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이 그의 선배 사도요 친애하는 형제요 가장 유력한 교회 지도자인 베드로를 그의 외식적 행동으로 인해 만인 앞에서 사정없이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세우고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전하고 세우는 일에 진력(盡力)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반하거나 그것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인간적 가르침들을 배격하는 일에 진력했다.
16절 이후에서 바울은 왜 자신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고수하며 거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어떤 것을 더하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철저하게 반대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죄인인 이방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모세로부터 율법을 받은 후 1000년 이상의 세월을 통해 체험한 사실은, 타락하여 죄인이 된 인류는 (그가 아무리 율법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도)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9-20)
율법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지 않은 이방인들의 실상만 이렇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있고 율법을 하늘처럼 떠받든 유대인들의 실상도 이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생각 곧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는 중단하고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인류가 두 가지 면에서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으며 지배를 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는 자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려 범죄하는 것이다. 들어야할 아버지의 말씀, 창조주의 말씀, 주인의 말씀은 듣지 않고 자기를 지배하여 종으로 부리며 파멸로 이끄는 마귀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타락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런 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주로 자존심 때문에) 계속 어떤 형태로든 율법을 지키려고 함으로써 인간 자신의 방법과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사탄에게 속고 있는 두 가지 핵심적인 내용이다.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본성적으로 죄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고 일어나면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또는 사탄의 거짓말을 따라서 각종 허무한 일을 하며 하나님을 거스려 범죄한다. 이것은 숨쉬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어떤 악의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생명 자체가 타락하고 부패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첫째 문제 곧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한 범죄는 돌이키기 어렵다. 인류는 아담의 실패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자리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마치 엎질러진 물과 같아서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문제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열려 있는 구원의 길은 누구든지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 것으로 누릴 수 있다. 고집과 자존심과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망상을 깨뜨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는 것이다.
은혜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인가? 무지에서 그렇게 한다면 진리를 듣고 깨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복음 진리를 들어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공로를 기어이 나타내 보이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 세우기]이고 사람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지고 그의 뜻에 종속된 아들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존자로서의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존심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간은 감히 하나님과 겨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은혜와 율법의 싸움, 성령과 육신의 싸움은 매일 매 순간 벌어지며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의 기(氣) 싸움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힘 겨루기이다.
할례를 행하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제사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다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이며 전적으로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니 나는 다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하는 신앙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직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거기다 또 율법을 더하자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구원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영광과 자랑을 보태자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거와 특징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안하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어느 정도 교정하고 보완해서 하나님의 집에 들이시려고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교정하고 보완해서 회복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가르치고 설득하고 다듬고 보태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을 정도라면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사람을 회복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폐기처분하고 완전히 새로 거듭나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문제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새 생명을 받도록 요구하신 것이다.
사탄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를 쓰고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이유, 어떤 형태로든 율법을 지키도록 사주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원치 않지만 기왕에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만 믿는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무엇을 더 하도록 사주한다. 이미 교회 안에는 사탄에게 속아서 사탄의 이러한 사주를 실천하는 무리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이는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몰래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2:4) 역사적으로 사탄은 한시도 중단 없이 교회 안에 그의 거짓말에 사로잡힌 거짓 신자들을 심어왔고 그들로 하여금 참 신자들을 미혹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얻은 자유를 빼앗고 도로 율법과 육신과 죄와 사탄의 종으로 떨어지게 만들려고 시도해왔으며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시험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이 자유는 은혜로 얻은 것이요 우리가 애써서 얻은 것은 아니지만 사탄이 이것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정신 차리고 지켜야 한다.
자유를 지키고 유지하려면 먼저 우리가 얻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충분히 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는 크게 두 방면으로 누리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 즉 모든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모든 수고와 노력과 의무로부터 해방시켰다. 거기에는 생명(삶)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적인 노력을 비롯하여 잘 살기 위한 노력, 바로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다 포함된다. 그리스도는 그가 친히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시고 능력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모든 인간적 육신적 수고와 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우리는 이것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이것을 빼앗기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도로 삶의 모든 문제를 짊어지고 스스로 애쓰며 발버둥치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
둘째,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삶의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받음으로써 우리 안에 평강과 안식과 여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류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 모든 궁핍과 (그로 말미암는) 불안과 두려움과 수고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한다.
셋째, 우리의 자유는 율법뿐 아니라 죄와 세상과 자아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율법에 대해 죽은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서도 자유한다. 그것은 법이 없으면 범함도 없기 때문이다. 죄는 다른 말로 하면 범법(犯法) 즉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으면 당연히 범법도 없는 것이다. 죄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있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 바로 죄기 때문에) 율법이 더해짐(주어짐)으로써 범함(죄)이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더 많아졌다. 타락 후 사람은 본질상(본성으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법이 있으면 틀림없이 어김(범죄)이 따르게 된다. 이 성질로 인해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할 일도 하라고 하면 기어이 안 하려고 하며 가만히 놔두면 하지 않을 일도 하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이 하려고 한다. 따라서 율법을 도로 붙잡게 되면 죄에도 도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허무한) 세상 가치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과 여러 종류의 육신적 자랑과 강함과 궁극적으로는 이생(이 세상 삶) 자체에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이 세상이 전혀 부럽지 않은) 놀라운 별(別) 세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세상에 매이거나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다른 영광과 가치들을 또 추구하게 되면 도로 세상에 매이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가치들을 좇는 자리에서 떠나 그것과 함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또 추구하려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안식과 만족이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