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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이와 같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계시와 믿음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별로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로마서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뽑아낸 두 구절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롬3:23)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롬8:21)이 그것이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그것을 막았다. 죄로 인해 사람은 영광이 아니라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그 죄가 초래하는 심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죄로 인한 고통과 사망, 지옥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범할 때 그들이 잃게 될 영광에 대해서 생각하신다. 죄의 결과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스럽게 지음받았는데 죄로 인해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 의도하시는 목적은 단지 지옥을 면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많은 형제 중의 맏아들

 

로마서 8:16-18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롬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다시 8:29-3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롬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위의 말씀에 기초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는데 첫째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그 많은 아들들 가운데서 主와 으뜸(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세상으로부터 독생자 예수를 본받은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는 것이고 또한 독생자로 하여금 만물의 왕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목적을 실현하셨는가?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먼저는 우리를 부르셔서 의롭다 하시고 다음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끄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아들들로 삼았다. 요1:14에서 요한은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증거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에 그리스도 예수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를 본받은(그와 한 생명의) 많은 아들들을 그에게 붙여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는 이제 많은 아들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집 나간 아들이 밖에서 고생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핵심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에서 고생한 것에 있다. 아들도 물론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괴로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부를 잃은 것처럼 괴로워했다. 눅15장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의 마음이 아니라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이며, 잃어버린 양의 마음이 아니라 잃어버린 목자의 마음이다. 또 잃어버린 동전으로 손해를 본 사람은 주인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사람(아들)을 얼마나 얻기 원하시는지!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독생자에게는 많은 형제들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히2:10) 하는 것이었다.

 

히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롬8:29에서는 [많은 형제]라는 말이 나오고 히2:10에서는 [많은 아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주님께는 형제이고 하나님 아버지께는 아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불러서 아들로 받으실 때는 비참한 탕자의 모습 그대로 살게 버려두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받으신 것이다. 그것이 롬8:30의 의미이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부르신 자들을 다루심에 있어 하나님은 그들이 목표(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전에 결코 다루심을 중단하시지 않는다.


 

한 알의 밀

 

하나님의 독생자는 어떻게 맏아들이 될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요12:24 말씀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 한 알의 밀이 누구였는가? 바로 주 예수님 자신이었다. 우주 가운데 하나님은 한 알의 밀밖에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타락하여 죽었기 때문에 생명 있는 것은 오직 독생자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한 알뿐인 밀을 땅에 심었다. 그것이 죽음을 뚫고 부활함으로 인해 많은 밀알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 예수님은 그의 신성으로 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그러나 또한 그는 부활로 말미암아 많은 아들들 중의 하나가 되셨으며 그 중에 맏아들이시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나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것이다.

 

롬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만족을 얻으셨다. 독생자 아들이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아버지는 많은 아들들을 얻으셨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아버지 너희 아버지 하나님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하시기 전까지 주님은 하나님께 대해 종종 "아버지" 혹은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장자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많은 형제들이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히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아담이 당면했던 선택

 

첫 사람 아담 앞에는 두 길이 놓여 있었다. 한 길은 하나님의 생명을 따라 사는 길이고 또 한 길은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두 나무 곧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현되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 아담은 순결하여 선과 악을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는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담이 오늘날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바보였다든지 지적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가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 뿐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길을 정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를 그렇게 지으셨을 뿐 아니라 영원히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에게 경계의 말씀을 주셨다. 동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 먹지 말라는 경계였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엄중한 경계의 말씀이었다. 그때 동산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 나무였다. 생명 나무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그것을 먹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누릴 수 있었다.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3:1-5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스스로 그 지식을 가지는 것을 금하신 까닭은 옳고 그른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의지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의도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생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원히 그를 위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사람의 행복이요 당연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오직 아버지께 아뢰고 구하면 되는 것이었다.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두 나무는 결국 두 생명을 대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냐 아니면 인간의 생명이냐 하는 것이다. 생명 나무가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라면 그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현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취한다면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영광스런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또 만물 가운데서 으뜸으로서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 남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라 오직 그의 인간성(자연적 생명)으로 사는 위치에 서게 될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하며 독자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었다.

 

아담 앞에 놓였던 두 길 중 아담은 유감스럽게도 순종의 길인 성령의 길, 생명을 따라 사는 길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여 지혜를 따라 사는 自存의 길을 택했다. 그가 만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생명으로 사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신이 되려고 나선 것이다.


 

아담의 선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한 이유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함으로 自主的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 결과 그는 겉으로는 지혜 있고 성숙한 존재처럼 보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은 무엇이든지 그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결말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였다. 왜 사람의 선택이 죽음으로 연결되었는가? 그것은 사람의 선택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살고자 한 것은 사실 사람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사탄의 생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길도 自主的인 길이 아니라 사탄의 길이요 사탄의 종노릇하는 길이었다. 이렇게 하여 사람은 사탄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이후 사람은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생명 나무로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담이 생명 나무를 택하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택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사탄과 공모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뒤집어엎으려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범죄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려다가 구렁텅이로 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마지막은 죽음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의 생명을 그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였으니 그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이후 아담 안에서 난 모든 자들은 다 아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꼭 같이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꼭 같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있으며, 꼭 같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아담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지, 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저주에서 벗어나 살고자 하는 자, 아담의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인생으로 회복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십자가로 가야 한다. 십자가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모조리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쓸어 넣으시고 거기서 처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 참여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인 자는 자신이 죄(아담)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가 된 것을 믿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

 

생명에는 여러 층이 있다. 사람의 생명은 하등 동물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 그 중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각각의 생명들은 서로 교통할 수는 없는 전혀 별개의 것들이다. 개가 사람의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의 생명을 절대로 누릴 수 없다. 사실 우리 육신의 생명와 하나님의 생명의 간격은 우리와 짐승들의 생명 간의 간격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은 노력하여 무엇을 고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이 구속으로 말미암는 축복이다. 그리스도가 가져다 주신 구속은 첫 창조의 역사보다 더 좋고 완전한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이 생명이 아담이 상실한 그것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은 그것이 설사 대단하고 좋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단지 사람의 생명일 뿐이었다. 아담은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한 우리는 범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을 뿐더러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던 하나님의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다. 죄 용서는 회복의 차원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은 처음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범죄 전 첫 창조 시절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출생하였다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될 자녀들을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이시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 목표를 실현하실 수가 있는가? 히2:10,11을 읽어 보자.

 

히2:10,11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여기서 [많은 아들]과 [저희 구원의 주] 혹은 다른 말로 해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두 부류가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 하나에서 났다고 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생명을 받으셨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받았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나셨다(마1:20) 그리고 우리도 "성령으로"(요3:5) "하나님께로서"(요1:13) 태어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났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광스럽게도 오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생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동일한 생명이다. 우리는 다 그분에게서 지금의 우리 생명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아담이 받았던 그 생명보다 훨씬 높고 존귀하고 완전한 생명이다. 이것은 참으로 보배로운 "하나님의 恩賜"이다.(롬6:23).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거룩한 생명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생명은 저급하다. 그것은 변화를 받지도 않았고 또 변화될 수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소망은 그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이 받은 이 영광스런 생명에 있다. 여기에는 죄가 들어올 자리도 없고 죄가 상관할 일도 없다. 이 생명 안에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다.(요일3:9)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죄는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함께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처리됨에 따라 죄 문제도 함께 처리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되는 진정한 축복은 죄에서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생명을 누리게 된 이것이다. 결국 구속은 아담이 소유했던 것 훨씬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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