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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될 수 있는데 전반부는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보혈의 관계를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죄인인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보혈은 사죄를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필요하다. 앞 장에서 우리는 전반부를 간단하게 다루었다. 이제 후반부를 생각해 보자.

 

또 다른 意義

 

롬4장과 6장에서는 주님의 부활의 두 측면이 언급되고 있다. 롬4:25에 있는 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의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입장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6:4에서의 부활은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 새 생명을 주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화평이란 말도 롬5장과 8장에서 두 번 언급되었다. 롬5장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얻을 義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해 말하고 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 말은 우리가 죄 용서를 받았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움과 근심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롬5:10)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곧 우리 자신 안에서 여전히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속에 우리를 계속 죄로 이끄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는 화평이 되었지만 우리 자신과는 화평이 없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내란의 상태는 로마서 7장에 잘 묘사되어 있다. 거기를 보면 내 안에서 육파 영이 치명적인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논의는 8장에 있는 성령 안에서의 내적 평안의 생활로 인도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7)

 

더 상세히 고찰하여 보면 전반부는 일반적으로 義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롬3:24-26, 4:5,25) 후반부는 성결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롬6:19,22) [믿음으로 말미암는 義]라는 보배로운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진리의 절반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절반이 남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겨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본 것이다. 더 나아가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하실 것이 더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행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후반부의 각 章들은 계속해서 이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각 경우에 후반부는 전반부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전반부만을 알고 후반부의 진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가?

 

물론 먼저 우리는 보혈로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보혈로 의롭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보혈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근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초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보혈은 우리의 범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대속자로서 우리의 범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사죄와 의와 화목을 확보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보혈이 우리의 죄를 씻어줄 수는 있지만 우리 옛 사람 자신을 바꾸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보혈은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반해서 십자가는 죄인을 다루는 것이다.

 

로마서 1장부터 4장까지에는 [죄인]이란 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서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죄인 자체가 아니라 죄인이 저지르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는 말이 5장에 와서 비로소 처음 출현하는데,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가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5장은 죄인이 죄인 된 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흔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인간은 죄인이다' 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고자 할 때 롬3:23의 말씀을 사용한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나 이 구절은 사실 사람이 왜 죄인인지를 설명하는데 적절한 인용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면서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행한 바에 의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행한 바에 의해 그리고 그의 생명을 타고 난 것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로마서 3장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곧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범죄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증거이지 원인은 아니다. 죄를 범하는 자가 죄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드러나게 죄를 범치 않았다 할지라도 아담의 후손은 드러나게 죄를 짓는 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는 악한 죄인도 있고 선한 죄인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도덕적인 죄인도 있고 부도덕적인 죄인도 있다. 실정법에 저촉되는 죄인도 있고 저촉되지 않는 죄인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똑같이 죄인들이다. 우리는 흔히 어떠 어떠한 일을 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성질 곧 죄성이 있는 것 자체를 문제로 생각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행함 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다. 문제는 우리 자체에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서 어릴 때부터 자랐다면 그는 영어만 할 줄 알고 한국 말을 전혀 할 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여전히 한국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나기를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출생에 달려 있다. 우리가 죄인이 된 것은 우리가 죄인인 아담에게서 출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유전, 나의 혈통의 문제이다.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행동은 악하나 우리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문제의 근본은 罪人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를 처리하려면 먼저 이 죄인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의 범죄는 보혈에 의해서 처리되지만 우리 자신은 십자가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한다. 보혈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용서를 확보해 주지만, 십자가는 우리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확보해 준다.

 

태어날 때부터의 인간의 상태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로마서 5:12-21에 왔다. 이 중대한 대목에서 은혜는 죄와 대조를 이루고 있고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에 대조되고 있다. 이 대목은 이제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논의할 로마서의 후반부(5:12-8:39) 앞에 실려져 있다. 그 결론은 무엇인가? 그 결론은 이미 인용한 바 있는 5:19절에 나타나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전반부에서 바울은 먼저 범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범죄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 존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운 행동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다. 즉 자기 자신보다도 자기의 행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행실을 고치기만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행동을 고쳐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밖에 있는 행위보다 안에 있는 본질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겸손해 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우리 존재 안에 겸손해지기를 거절하는 성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랑을 해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사랑이 없으며 있다면 자기를 사랑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느끼게 된다. 밖에 있는 문제를 고쳐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얼마나 우리 안에 고쳐질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 나는 나의 행위만 잘못된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롬5:19의 결론이 우리에게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 작정하시고 지으신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인격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자가 된 것이다. 아담과 우리의 닮음은 외모뿐 아니라 본질에서 그렇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의도해서 죄를 범한 것도 아니고 원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죄를 버리고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애쓴다고 의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변경시킬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바꾸기도 어렵지만 설사 그것을 바꾼다고 해도 우리 생명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생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는 것 외에는 달리 고칠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 자들이다.

 

아무도 "나는 아담과 무관하다"라고 한다든지 "나는 에덴 동산에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이 뱀의 말을 들을 때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는 장차 그에게서 태어날 모든 인간이 잠재적으로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아담의 죄에 관련되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아담이 저지른 낱낱의 범죄를 다 우리 책임으로 떠맡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결과 즉 아담 안에서 일어난 생명의 변화를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죄인이 된 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날 때 아담(인간)의 다른 여러 특징들을 물려 받는 것처럼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근본적인 문제는 유전에 있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혈통을 바꾸지 않는 한 죄에서 해방될 수 없다. 실제로 문제의 해결은 혈통을 바꾸는데 있다. 하나님은 아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원리를 사용하셨다.

