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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삶의 비결


제1장 그리스도의 보혈


이번 집회에서는 워치만니의 저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생활}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인가? 우리의 목표는 참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분명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습과는 다른 것이다. 산상보훈에 보면 대단히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표준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높은 수준의 삶이어서 그리스도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가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 예외 절 곧 [제외하고] 라는 말이 문제의 답을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올바르고도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어떤 특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상적인 신자의 삶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으로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살고 계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요구에 대해 언제나 한 가지 대답을 하신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를 제거하시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갖다 넣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전에' 죽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승리와 완전한 삶을 위해 '지금'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신다. 우리의 代行的 삶은 양면이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십자가 상에서의 대행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의 승리를 확보해주시기 위한 우리 안에서의 대행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 모든 필요를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하시도록 준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에 처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우리에게 먼저 그리스도를 좀 더 알아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이중 문제 : 범죄와 죄(sins and sin)

 

이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 1장-8장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여기에는 승리하는 삶의 원리와 비결이 들어 있다.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1:1-5:11이고 후반부는 5:12-8장까지이다. 이 두 부분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전반부에서는 범죄(sins) 곧 죄의 복수형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후반부에는 이것이 바꾸어져 죄의 복수형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단수형 죄(sin) 즉 죄 자체가 주로 다루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반부가 우리의 죄들 즉 행위로서 우리의 범죄를 다루고 있음에 비해 후반부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본질로서의 죄 즉 죄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였든지 간에 그것은 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함과 동시에 죄성 또는 죄의 권능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면 우리는 죄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게 된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면 우리는 자신이 단지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잘못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죄성(죄의 근성)은 단지 죄를 짓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이 힘이 작용할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는 이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를 갈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중 구제책 : 보혈과 십자가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문제]와 [사람을 죄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문제]라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반부에서의 주요 개념은 [주 예수님의 보혈]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혈의 필요성과 의미를 배워야 한다. 주님의 피에 대한 말씀은 롬3:25과 5:9에서 두 번 소개된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에 대해 말한다. 전반부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또는 우리의 의를 위해)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사역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게 만든 십자가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피가 인간의 행위를 다룬다면 십자가는 인간 자체를 다루는 것이다. 피가 우리의 범죄를 처리한다면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을 처리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의 범죄의 문제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5: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3:24-2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나중에 인류의 타락과 회복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죄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들어왔다는 것만 알면 될 것이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처벌이 따를 뿐 아니라 그 죄를 짓는 사람 안에 또한 [죄책(罪責)]이라는 것이 따른다는 점이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으로 들어온 죄는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교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으며 다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죄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서 교통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의 성품이 서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비해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항상 악을 도모하고 범죄하기 때문에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편의 이유이다.

 

그러나 그 이유말고 다른 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 편의 이유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절하실 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 생긴 죄책 때문이다. 죄책이란 사람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슬프게 한 것 말고도 죄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했다. 그리하여 사람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서지 못하게 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빛이 그 속에 비취면 그는 각성된 양심의 도움으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15:18)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죄의 영향은 또 다른 면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죄는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의 양심을 비난할 근거를 제공하여 우리로 죄책감을 느끼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죄는 사탄이 하나님께 우리를 고소할 근거를 제공한다. 그래서 죄로 인한 세 번째 결과는 마귀에게 하나님을 대적할 기회를 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향해 "네가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그 자가 또한 하나님을 대하여도 우리를 고발하며 큰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계12: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사탄은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목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문제(범죄에 대한 형벌, 양심의 죄책, 우리에 대한 사탄의 비난)를 함께 해결하셔야만 했다. 먼저 우리의 범죄가 처리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주님의 보혈로 처리하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속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 보혈의 가치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책을 처리하셨다. 보혈의 가치는 우리의 죄책있는 양심을 안심시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모든 비난과 공격에 대해 보혈의 가치를 선포함으로 응수하도록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과 인간과 사탄을 향한 세 방면으로 효과있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성장하려면 이러한 보혈의 세 가지 가치와 기능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과 우리와 사탄에게 어떻게 결정적으로 작용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보혈 : 보혈은 본래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보혈은 속죄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입장과 관계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다. 그 범죄가 용서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바를 묵인해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위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가장 완전하게 이해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우리 자신의 평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보혈의 가치를 아는 것은 성령께서 보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실 때이다. 보혈은 우선 하나님을 향한다. 신 구약 전체를 통해서 피는 언제나 속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피는 언제나 먼저 죄를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속죄일이란 날이 있었다. 이 날은 사람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있는 날이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속죄일에는 속죄 제물에서 취한 피를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일곱 번 뿌렸다.

