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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2:11,12)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 모세는 히브리인이면서도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어 애굽 왕궁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자기의 히브리인 친어머니에게서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양육을 받았다. 하나님은 과거에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큰 민족으로 키우기 위해 요셉을 애굽 왕궁으로 인도한 것처럼 지금은 모세를 그리로 보내 자기 백성을 구원할 지도자로 키우셨다.

40세의 성인이 된 모세는 어느 날 자기 백성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서 큰 고역을 하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애굽 감독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서 그를 쳐죽여 버렸다.
당시 애굽 감독이 히브리 노예를 학대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애굽 왕실의 왕자 위치에 있던 모세가 그것을 보고 나서서 살인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동족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지나칠 수가 없었고 더구나 약자가 억압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애굽 왕궁에서 왕자로 양육을 받으면서 상당한 수준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구원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의에 대한 인식 즉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및 학대받는 자를 구원코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일을 통해 모세가 몸은 애굽 왕궁에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히브리인은 노예와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숨기지 않았으며 형제들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행7:23,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모세가 이런 일을 한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모험을 한 것이다. 당시 애굽의 분위기는 히브리인들을 어떻게든 누르고 없애려고 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히브리인의 입장에 서서 애굽인을 대적한 것은 죽음을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2:13-15上)

동족을 구하고자 하는 모세의 구원자로서의 사역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선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그들의 구원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다. 첫째, 모세의 자질이 아직 자기 백성을 구원할 정도로 충분히 숙성되지 못했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역시 아직 하나님의 구원을 그렇게 절박하게 구하지 않았다.

당시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을 건지고자 하는 마음이 확실히 있었는가? 적어도 사도행전 저자는 분명히 그렇다고 증거하고 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행7:25-28)

그러나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혈기와 능력으로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므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찼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때가 찼느냐 하는 것은 첫째, 구원자가 준비되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하고, 둘째, 구원받을 자들이 준비되었느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형제들을 그의 혈기대로 구원하고자 한 그때는 모세가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의 모세는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나타내면서 자기 백성을 인도해 낼 정도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몸이 괴롭기는 하지만 아직 애굽에서 당장 나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일으켜서 자기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모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모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애굽을 떠나게 되었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2:15)

모세는 애굽을 벗어나 미디안 광야로 갔다. 미디안 광야는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는 땅이었다. 거기서 그는 그 땅 제사장인 이드로라는 사람의 집으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드로의 양떼를 지는 목자로 40년을 살았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더니"(3:1上)

모세는 그 형제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살인자가 되었고 이제는 형제들에게 배척을 당하여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거기서 잠시 피난 생활을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햇수와 같은 40년을 보내야만 했다.

40세에 애굽에서 나온 모세는 80세가 되도록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그의 인생을 보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압제 당하며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그는 왜 구원자로서 일하지 못하고 지극히 미미한 일을 하면서 그의 인생을 다 소진해야만 했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급한 그때에 어째서 모세를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의 젊음을 다 소진할 정도로 오랫동안 한가롭게 양이나 치게 하셨는가? 그것은 모세라는 사람을 소진시켜 없애기 위함이었다. 확실히 하나님의 의도는 모세를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자아를 소진시켜 완전히 없애고자 하셨다. 모세가 필요치 않아서가 아니라 모세라는 육에 속한 인간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낮추고 또 낮추어서 그를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잡힌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역사하셨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통해 모세 속에서 완고하고 딱딱한 옛 사람의 인격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적합한 부드러운 인격을 함양하기를 원했다. 또한 그러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리셨다. 애굽의 압제가 심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아직도 살 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을 조급히 서두르시지 않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역을 위해 구원자를 준비하시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모세는 그의 육체적 능력이 가장 왕성했던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손으로 형제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혈기 왕성했을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가진 (애굽 왕자로서의) 권위와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인정치 않았다.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그가 그때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거나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옳았고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 마음도 없었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아무 인식이 없었다. 단지 자기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과 능력을 따라 일하려 했을 따름이다.

사람은 아무 능력도 없는가?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세상의 잡다한 일을 처리하며 세상 안에서 세상의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 자신이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 임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사람을 건져 하늘로 옮기는 일은 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사람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이끌고 싶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속에서 마음대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재주가 많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한다. 자기를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에 참여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서 배척을 받은 것은 모세가 그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든지 그의 객관적인 자격이 구원자로서의 자격에 미달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로서 그리고 백성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자로서 충분한 구원자의 권위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단지 백성들에게 있었다. 그들의 완고함과 졸렬한 마음이 문제였다. 그들은 옥석을 가리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구원자를 소중히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의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모세가 누구였든지 개의치 않았고 단지 그가 자기를 책망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모세의 정체를 동네방네 떠들며 까발렸고 그 때문에 모세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백성들의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서 모세 자신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모세는 아직 자신의 문제는 알지 못했다.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은 모세는 크게 실망하여 광야로 숨어 버렸다. 거기서 그는 (아마도 배신감 때문에) 자기 민족의 일을 잊고자 했다.

사실 모세는 얼마나 실망스러웠겠는가? 수십년간 자기의 정체를 숨기며 조심스럽게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던 사람이 위기에 처한 어떤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며 도움을 주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과 파멸밖에 없었다면 그는 다시는 그 사람을 돌아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광야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 모세는 그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도 서서히 포기했고 더 나아가서 무언가 큰 일을 해 보리라는 야망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다 같이 실망하고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는 스스로는 즉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 결과 모세는 '그 온유함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민12:3) 온유하다는 부드럽다(mild, flexible)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 것이 없다는 말이다. 죽은 사람만 온유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셨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셨어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그 사람이 땅 위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대표하고 나타내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고 우리 자신(육신)만을 대표하고 나타내도 되는 자라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되고 육체의 욕망을 좇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마음대로 살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성질을 좇아 살아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그 속에서 누군가를 나타낸다. 사람은 자기보다 큰 자를 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않으면, 사탄을 담고 사탄의 거짓말과 살인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중립이나 공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육신이 괴롭더라도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육신대로 하면 그 순간 사탄이 틈을 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그릇되게 표현하도록 만들게 되며 그것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80세 이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잘 헌신했지만 그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 거듭 반역하고 악하게 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분노한 나머지 자기 위치를 잃고 말았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어야 하는 자기 위치에서 순간적으로 벗어나 혈기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었다. 그 일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볍게 보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표하는 자요 사실상 하나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가장 조심하고 힘써야 할 것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손상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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