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과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
요한복음 10장
72.그리스도를 밝히 아는 지식 (10:25-29)
주님이 정말로 메시아(그리스도)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탐색했으나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결국 주님에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라고 요구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으므로 자기를 메시아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고 버리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주님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주님은 항상 자기가 하늘에서 온 분임을 밝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것으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10:26,27) 양은 목자를 알아보지만 양이 아닌 자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의심하고 탐색만 하다가 끝내 떠나고 만다. 주님을 거절한 유대인들도 주님이 행하는 많은 기적과 선행을 보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육체대로만 판단하는 사람은 결코 영에 속한 사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눈의 문제 즉 빛의 문제, 계시의 문제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2,23)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9-1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빛과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싶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이단이나 거짓 선생을 분별하여 거절하거나 참 형제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든 마귀든 다 영적 존재이므로 영적 눈이 어두운 사람 곧 사람을 오직 외모(육체)대로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분별이 되지 않는다.
73.하나님의 아들인 사람 (10:30-39)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에 대해 걸렸던 부분은 주로 율법과 관련된 것이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거나 성전을 허물라고 말한 것 또는 율법 선생들을 낮추어 말한 것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크게 걸림이 되었던 것은 주님이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화, 동등화한 것이다.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분노에 차서 주님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선한 일로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고 했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하셨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그렇게 생소하거나 교만한 말이 아니었다. 주님은 시편 82:5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은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졌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會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저희는 無知無覺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神들이며 다 至尊者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凡人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같이 엎더지리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시82:1-8)
여기서 시인(아삽)은 하나님처럼 공의를 행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책망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적합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켜서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다. 사람이 반드시 공의를 행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삽에 의하면 그 까닭은 사람이 神이요 지존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같이 사람(아들)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레11:44)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행하기를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의 대표자였다. 그는 자기를 일컬어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보통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일진대 그들의 근본이요 하나님의 독생자인 그리스도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가? 그들은 왜 주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한 것에 대해 그렇게 놀라고 분노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 자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자요 마귀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2,44)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곧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찌 감히 그렇게 될 수 있느냐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이나 경건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버리고 자신을 스스로 마귀의 종으로 낮추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을 위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땅에 기어다니는 한 마리의 동물처럼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는 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 것이다.
아담(인류, 육에 속한 자)은 하나님을 대하여 항상 다음과 같은 태도(관계)를 취해왔다.
첫째,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도 않고 주권자로 삼아 복종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하겠다는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권위를 알지도 못했고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애를 쓴다.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고 굉장한 업적을 이룸으로써 인간의 위상을 높이고 이름을 떨쳐서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며 천사나 다른 무엇도 될 수 없었고 오직 마귀에게 속아 그 종노릇을 하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을 뿐이다. 인간은 자기를 나타내고 그 힘을 결속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지만 그것은 자체의 모순과 약함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성경은 바벨탑을 하나님이 무너뜨렸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인간 자신의 한계와 모순에 부딪혀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그 무너짐은 곧 인간의 무너짐이요 사람이 만든 영광의 무너짐을 상징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과학 기술을 쌓는 일이나 문명을 이루는 쪽에서 뿐 아니라 도덕과 종교 같은 정신적이고 신비적인 영역에서도 이루어졌다. 즉 신을 섬기려고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사람은 이제 신의 자리에 이르기 위해 신과 접촉하고 신을 숭배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기는 갖되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탕자의 삶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종교의 실상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할 사람이 그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을 멀리서 경배하면서 필요에 따라 도움이나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절하는 또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을 아예 안 믿고 거절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가까이서 경배하는 것이 사실은 하나인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삶은 다 같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행동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똑같고 또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똑같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생명과 본질)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임과 동시에 본래 형상(모양)이 없으신 하나님을 형상화한 존재이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1:1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
사람은 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고 만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복사한 존재이다. 그리스도와 사람의 관계는 아담과 하와의 관계와 같다.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사람의 원본이고 하와는 그 아담에게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람의 본래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슬러 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말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아들로 살 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해만 없다면 우리는 사람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神)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神)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10:34-36)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종교적인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을 하나님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을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지나치게 가까이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된 영광스러운 위치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자기 뜻대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마귀의 거짓말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 자신이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라는 틀을 유지하려는 종교인들의 겸손은 위장된 거짓 겸손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귀히 여겼다면 하나님의 이름만 그렇게 존귀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했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거나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주님은 자신이 스스로 그러한 태도를 취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이끌고자 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이것을 꺼렸고 그 때문에 주님을 거절하며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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