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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과 외식하는 자의 소경됨

이상봉 2010.05.05 13:18 조회 수 : 2807

제41과 외식하는 자의 소경됨

 

요한복음 9장
 

65.외식하는 자의 소경됨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있던 걸인을 고쳐 앞을 볼 수 있게 해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소경으로 있던 자를 불러 경위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었다. 그가 사실을 말하자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실은 믿지 않았다기보다 인정하기가 싫었다. 그 싫은 첫째 이유는 그 일이 자기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 ‘뿌리 없는(바리새파나 정통 유대교 지도자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그가 (자기들이 중시하는) 안식일에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경 되었던 자에게 너를 낫게 한 이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선지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기대한 답은 아니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자에게서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자 그의 부모를 불러 물었다. 그러나 그 부모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면 출교 당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정을 잘 모른다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자를 다시 불러 재차 물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 말은 그들이 빠진 진퇴양난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소경으로 있다가 나았다는 사실은 객관적 사실이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수가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으니 결국 예수 때문이 아니고 저절로 나았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단순하지 않고 자기의 많은 헛된 일로 복잡한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3,8)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단순)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 마음이 복잡하고 혼잡스럽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이었다가 나은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재차 다그쳐 묻자 그는 당당히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다. “내가 이미 일렀더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에 바리새인들은 그를 욕하며 비난했다.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8:28,29) 이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진술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소경 되었다가 나은 이 사람의 말처럼 참으로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일이 바로 여기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누구라도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과 행동과 하는 일이 그것을 명백하게 입증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이 가난(겸손)하지 않고 상한(통회하는) 심령을 가지지 못한 이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이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13:11-16)  


이것이 바로 불행이고 저주이다. 마음이 높고 교만하여 자기의 죄인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영원히 생명의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 자기 필요가 따로 있고 자기 생각이 따로 있어서 그것이 하나님의 것과 상충되는 사람은 결국 그의 복잡한 길 가운데서 헤매다가 망하고 말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이룩해 놓은 종교와 전통과 지식, 사람들로부터 지도자요 선생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그들의 명예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요 병들어 죽어 가는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십자가를 몰고 왔음을 알았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삶의 길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 25) 


66.그리스도와 진리로 인해 세상에서 쫓겨남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9:34,35) 결국 예수가 자기를 고쳤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거한 소경 되었던 자는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이것은 사실상 그가 그 사회에서 축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주님이 그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9:39) 이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마귀의 길이다. 이 둘은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화목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 왜 그런가? 그리스도의 길, 생명의 길이 세상 길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안타깝지만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 주님을 사랑하든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주님을 택하고 세상을 버리든지 아니면 세상을 택하고 주님을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소경 되었다가 나은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택했다.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을 때 주님은 그를 만나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믿느냐를 물은 것이다. 이에 그는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때 주님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소경 되었던 자는 즉시 엎드려 절하면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님을 영접했다. 

 

이로써 그는 주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이제 눈(目)의 구원뿐 아니라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믿든 예수님을 믿든 세상에 그대로 머물면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세상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려면 세상 나라에서 완전히 나와야 한다. 물론 세상을 물리적으로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의 원리와 내용은 완전하게 달라져야 한다.  


67.외식하는 자들을 심판하심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되 생명으로 알지 못하고 율법(지식)과 의식으로만 아는 것은 눈뜬 소경처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이러한 상태에 있었다. 종교적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 때문에 자기들이 대단히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자기들 같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부르시며 인정하지 않으셨다.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데서도 표면적일 뿐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표면적이다. 그들은 사람의 속에 있는 생명을 보지 않고 언제나 겉모습만 본다.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보지 않고 단지 그의 육체적 모양과 말만 듣고 판단한다. 이런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율법이다. 이들은 사람의 권세(권위)를 논할 때에도 그의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영적 권위를 보고 판단할 줄 모르고 오직 사람의 표면적인 직책만으로 권세의 유무를 판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눈뜬 소경인 것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솔직하게 ‘저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어두운 소경입니다’ 라고 하며 스스로를 소경과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셔서 그로 보게 하고 의롭게 만드신다. 그러나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하는 교만한 사람들에게는 그 눈을 더욱 어둡게 하여 영원히 보지 못하게끔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지켜 본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소에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으로 고생하던 자기들의 형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그를 비난하고 쫓아내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고침 받은 그 소경은 평소에 유대인들로부터 무식한 죄인으로 멸시받던(요7:49,9:34) 자였으나 바리새인들로부터 자기를 고쳐준 사람을 (안식일을 위반했으니) 죄인으로 인정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그것을 거절하고 예수를 인정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면 출교한다고 선포해놓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요 가난한 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다. 율법과 종교에 대해 무지했던 소경은 진리(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를 볼 수 있었는데 소경이 아닐 뿐 아니라 스스로 영적 눈이 밝다고 자칭하던 바리새인들은 왜 진리를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그 소경에게는 가난함이 있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잘났고 누가 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복이 있고 어떤 자리에는 복이 있는데 비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복이 없고 어떤 자리에는 복이 없다는 것이다. 

 

본래 무지하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사람의 자리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자리 이상의 것을 쌓아놓은 사람들 곧 너무 많은 것들(자랑할만한 지식과 지위와 육체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자리로 내려가서 은혜를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소경은 외식할 것도 외식할 필요도 없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아들이라는 사실과 은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과 형제인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겨야 할 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단순하게 사람의 자리 곧 하나님께 대해서는 아들이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형제의 자리에 서 있지 아니하면 발견되어지지 않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실 때 박사로도 위대한 자로도 특이하게 종교적 분으로도 오시지 않았으며 오직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분으로 오셨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지음 받은 진실한 사람으로 참 아들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한 사람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실제적인 외식도 불가능하다.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고 나는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이 진실한 것이다. 이 진실한 것 즉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라는 사실 외에 그 어떤 것(지식, 지위, 외모, 재물)도 다 ‘꾸민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 아무리 자기를 치장하더라도 결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은 아무 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만일 그 꾸민 것들로 인해 자기가 마치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 아닌 그 무엇이나 된 줄로 생각한다면 그는 큰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런 자가 바로 외식하는 자(위선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눈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점점 더 어둡게 되어 마침내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저희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다.(요8: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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