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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교회의 모형인 하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만이 아니요 하와를 함께 창조하셨다. 이 두 사람은 각각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즉 아담은 그리스도를, 하와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5:14)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15:45)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3,24)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1,32)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한편으로는 교회를 통해서 성취된다.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와가 말해 주고 있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중요하다. 우리가 하와가 아담에 대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바로 알게 되면 교회의 위치는 저절로 알게 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하와)는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예표이고 에베소서에 나오는 여자(아내)는 창세기의 여자가 예표하고 있는 교회의 실체이다. 창세기 2:18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돕는 배필(helpmate)을 지으신다고 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신 목적은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아담만 지으시고 하와는 짓지 않은 채로 만족하시며 안식하신 것이 아니다. 하와까지 짓고 비로소 안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와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홀로 있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로마서 8:29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아들(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에다 승리하는 교회를 함께 가지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마귀를 근본적으로 이기신 그리스도에다 땅 위에서 계속 마귀의 일을 뒤집어엎는 교회를 함께 가지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 가운데서 만물을 다스리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교회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요구하신다. 교회는 적당히 괜찮은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배필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면 하와가 될 수 없다

 

아담의 배필을 정하실 때 하나님은 먼저 무엇을 하셨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2:19,20)

 

땅에서 취하여 만들어진 생물로는 아담의 배필이 될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2:21-23)

 

결국 아담에게서 나온 하와만이 아담의 배필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바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만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와가 아담으로부터(아담의 성분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담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로부터(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교회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아무리 외형적으로 교회처럼 보이더라도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가지기를 원치 않고 그와 함께 많은 아들들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많은 아들들은 반드시 독생자를 닮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지 않는 교회, [그 아들]로부터 나오지 않은 아들들의 무리는 거짓이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재료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새 사람이다. 교회는 땅의 것으로, 흙으로,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로 만들어진 그 무엇을 말한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확대요 충만 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3)

 

교회는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분이 별로 없고 인간의 성분이 많은 교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그와 참으로 다시 연합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역도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10:17)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몸은 단지 여러 지체를 함께 모아 놓은 집합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유기적 생명을 지닌 한 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인 것은 그들 안에 있는 한 떡(그리스도) 때문이지 그들의 개성이 일치되거나 이런 저런 다른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씨'와 '김씨'를 합해 놓은 것도 아니요 이런 '나'와 저런 '당신'을 합해 놓은 것도 아니며 오직 각 사람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합해 놓은 것이다. 과연 교회는 온 세상,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합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행하지 않고 자연적 인성으로 행하는 사람은 교회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인간적인 재능과 재간, 생각은 다 교회와는 무관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유능한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면 그들이 가진 이런 저런 유능한 재주들이 다 주님께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도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용이 아니고 근원이다. 사람은 언제나 이것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을 묻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이것이 어디에서 왔느냐를 물으신다. 세상에서 유용하고 좋은 것이면 교회에서도 무조건 좋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에게 천부적인 정직성이나 온유함이 있다 해도 그것이 당연히 교회에서 주님을 위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이 십자가를 붙드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성과 무능을 보지 못하고 전체적으로 자기를 신뢰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 말을 잘하는 능력이나 행정 능력 혹은 예리한 지성이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곧 바로 주님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철저히 처리된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지 교회에서는 소용이 없다.

 

땅에 속한 어떤 좋은 것도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으면 안된다. 혹자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 주제를 바꾸어 복음을 전하거나 설교를 하면 당연히 큰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 훌륭한 가수가 구원을 받은 후 그 재능으로 찬송을 부르면 그 찬송은 하나님을 크게 만족시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역사를 일으킬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도 역시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영적 일이라는 사실이다. 영적인 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으면 안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4,5)

 

