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과 누가 주를 따르는가
요한복음 6장
46.생명과 계시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6:59-71)
떡을 만들어 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주님이 자기를 생명의 양식으로 제시하시며 “내 살과 피를 먹으라”고 말씀했을 때는 사람들 안에는 갈등과 의문이 생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걸려 주님을 떠났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들이다. 주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었다. 그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설사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앞에 있는 분이 하늘로부터 온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5-17)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이 지식(계시)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빛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이야말로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혜와 총명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이 계시가 분명하기를 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우리가 만일 주님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나 병을 고쳐주시는 분으로만 안다면 주님이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잘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아들이요 ‘우리 자신의 움직일 수 없는 운명(생명)’으로 안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원천은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빛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결국은 그를 떠나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대개 진리의 말씀에 부딪혀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자기대로 이해하고 자기 필요에 따라 따르기 때문에 주님이 하늘에 속한 말씀을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육신적 문제를 이야기하면 잘 알아듣지만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 말하면 못 알아듣는 것이다.
땅에 속한 일, 육신적 문제에 대해 말하면 아무리 어려운 비유나 풍유를 써도 결국 알아듣는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일, 진리에 대한 것을 말하면 아무리 쉬운 말을 써도 못 알아듣는다. 사람이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도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상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려는 주님의 의도도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만일 유대인들이 진리를 사모하는 자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요 하나님의 약속(약속의 성취)을 기다리는 자들이었다면 주님이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을 달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인체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격과 정신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주님은 사람들이 떡이나 병 고침보다도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길과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살과 피는 사람들의 심령을 새롭게 하기 위한 주님 자신의 희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그리스도의 떡을 노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을 노려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떡이 아니라 심령이다. 주린 배가 문제가 아니라 우매무지한 마음인 것이다.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인 것이(아모스 8:11) 이스라엘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영을 되살려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들의 운명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새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4-7)
주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의 구원자를 깊이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또 주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안에서 비춰진 바 인생이 돌아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기를 원했다. 그 길은 바로 주님과 같이 아버지의 뜻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아들의 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육신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도리어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이런 어리석음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으므로 표적(기적)을 구하지만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람들이므로 지혜를 구한다고 했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지도 않은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것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십자가 못 박힌 그리스도(사람의 죽고 거듭남)를 구하지는 않는다.
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생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 알았고 그것을 위해서 믿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사람들, 신앙적인 사람들은 항상 표적을 구한다. 그들은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뜻과 목적 안에서 사람을 부르시며 찾으신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때 언제나 자기의 뜻과 목적과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찾는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잘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애굽에서 노예로 시달리던 그들의 가난하고 곤고한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주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줄 존재를 찾는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해방시켜 주시자 그들은 감사하며 하나님을 믿었다. 그러나 때로 그들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 그들은 금방 하나님을 원망하며 거역하였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그들이 생존 문제, 생활 문제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보면, 몸이 아플 때 하나님을 찾아서 건강을 얻으면 ‘하나님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감사한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다시 건강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안되면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왜 건강을 안 주십니까?’ 하고 원망을 하게 된다. 밥을 먹여줄 때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은혜로 이렇게 밥을 먹고 있습니다’ 하고 감사하다가 밥이 떨어지면 ‘하나님 밥을 빨리 주십시오’ 한다. 그러다가 밥을 안 주면 ‘하나님 왜 밥을 안 줍니까? 하나님 우리를 버리십니까? 당신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고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바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육으로 알았으며 육의 필요를 따라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육신적 필요를 채워달라고 구할 수 있다. 처음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다 이런 자리에서 시작한다.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미약하고 환경은 어려우므로 사람이 범사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 농사가 잘 되는 해도 있지만 가뭄이나 홍수, 병충해 때문에 농사가 잘 안 되는 해도 있으며, 몸도 건강할 때가 있지만 병들고 약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사람 스스로 고치며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힘들 때도 있는 것이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없이 어떻게 그곳을 나올 수 있었겠으며 홍해 앞에 선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어떻게 그것을 건널 수 있겠는가? 또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 없이 이스라엘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도록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계속 머무르는 것’이다. 자기의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계속 그 세계에 머무르면서 항상 하나님을 육적으로 찾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끝까지 그런 것에 신경을 써주시며 그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신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목적과 일이 있다.
