의 행동 곧 선임자이고 연장자인 베드로를 책망하기까지 진리를 세우려고 노력한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바울이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지 않고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의 기쁨을 얻으려고 불투명하게 행동했다면 이 진리는 오늘날 이렇게 분명하게 보존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진리에 충실하게 행동함으로써 진리를 세우고 보존하며 전파하는 일은 어떤 사람을 일시적으로 배려하고 그의 마음을 맞추어서 상하지 않게 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나는 말씀을 보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보다 야고보가 더 우위에 있어서 가장 큰 지도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15장의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가 최종 결론을 내렸고 갈2:12, 행21:18을 보더라도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베드로보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더 큰 인도자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중간에 변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직분과 사역은 조직이나 제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한 번 정해지면 영구히 변치 않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변동하는 임시적이며 유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천주교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계승자요 초대 교황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영구하며 절대 불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개신교의 목사나 장로들도 한 번 정해지면 영구히 그 지위를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도자 노릇을 하는데 이것 역시 생명의 역사를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요 죽은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의 지위와 역할은 그 사람의 실제 곧 그의 은사와 영적인 수준, 그의 현재 영적 상태에 의해 결정되고 변동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종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을 그렇게 추진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삼 년 반이나 따라 다니고 계시를 통해 직접 레위기의 음식에 대한 규정이 폐지된 것을 본 베드로가 이렇게 외식적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고 육신이다. 이것은 누구는 그렇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한 것이다. 베드로라도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약함과 어리석음은 일시적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항상 그러한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지라도 성령 안에 거하며 진리로 무장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는 도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자기를 부인하고 철저히 영의 인도를 좇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를 비롯한 오고 오는 주의 교회에 대한 베드로의 봉사와 섬김은 그의 적극적 순종과 봉사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이나 마16장의 행위(주님의 십자가행을 가로막음)나 마26장의 배신과 같은 그의 소극적인 행위들로부터도 온다. 그의 행위는 잘, 잘못을 떠나서 우리에게 산 교훈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는 좋은 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롬8장에서 바울이 역설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육신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영원히 성령께 복종하고 성령을 따라야 한다.


베드로의 실패는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인간의 육신적 약함에 따른 시험이고 실패인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진리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서 어색함을 당케 되며 홀로 외롭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행한 실패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인정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며, 사람의 인정과 칭찬이 우리를 안식케 하고 든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 온전히 행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는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안식케 하고 든든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생각과 상식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다만 사람들 가운데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을 수 있겠지만 진리를 따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또한 함께 진리를 좇는 형제들 가운데 함께 있어서 영원히 외롭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만일 진리에 투철하지 못하고 생명의 길에 철저하지 못하면 우리는 도로 세상의 위로와 세상의 재미와 세상의 인정을 좇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진리와 생명에 철저하지 못하면 거기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도로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영광을 얻으려고 베드로처럼 진리에서 더 멀어지는 쪽으로 행동을 하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면 나중에는 진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처음부터 오직 진리와 생명에만 주목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거기서 기쁨과 영광을 얻고 거기서 재미와 만족을 얻도록 철저히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행동은 매우 위력적이고 전염성이 있어서 주위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다 그와 같이 외식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의 외식에 전염이 되어 같이 외식을 하게 되었다. 이로 보건대 앞에 서서 예수를 믿는 사람의 영향력이 매우 큰 것이며 따라서 그의 모든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말과 같이 사람의 믿음은 앞에서 먼저 믿는 자의 본을 보고 듣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서서 행하는 사람의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 신자들에게 음으로든 양으로든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며 진리에 철저한 사람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은 주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