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리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으로 대접하라 하였더라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가로되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20-22)
자기 동족 이스라엘인들을 그 위기에서 건지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자기가 위기를 맞게 된 모세는 멀리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갔다. 거기서 그는 그 땅 제사장인 이드로라는 사람의 집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는 자기 형제에게는 버림받고 이방인에게는 영접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 종종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는 배척받고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인들로부터는 영접을 받게 되는 원리를 배워야 한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땅히 이해되고 영접되어야 할 자리(고향)에서는 자주 배척 당하고, 도리어 전혀 영접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는 영접을 받아왔다.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눅4:24-30)
엘리야의 경우와 엘리사의 경우 및 주 예수님의 경우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시대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들이나 모세처럼 마땅히 영접 받아야 할 곳에서 영접 받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영접 받는 체험을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생각(상식)대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될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왜 이렇게 되는가? 일이 이렇게 되는 것은 그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기도 하다. 즉 우리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하나님의 예비하심)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나 애굽에 있는 형제들(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더라면 그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쉽게 애굽을 떠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애굽에 머물면서 그렇게 하려고 했을 것이며 거기서 자기 동족의 인권과 신앙을 옹호하는 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붙잡거나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그를 떠나게 만들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2:23,24)
애굽 왕의 핍박은 대를 이어서 계속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던 그 바로가 죽었지만 다음에 왕이 된 바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드디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때가 찬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청하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셨는데 이제 비로소 그것이 시작되었다. 이 말은 그 동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그렇게 애타게 부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아마도 그들을 핍박하던 애굽 왕이 죽기만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즉 히브리인들을 핍박하는 정책이 오직 그의 개인적 성향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일은 그들의 생각대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는 죽었지만 핍박은 여전했으며 오히려 강도를 높여갔다. 그들은 이 문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지 못했다. 왜 이전까지 그들을 선대하던 애굽 왕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들을 핍박하게 되었는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왕이 죽어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적어도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은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때가 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때를 말한다. 즉 때는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정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배가 부르거나 그들의 관심이 다른 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찬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낮아지고 열리도록 기다리고 상황을 조성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3:1,2)
모세는 어느 날 양을 치다가 호렙 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꽃이 타오르는 광경을 통해서였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나무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하게 여겨 다가갔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므로 친히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실 수는 없다. 대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며 때로는 불이나 바람이나 음성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신다. 여기서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불과 음성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떨기나무는 가시덤불 즉 가시나무를 의미한다. 이것은 많은 잎이나 열매로 덮여 있는 보기 풍성한 나무가 아니라 가지와 가시만 앙상하게 있는 형편없는 몰골의 나무이다. 모세는 그동안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 이 보잘것없는 나무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이 가시나무는 오랜 목동 생활 속에서 늙고 초라하게 된 모세 자신을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애굽에서 학대를 받으며 종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몰골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심에 있어서 왜 이와 같이 가시나무에 불이 붙은 모습으로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초라한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 가시나무에 불이 붙었다면 얼마 안 가서 다 타 버리고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나신 그 떨기나무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그 나무에 하나님의 생명이 더하여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가시나무로 표현된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 자체는 보잘것없고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풍성한 생명도 능력도 소망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힘있게 타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한 늙고 무기력해진 모세와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이러한 계시를 통해 모세를 부르시며 그로 애굽으로 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도록 격려하셨다.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의미에서 언제나 가시덤불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니라 남의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 땅에는 그 땅대로 지배하는 주인이 따로 있다. 그것에서 형통해야 할 자들이 따로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땅에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잘 풀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그 땅에서 계속 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땅을 나와야 할 사람들 곧 애굽을 나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하루 속히 그 땅에서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러) 나와야 할 자들이므로 거기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잘 풀려서는 도리어 곤란하다.
오늘 우리는 이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삶이 어렵고 곤고한 것으로 인해 탄식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결코 궁극적인 저주와 실패의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속히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다. 그리고 땅의 상황이 어려운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상황이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저주를 하심으로 그들의 환경이 매우 어려워지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여기의 저주는 물론 죄의 결과로서 문자 그대로 저주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축복이기도 하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분명히 괴로운 일이지만 타락한 인간은 그런 환경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한편으로 좋은(필요한) 환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서 잠시 사는 동안 육신적으로 편치 않은 세월을 보내게 되더라도 그것을 너무 지나치게 괘념하지 말고 더 큰 인생, 더 큰 목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소망을 인하여 마땅히 고난을 귀하게 여기고 달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