사람을 위하시고 돌보심에 있어서도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며 사람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사람이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를 살게 하려는 분이며 사람이 좋은 것을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사람이 양식을 구할 때 그것을 지체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잠시 배부르게 하는 양식보다 더 좋은 것 즉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일에 대해서는 관여하시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관여를 안 하실 뿐 아니라 전혀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필요에 다 응답하신다면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누구도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적 필요로 인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느 시점에 가서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가 돌아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원망이 돌아오는 일이 있다. 전혀 도와줄 의무가 없는 남을 도와주면 대개 감사가 돌아온다. 그러나 친척이나 친한 사람 곧 우리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원망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 대해 ‘저 사람은 당연히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와줄 때는 감사하지만 다음에 또 도와주지 않으면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친척이나 이웃을 돕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을 보고 돕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할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꼭 이런 식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를 때 하나님이 자기의 육적 필요를 당연히 채워주실 분이라고 생각하고 따랐기 때문에 그것이 만족되지 못했을 때는 그들 안에서 꼭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끝없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항상 불평과 원망이 뒤따르는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생활을 보장하시는 분으로 믿었고 의지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머물지 않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를 불러내신 것은 떡이나 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서 살게 하려는데 있다. 그를 알고 그를 닮은 아들로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말하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믿음의 조상이 누구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믿음의 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그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이 경험한 세계를 살펴보면, 그도 처음에는 땅을 얻고 가축들을 얻고 종들을 얻고 해서 물질적 환경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결과 하나님이 그의 생명과 생활의 보호자요 공급자가 되심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경험은 중요한 경험이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반드시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초적인 믿음의 세계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다음 단계로 도무지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런 경험들은 과연 오늘날까지 그의 믿음의 후손들이라 할 수 있는 여러 교회 신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이런 저런 응답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고 어떤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얻고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다음 단계로 이끄셨다. 그것은 후사를 얻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육신의 생존 문제, 생활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유지와 확대, 충만에 관계된 문제요 ‘아들’의 문제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된 문제였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아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속으로 ‘과연 그렇지요’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아들은 그냥 일반적으로 아들을 낳는 것과는 달리 육을 따라 나는 아들이 아니라 약속(영,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나는 아들이었다. 사람이 아들을 낳아서 후손을 이어야지 하든지 아들을 낳아서 노후에 나를 봉양하게 해야 하겠다든지 아들이 하나 있어야 재미가 있지 하는 생각으로 낳는 아들은 육의 아들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필요에 의해 자기 힘으로 낳는 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아들은 그런 육적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필요와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아들이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약속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아들 곧 영적 아들을 낳으려면(얻으려면)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룸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적 인간에게는 육적 아들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역시 처음부터 당연히 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을 기다렸으나 나이는 먹어 가는데 그것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자 아내와 의논하여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약속을 따라 낳은 아들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육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낳는 아들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성되어야만 한다.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나와야 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다가 그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육을 따라 행하여 육적 아들을 얻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를 따라 약속의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다. 할례란 육을 제거하는 표시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육적인 자리에서 탈피하여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가 자기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사는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양식만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가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그처럼 애굽도 안 될 이유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을 받아 이 자리에 있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진정한 문제라면 그것은 세상에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굳이 세상을 떠나 이리로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만 한다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으며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 우리를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옮기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로 썩어질 영광을 구하는 자리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일(구원)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약속의 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 아들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을 위할 자가 될 수 있다. 그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기꺼이 제물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아들을 낳도록 요구받았다. 그것은 스스로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일이었으며 자기의 육적 필요를 위해 낳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낳는 아들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육을 제거하는(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표시로 할례를 받았다.
디베랴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은 백성들도 바로 아브라함과 같이 육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육적인 자리에 계속 머무르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들은 이미 육체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아들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주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필요로 했던 것을 그들은 몰랐다. 이 점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망설이게 된다.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그것을 싫어하겠는가? 하나님이 계신지 몰라서 안 믿지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마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좋다 하고 기꺼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려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걸려 넘어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그런 하나님이 계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어려울 때 즉시 달려와서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넘어서 ‘이제 너는 할례를 받고 하늘로부터 오는 아들을 추구하라’고 할 때 생기는 것이다. 육을 좇으며 너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나의 목적을 위해 살며 영을 좇아 살아라고 요구하실 때 사람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를 먹이실 때는 그것을 반대하거나 무슨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고민이나 회의에 빠진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너희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할 때는 많은 사람이 고민하다가 걸려 넘어졌다.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할례는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다. 이것은 다 사람을 바꾸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전에는 육이었으나 십자가를 거친 후에는 영이 되는 것이다. 전에는 육을 따라 사는 자였지만 십자가를 지나면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에는 자기 필요를 위해 사는 자였지만 십자가를 거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에는 사탄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었지만 십자가를 거친 후에는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은 꼭 필요하다. 괴롭지만 십자가 없이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떡을 먹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따랐으나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먹고 마시라는 말을 들을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따르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주님을 계속 따를 수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더 이상 따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63)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준 떡은 단지 육에 지나지 않지만 그 떡을 통해 상징된 내 살과 피 곧 내 자신은 너희에게 살리는 영의 양식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물론 가룟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영이요 생명이신 주님 자신을 목표로 삼으며 그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필요를 버리지 않고 육신대로 주님을 따른다면 그는 결국 예수를 팔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따랐지만 결국 끝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광야에 엎드러지는 것만 남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룟 유다나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육으로 하나님을 따랐다가 망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육의 필요를 따라 예수를 좇아가는 사람은 예수를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결국 예수를 버리게 될 것이다.
