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1:17)
지난 주일에 이미 산파들이 이스라엘 집에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일을 처리한 것에 대해 약간 살펴보았지만 오늘 이 일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히브리 사람들이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자 위협을 느끼게 된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고 명했다. 그러나 바로의 명을 받은 히브리 산파들은 왕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왕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왕의 지시를 어기고 히브리인의 남자 아기들을 살렸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도박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었다. 그들이 그와 같이 극히 위험한 일을 대담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이스라엘을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애굽에서 건져 큰 나라로 만드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은 훗날 라합이 죽은 우상을 섬기는 자기 민족을 버리고 생명과 권능의 하나님을 택한 것과 같은 믿음의 행동이었다.
모든 사람은 다 날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 이 일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이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인가 저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는 이런 선택이 날마다 우리 앞에 놓인다. 산파들은 애굽 왕과 하나님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애굽 왕의 지시를 들어야 할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할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애굽 왕의 권세가 더 큰지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더 큰지를 먼저 판단해야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산파들은 애굽 왕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할 자로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애굽 왕은 당시 온 세상에서 가장 큰 자요 가장 두려워하여야 할 자였다. 그러나 산파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더 큰 왕을 알았고 그를 세상 임금보다 더 생각하였으며 더 두려워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산파들이 단지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핍박하는 세상 권세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눅12:6)
산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생각하시며 그들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그들을 위해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잊지 아니하시며 그 목숨을 보존하신다면 애굽 왕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해치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백성을 해치라는 잘못된 지시에 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의식을 하든지 의식을 하지 않든지 간에 그 일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 어떤가를 판단하고 일을 한다. 그래서 할 만한 일이면 하는 것이고 할 필요가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그것을 판단하는가? 어떤 사람을 돕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아닌지를 어떤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소중히 여기는 자를 우리도 사랑하며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람들이 다 바보라고 놀리고 쓸모없다고 버리는 자라도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끼신다면 우리는 그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시각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 권력과 질서에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권력과 질서를 따라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1:20上,21)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2:1-4)
산파에게 은밀하게 내린 지시가 무용하게 되자 애굽 왕은 아예 모든 히브리인들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강물에 버리라고 직접 지시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살인을 명령한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요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정면으로 바로를 거역할 수밖에 없었다.
모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그들 사이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왕의 지시를 어기고 집에서 기르다가 아이가 커지자 상자에 담아 강에 띄워보냈다. 이러한 행동은 산파들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한 갈대 상자에 아이를 담아 나일강에 놓아두었다. 모세의 부모가 이렇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과 비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 기꺼이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가 죽어서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이와 같이 모세의 부모 역시 아이가 죽을 것을 예상하고 아이를 물에 놓아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와서 그 아이를 거둘 것을 믿고 그렇게 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아이의 누나를 시켜서 그 일이 어떻게 되는가 보게 하였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11:23)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행7:20)
그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아이를 그렇게 보호하고 살리려고 했는가? 그것은 그 아이가 준수한 아이 즉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위해 택하신 아이라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부모는 그 아이가 단지 아름다운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산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붙잡고 있는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것은 모세가 나중에 장성한 후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명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형제들의 형편을 돌아보고자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행7:23) 모세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릴 때 그 모친으로부터 믿음으로 양육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평범한 어머니가 어떻게 아들을 그렇게 양육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에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2:5,6)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2:10)
모세가 바로의 딸의 눈에 띄어 그의 아들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상황을 그렇게 되도록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세의 부모는 왕궁의 여인들이 목욕을 하러 나오는 길목을 알아놓았다가 그곳에 아이의 상자를 놓아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한 바로의 딸로 하여금 바로의 명을 어기고 모세를 건져 아들로 삼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왕궁으로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된 일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고 있는 세상 임금 애굽 왕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애굽 왕실을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끔 그를 바로의 딸에게 보내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긴다. 그러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지며 세상을 알게 하시며 세상과 싸우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기회를 가지게 된다.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행7:21,22)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2:7-9)
강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를 결국은 도로 그 어머니가 키울 수 있게 된 이 놀라운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 부모의 믿음에 대해 응답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정신으로 무장된 채 성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환경을 조성하신 것이다. 믿음의 어머니보다 더 모세를 믿음의 사람으로 키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