 

그 날 드려진 속죄 제물은 장막 뜰 안에서 공공연하게 잡았으며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었고 누구나 그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막 안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뿌림으로 속죄를 담당한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구속 사업을 담당하시는 주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히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거니와 거기 들어가서 하는 일도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그것은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제사장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일이다. 그 혜택을 입을 사람들도 거기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은 그 피가 첫째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보다 더 초기에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하여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흘렸던 사실이 출애굽기 12:13에 나온다.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또 하나의 구속에 관한 상징이다. 그 피를 집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양의 고기는 집 안에서 먹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 역시 피는 (피의 혜택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드려지기 위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 피는 집안에서 잔치를 하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방향인 집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발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혈로 만족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도 인간에게 기어이 죄 없는 생명을 주셔야만 했던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우심 때문이다. 피에는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그 피는 나를 위하여 또 나의 범죄로 인하여 반드시 부어져야만 한다. 그 피가 부어지기를 요구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피가 흘려지기를 요구하신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히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린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피로 만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상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빛이 비취기 전까지는 우리는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 우리의 양심은 대단히 민감해지기 때문에 죄로 인해 엄청난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를 쓰러뜨리기까지 한다. 너무나 죄책에 눌린 나머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 불구자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범죄가 너무나 중대하다고 생각하다 보면 마침내 우리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보다 더 크게 보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잘못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가치를 자기의 감각으로 혹은 생각으로 느껴려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보혈의 가치를 주관적으로 감각하여 평가하려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보혈은 그렇게 발효하는 것이 아니다. 피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피에 대해 내리신 평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보혈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느낌을 통해서 평가를 내리려 한다면 우리는 양심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흑암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평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피를 보배롭다고 말씀하셨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의 범죄에 대한 대가와 우리의 구속에 대한 값으로 받아들이신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빚이 지불된 확신 가운데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만족히 여기신다면 그 보혈은 만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에만 의존해야 한다.


 

믿는 자들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보혈

 

보혈은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해드렸다. 그러므로 보혈은 우리도 만족스럽게 해 주어야만 한다. 그런고로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를 보게 되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말씀 그대로를 조심스럽게 보라. 히브리서 저자는 주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거기서 그의 말을 끝냈다. 마음과 양심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마음을 보혈과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누가 "주여, 당신의 보혈로 나의 마음을 깨끗케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면 그는 보혈의 기능을 오해한 것이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하나님도 마음을 정결케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 근본적인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것은 새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통에 버릴 옷을 빨아서 다리미질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논의하려는 것이지만 [육]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부패해서 도저히 정결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보혈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보혈의 역사는 주관적이 아니고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보혈은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보혈이 정결케 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양심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말씀은 보혈의 역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죄책의 장벽을 제거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 말씀이 믿어지고 받아들여질 때 우리 양심은 깨끗해지고 죄책은 물러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거리낌없는 양심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믿음의 마음과 무흠한 양심은 둘 다 우리에게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마음과 양심은 상호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의 불안함을 가지면 우리의 믿음은 약해져서 마침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고자 하면 보혈의 효력을 깊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셈이 분명하시다. 보혈의 가치에 대해 분명한 평가를 이미 내리셨다. 그런데 우리가 보혈에 대해 무반응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가 보혈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회피하실 수 없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은 오직 보혈을 근거로 나아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오직 보혈을 의지하고 가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피를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의 고백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그 안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으며, 정결케 되어야 하며, 속죄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공로만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어떤 근거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친절했고 화를 안내었다든지, 새벽기도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든지, 기타 어떤 특별한 봉사를 했다든지 하는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기 쉬운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선한 일을 행한 후에라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워 놓은 표준에 이를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거리낌이 없는 양심은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혈을 흘리신 주 예수님의 공로에만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오늘는 비교적 잘했으니 하나님께 당당히 기도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오늘은 나는 회사에서 혹은 가족들과 별로 좋지 않았으니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결국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기초는 무엇인가? 그의 불확실한 느낌와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오늘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했다고 하는 느낌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확실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나아오는가? 혹시 보혈이나 보혈의 가치가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신뢰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혈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 가치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제는 두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출발점이고 하나는 과정이다. 전자는 엡2장에, 후자는 히10장에 제시되어 있다. 맨 처음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보혈로 말미암아 재개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러나 그 후에도 우리의 계속적인 접근의 근거는 여전히 보혈을 통한 것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들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에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맨 처음에 우리는 보혈로 말미암아 가까워졌다. 마찬가지로 그 새로운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언제나 그 보혈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와 교제의 기초는 언제나 보혈이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사실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도의 초보에서 떠나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제는 많이 성장했으니 그 초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공로나 인격을 토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보혈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을 하지 않고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그 문제에 답할 수 있는 또 다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보혈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연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연약함만 바라본다면 우리를 강건해질 수 없다.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우리가 강해지거나 거룩해지지는 않는다. 이 문제의 해결이나 저 문제의 해결 모두 다 어차피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혈로 인한 우리의 접근에 담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나는 보혈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보혈이 주님을 만족스럽게 해 주신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보혈은 나에게도 족하다고 믿습니다. 나는 주님의 보혈을 간절히 원합니다. 내가 어디 이르렀든지 또 내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 없이 나는 오직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근거로 삼습니다. 나를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양심에 있는 모든 거리낌은 사라질 수 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떠나서는 양심의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담대함을 주는 것은 오직 보혈뿐이다.