문제는 사람의 자연적 재능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냐가 아니라 그것들이 성령의 통제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인 힘은 전적으로 십자가에 의해 처리되어야 하고 모든 일은 오직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힘을 의지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에 상처와 손해만 끼치게 된다. 오늘 교회로(서) 부름 받은 우리는 범사에 자신의 육적 생명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4:7)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교회로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자신은 아무 가치도 없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 두신 보배이신 그리스도만이 소중하며 우리의 존재 가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담아 두는 그릇이라는데 있다. 그릇이 질그릇이냐 금그릇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로 행하고 그리스도로 산다면 우리가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인생은 영광스러울 것이며 부족함 없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행한다면 우리의 모든 선한 것과 유능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무 쓸모 없어 버림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설사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위한 큰 일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것은 다만 땅에 속한 일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는 것과 무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주의와 교만을 분쇄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행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들이 벌여 놓은 수많은 (소위) 하나님의 일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는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오직 교회의 힘을 낭비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개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생명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몸의 생명을 또한 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든 개인주의는 분쇄되어야 하고 교제를 통해서 나 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명이 우리 모두를 완전한 한 몸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려면 두 가지 방면의 일이 필요하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증가시키는 것이고 하나는 자기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주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자기를 낮추시고 오직 성령의 능력만 힘입어 사역하셨다. 또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5:1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1:29)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머리가 되시도록 항상 허용하셨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교회도 역시 그러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가 꼭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처럼 행한다면 하나님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은 아들들을 얻기 원하셨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에게 붙여 줄 수 있는 배필로 교회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와는 아담의 잠에서 만들어졌다

 

창2:21-23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아담의 몸에서 한 성분을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만드실 때 단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이끄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끌어 내셨음을 볼 수 있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의 상태와 같다. 이 죽음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로 인한 죽음과는 다르며 하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즉 주님의 죽으심에는 구속과는 상관없는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린 데서 나온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그의 몸인 교회를 생산하기 위해 자신을 번제와 같이 드린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행위는 구속과는 무관하고 오직 죽음을 인하여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데 목적이 있다. 아담의 잠이 하와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듯 주님의 죽으심에도 구속과 상관없이 교회에다 자신을 나누어주기 위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직후 군병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때 거기서 피와 물이 나왔다. 이 피와 물은 각각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19:34)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5:6-8)

 

여기서 피는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고 물은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주님이 물을 쏟으신 것은 그가 오신 목적이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나누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주님의 죽으심이 목적하는 바 구속도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

 

피는 오직 구속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와가 지음 받을 때 피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하와가 지음 받는 것은 죄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의 하와가 예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교회는 죄와 상관이 없다. 교회는 죄인이라고 부름 받은 것도 아니고 의인이라고 부름 받은 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죄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 측면에서 교회는 죄와 상관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교회는 하와가 그렇듯 죄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지음(부름) 받은 존재이다.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교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5:25)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가 교회이기 때문에 자기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롬5장에서처럼) 주님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말씀은 오직 우리가 [교회] 즉 [자기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다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주님은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죄 문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말씀이 언급하는 바는 다만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교회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아담이 자기 생명을 하와에게 주었듯이 주님도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 있는 교회는 결코 죄와 상관이 없으며 범죄하지도 타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하와 안에서 나타난 교회는 죄와 상관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만 상관 있는 교회이다. 하와 안에서 나타난 교회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주기까지 사랑하는 자요 그와 한 생명이며 그의 배필인 교회이다. 성경에는 교회를 상징하는 여러 여자들이 등장하여 교회의 갖가지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예컨대 창세기에 나오는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은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가를 상징하고 있고, {아스낫}이 요셉과 결혼한 일과 그가 애굽에서 얻은 아들들은 다 세상에서 선택받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또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광야에서 결혼한 {십보라}는 광야 교회를 상징하고 있으며 여호수아서에서 {악사}가 출가 후에 윗 샘과 아랫 샘을 얻은 것은 유업을 받는 교회를 보여준다. 또 룻기에 나오는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구속받는 교회를 보여주며 사무엘상에 나오는 {아비가일}과 다윗의 결혼은 군대로서 싸우는 교회를 보여준다.


 

이 모든 여자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교회는 세상에서 선택받아, 구속을 입었고, 광야를 거쳐 나왔으며, 사탄과 싸우며, 유업을 받고, 그리스도께 바쳐진 바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모형들 가운데서 하와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련된 가장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반드시 하와 안에서 나타난 교회 곧 타락하기 전 죄와 상관이 없는 교회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전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 이것이 바로 하와 안에서 보여진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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