가룟 유다는 특별히 악한 사람인가?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그만 다른 제자들과 달리 특별히 악하고 불신앙적인 사람이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그는 그만큼 자기 필요가 분명했던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성취되지 못하게 되자 예수를 판 것이다. 누가 예수를 버리며 파는가? 악한 자가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며 의지가 약한 자가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육으로 예수를 좇는 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예수가 자기에게 평안을 주며 문제를 해결해 줄 때는 좋아하고 따르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이제는 예수가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며 온갖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자기가 하던 모든 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믿는 예수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교제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일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허깨비에게 홀려 헤매는 것인가? 갑자기 큰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그가 예수를 영이요 생명이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육으로 좇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만 필요로 하던 사람들은 그 능력이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를 육으로 알지 말고 영이요 생명이신 분으로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계시가 필요하다.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자신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과 풍성한 모든 공급이 다 좋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 자신을 능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다 우리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고 그를 알도록 하기 위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모든 것은 다 아무 의미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모하지만 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밥을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밥은 왜 필요한가?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목숨은 무엇 때문에 유지해야 하는가? 만일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즉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모른다면 우리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답을 얻지 못했으므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에게 떡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또 실제로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광야에서 떡을 먹은 사람들은 떡보다 떡을 주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았어야 했다. 떡은 영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떡을 주신 분을 참으로 알았다면 떡 문제도 해결하고 떡 문제보다 더 중요한 그들 인생의 근본적 모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선물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사람의 진정한 결핍은 그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있다. 즉 그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속에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회복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는 한편으로 참 하나님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참 사람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의 본래 모습이다. 하나님의 장막(영)이 사람 안에 거하는 것(계21:3) 이것이 바로 본래 사람의 모습이요 또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러한 자리에 있기 위해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아들의 생명이 충만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육적 필요에 따라 그를 신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좋으나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의지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의 의와 진리, 그의 거룩과 사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도와주고 도움을 받고 하는 세계가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제것으로 받아들여서 사는 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아들의 자리로 불렀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삼고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무엇을 하게 하든지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별개의 자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믿을(따를) 수 없다. 어떤 여자가 아이를 낳기를 원하는데 눈은 이렇게 생기고 코는 저렇게 생기고 입은 이렇게 생긴 아이를 꼭 낳겠다고 한다면 그는 시집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그런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 생긴 대로 아이를 낳게 될 수밖에 없는데 꼭 자기가 원하는 모양을 낳으려고 하면 결혼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닮은 아이를 낳으면 되지 하고 생각해야 쉽게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따르는 자가 자기 인생이 꼭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주님이 자기 생각대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주님을 더 이상 따르지 못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주의해야 할 것은 선한 일이냐 악한 일이냐가 아니라 영으로 하느냐 육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다 내 뜻을 섞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 보면 특별히 잘못된 것이 없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라고 하셨고 사라는 늙어 생산할 수 없으니 종을 취하여 아들을 낳은 것이 무슨 잘못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할례 없이 행한 육적 일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다. 그 육으로 난 자식이 약속을 따라 난 영의 아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육으로 난 것, 내가 내 필요를 따라 행하여 얻은 결과는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결국 예수를 팔고 만 가룟 유다의 행위처럼 하나님의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다. 떡만 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망이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추구한 가룟 유다의 욕망이나 다 결국은 십자가 앞에서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뿐 아니라 자기 필요를 따라 주님을 좇는 모든 사람은 다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오직 영생을 사모하여 영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만 끝까지 주님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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