 

히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은 복이 있도다"


 

참소자를 이기는 힘

 

이제 우리는 방향을 원수 마귀에게로 돌리자. 보혈은 사탄을 향해서도 확실하게 역사한다. 사탄의 활동 중 하나가 죄로 인해 믿는 자들을 참소하는 것이다.

 

계12:10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주님은 그의 피로써 우리의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셨다. 주님은 또한 그의 피로 사탄에게도 답하신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러면 보혈이 어떻게 사탄에 대해서 역사하는가? 보혈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 편에 서시게 함으로 사탄의 고소에 답하며 역사하는 것이다.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떠나시게 만들었다. 동시에 사탄이 인간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결과를 초래했다. 타락한 인류는 오늘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지 못하는(롬3:23) 어둠 속에서 참담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보혈은 그 장벽을 제거하고 인간을 하나님께로 이끌로 또한 하나님을 인간에게로 이끌어 화해시켰다. 보혈로 인해 사람은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사람 편에 서 계시기 때문에 사람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탄을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요일1:7의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요일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하나 하나의 모든 죄(every sin)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의 모든 죄는 우리가 지은 전체로서의 죄가 아니라 개개의 죄악을 말한다. 왜 이 말을 하는가? 사람들이 "어떤 죄는 설마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며 완전한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보시는 것은 불꽃 같은 밝은 눈으로 보시는 것이다. 대충 보고 나중에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면 그것은 확실한 용서이다.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때 거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 생각되는 어떤 죄로 인해 사탄의 유혹과 고소를 받는다. 그때 우리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낱낱의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란 말씀을 기억하고 사탄에게 답하자. 큰 죄, 작은 죄, 검은 죄와 흰 죄,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죄와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죄가 다 용서받은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보혈이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죄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죄나 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범죄를 빛 가운데서 보시고 보혈을 기초로 해서 그 범죄를 용서하시니 사탄이 무슨 근거로 우리를 송사할 수 있겠는가? 사탄은 우리의 죄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송사한다.

 

롬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어떤 고소에 대해서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보혈을 가리키실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상소할 수 없는 충분한 대답이 된다.

 

롬8:33,34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보혈의 절대적 위력이다.

 

히9:11,12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사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리스도는 한 때 구속주이셨지만 오늘날은 거의 이천년 동안 대제사장과 대언자의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바쳐졌음을 근거로(요일2:1,2) 우리를 위해 중보자 역할을 하시고 계신다.

 

요일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직무의 부요(富饒)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께 충분한 것이다.

 

그러면 사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서도 우리들을 송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너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있다. 너는 연약하며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어떻게 하실 수가 없다." 라고 송사한다. 이때 우리는 사탄이 지적하는 것을 우리의 행위나 감정에서 정말로 찾아 보려고 자기를 들여다 보며 자기 변호를 하려고 시도한다. 그 결과는 사탄의 의도대로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고소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실족하고 실패하게 된다. 성도를 향한 송사는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 중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쉽게 사탄의 비난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우리에게 여전히 자기 義를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대해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고 자기의 죄인됨과 무용함을 처음부터 인식하고 있다면 사탄이 송사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육신에 신뢰를 두지 않으면 않을수록 범죄 이후에 사탄의 송사에 걸려 넘어지는 일도 적을 것이다. 육신의 근성은 언제나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놀라거나 육신을 옹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본성과 무력함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으며, 또 자기를 터무니 없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이 와서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며 송사할 때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를 처리하시는 데 능숙한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난 때문에 쩔쩔매는 사람은 다루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보혈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혈은 그를 변호하는 것인데 그는 오히려 사탄의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그런데도 비난을 받는 우리는 비난하는 자와 어깨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죽기에나 합당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주 예수를 보는데 있고, 어린 양의 보혈이 우리의 죄 문제를 완전히 처리하셨으며 사탄에 대해서도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데 있다. 우리는 이 토대 위에 확고히 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탄을 응수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죄가 많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 하나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보혈이 흘려진 이후 사탄에게는 더 이상 공격할 근거가 없다. 보혈에 대한 지식과 믿음만이 사탄의 비난을 막을 수 있다.

 

계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확실히 그 가치를 보게 된다면 확실한 승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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