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1:8)
이스라엘의 수가 충만하게 되었을 때 사탄은 이들을 핍박할 도구를 일으켰다. 그가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다. 이전까지의 애굽 왕들은 다 애굽을 위기에서 건져낸 히브리인 요셉의 은혜를 기억하였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스라엘 백성)을 관대하게 대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한 새 왕이 등장하여 히브리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된 이 백성들을 영구히 자기 종으로 붙잡아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 수가 충만해진 자기 백성들을 애굽(세상)에서 본래 약속하신 땅으로 챙겨 가시고자 하셨다. 사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 새 왕을 일으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탄의 궤계를 도리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는데 이용하셨다. 즉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시고 그로 인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 새로 일어난 강력한 왕의 핍박을 적절히 사용하신 것이다.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나님은 새 왕의 핍박(자극)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 애굽에서 자리 잡고 편안히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애굽을 떠나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조상과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약속의 땅 가나안을 거의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애굽에서의 삶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애굽에서 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악하고 강한 새 왕을 일으키셔서(일어나도록 허락하셔서) 백성들을 찌르게 하심으로 결국 그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신 것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기 위해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을 등장시키셨으며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구는 자가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로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1:9-11)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성하게 되자 애굽 왕은 자기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했다. 이것은 곧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미암아 자기 왕국이 위태롭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왜 그런가? 어차피 하나님의 소유는 세상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이스라엘은 어차피 애굽(세상 왕국)에 전적으로 동화되지 못할 이질적인 세력인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바로를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키려고 하고자 하였다.
한 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것이 된 자는 세상에서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항구적으로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은 한 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결코 세상 편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상(사탄)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 옮기신 것은 그들로 거기서 영구히 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 나무를 묘목장에 심어 키웠다가 자란 후 다시 정원으로 옮기는 것처럼 그 백성들을 강하고 큰 민족으로 키운 후 약속의 땅으로 데려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편안히 애굽에 거하는 동안 이러한 사실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으셨으며 마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를 통한 애굽의 압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애굽(세상)이 맞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바로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구별하시고자 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8)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세상과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경험된 사실이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창12:10,14,15) 기근 때문에 아브라함은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갔지만 아브라함은 거기서 나쁜 대접을 받은 좋은 대접을 받든 조금도 편치 않았다. 그것은 그 땅에서 모든 일이 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이다. 창세기 26:1-11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14:12)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2:7,8)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살도록 주어진 유일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길을 적극적으로 눈치채지는 못했다. 이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 역시 그가 겪은 위기와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 멸망할 운명의 우매한 자들은 더욱 그렇다. 발람은 당나귀를 통한 하나님의 꾸지람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길을 돌이켜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다.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애굽의 압제로 인해 고통하며 부르짖기는 했으나 적극적으로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가려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다. 그들은 그들의 육신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청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진정한 은혜,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큰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챙겨 누리도록 하기 위해 종종 우리를 육신적 어려움에 빠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애굽 왕의 박해와 같은 일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눈을 열어야 한다. 믿음의 눈을 열어 잊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 어떻게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의 육신은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우리 영은 세상을 떠나 벌써 하늘로 와 있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전에 세상을 떠나온 자일 뿐 아니라 매일 세상을 떠나고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빠지지 않고 또한 세상을 떠나야 할 때 즉각 떠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날마다' 떠나는 삶을 살면 된다.
작품은 한꺼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만들어져서 어느 날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것, 우리의 (세상에 대한) 죽음은 어느 날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조금씩 따르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살 때 어려운 때나 편안한 때나 항상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바벨론을 한꺼번에 이긴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이겼다. 그는 잡혀온 초기에도 그리고 그 땅에서 자리를 잡고 잘 나갈 때(총리의 자리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날마다 하나님(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 그는 목숨을 위협받을 때도 하나님을 바라며 바벨론에 대해서는 외인의 위치에 서 있었고 그 땅에서 성공하여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을 때도 하나님만 바랐고 바벨론에서의 영광과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바울 역시 그랬다. 그는 세상에 있을 때 항상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1-9)
둘째,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을 항상 생각하고 있으면 된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타는 것이 아니며, 배를 타는 사람 역시 바다에 떠 있기 위해 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안락한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를 타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내리는 그 순간까지 계속 목적지를 생각하며 (비행기를 타고 가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생각한다. 비행기든 기차든 그것을 누리는 목적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다가도 목적지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면 즉각 깨어서 준비하고 내린다. 사실은 잠도 깊이 못 든다. 혹 목적지를 놓치게 될까봐 선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왜 여기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목적 의식과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빠지거나 세상과 동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야할 길이 있으며 가야할 약속의 땅이 있다. 우리는 세상과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의 목적지는 다르다.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되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1-17)
바울 역시 이러한 믿음을 따라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1:20-26)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 지금 살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두려울 것도 없고 무엇에 집착하거나 아쉬워할 것도 없고 또한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부끄러워할 것도 없게 된다. 우리는 세상에 있어도 좋고 떠나도 좋은 사람이다. 즉 우리는 우리가 있는 지금의 이 직장 이 자리에 있어도 좋고 쫓겨나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유지해도 좋고 잃어도 좋은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와 화평하고 우리를 따르면 그것대로 좋지만 거절하고 배척한다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다. 우리를 받아주면 일할 수 있어서(구원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를 거절하고 버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어서 좋은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