 

아담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렇다

 

로마서 5:12-21에는 아담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주 예수님에 관한 말씀도 있다.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안에서 우리는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받는 것이다. 이 [아담 안에서]라는 말과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너무도 중요하다.

 

히브리서에는 이 사실과 관련된 한 예화가 나온다.(히5:10, 7:1-17)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무가 레위(아론)의 제사장 직무보다 더 크고 우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멜기세덱과 레위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더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것을 어떤 식으로 증명했는가? 저자는 구약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저자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고 또 복 빎을 받았으니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큰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이 레위와 또는 아론의 제사장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것은 레위 또는 아론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때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한 일은 곧 레위나 아론이 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행동한 것은 다 그의 속에 있던 이삭이 한 일이며 이삭의 일은 야곱의 일이요 또한 야곱의 일은 레위의 일이라는 식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혹은 레위를 좇은 아론의 제사장 직무는 멜기세덱을 좇은 주 예수님의 제사장 직무보다 열등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임금들과 싸울 당시에 레위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생명의 씨만 그 안에 있었다. 그렇지만 레위가 그 씨에 난 것은 분명한 일이므로 아론이나 레위는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다.(히7:9,10)

 

히7:9,10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의 정확한 뜻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식구의 머리로서 자기 안에 全 식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을 때 全 식구는 아브라함 안에서 멜기세덱 안에서 바친 것이다. 그들이 물론 개인적으로 직접 바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안에서 바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잃어버린 바가 되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죄인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며 그 날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죄가 전 인류에게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 줄기 빛이 비추어졌다. 다른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는 은혜도 넘치는 것이다. 그리고 죄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노릇하는 것처럼 은혜도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도록 의를 통하여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롬5:19-21) 아담 안에서는 절망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소망이다.

 

하나님의 해방 방법

 

하나님께서는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하여 우리가 죄로부터 실제로 해방받기를 분명히 원하고 계신다. 바울은 "죄에 거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롬6장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했다. 그의 전 강조점은 바로 그 말에 함축되어 있다. "그럴 수 없느니라"고 그는 외치고 있다.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께서 죄에 매여 있는 부정한 자녀를 가지시는 것으로 만족하시겠는가? 그러니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죄의 지배에서 해방을 받게 하기 위하여 적절한 준비를 해 놓으신 것이다.

 

문제는 여기 있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유전으로 말미암은 죄를 제거해 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태어났으니 어떻게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보혈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왔다. 그러나 보혈이 귀하기는 하나 우리를 아담에게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것이 우리의 문제 즉 죄가 우리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게 된 것이니 탈출의 방법은 죽음 뿐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생명으로 난 것 때문에 죄인이 되었으니 아담의 생명을 가진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덩이에서는 죽음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성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죄된 생명 자체를 없애는 길밖에 없다. 죄의 속박이 출생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 죄로부터의 해방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해방 방법이다.

 

죽음은 해방의 유일한 비결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롬6:2)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죄 있는 생명을 바꾸거나 제거해 보려고 온갖 수단을 써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대단히 강인하며 결코 벗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해결 방법은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노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죄성이 벗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시고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처치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이 죄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뇨"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로 예수 안에서] 처치하시려면 우리가 반드시 먼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적 죽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문제가 남는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상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빛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죽음을 우리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놓으셨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해 놓으신 것이다. 세상에 제일 좋은 말씀이 여기 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하나님을 찬미하자! 들어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나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길을 모색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이미 수행하신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위의 히브리서 7장에서 말한 몇 가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위에서 "아브라함 안에서" 곧 아직 나지도 않은 레위 같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가 몸으로 거기 함께 있으며 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개별적으로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달려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에 동참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죽은 것이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다루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한 전 인류를 다 그 안에 넣고 다루신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운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것은 다 우리의 경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신이 살아서 발동하는 것을 느낄 때, 따라서 우리의 죽음의 필요성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달라고 기도해야 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과거의 명백한 죽음을 믿고 확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단어는 모두 헬라어 문법상 단순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영단번에 이루진 일이요 이젠 영원히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이다. (롬6:6, 갈2:20, 5:24, 6:14) 실제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자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영적으로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다 죽었다. 이것은 단지 교리가 아니다. 분명한 실제이다.

 

대행적이며 포괄적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피를 흘리셨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그의 무죄한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또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만족시키셨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만의 특권이었다. 인간은 아무도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성경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피를 흘렸다고 전한 기사가 한 군데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대속 사업을 하시는 데 있어서 혼자하셨다.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이 그 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피를 홀리시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가 죽으심에는 우리를 함께 죽게 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로 죽으신 것이다. 그는 그의 죽음 가운데 당신과 나를 포함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양면)을 표시하기 위하여 대속이라는 말과 일체화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그런데 이 일체화는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체화는 우리가 자신을 주님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께서 나를 그의 죽음 가운데 포함시킴으로써 그와 나를 일체화하신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키셨다. 그런 이유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정말 귀한 말씀이다.

 

주 예수의 죽음은 포괄적인 것이다. 주님의 부활도 역시 포팔적이다. 우리는 고전 1장을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였다. 그러면 이제 동 서신의 후반부에 가서 이 말의 뜻을 좀 더 상고하여 보기로 하자. 고전15:45,47에 보면 주님께 특별한 두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마지막 아담]이고 하나는 [둘째 사람]이다.

 

고전15:45-47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성경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또 마지막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둘째 사람이라고 했다. 그 차이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代價 또는 代贖의 진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총 결산이시다. 그러나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시작이요 머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연합을 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의 죽음과 관계된 연합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부활에 관계된 연합이다. 첫째로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의 인류와의 연합은 역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와 무덤에서 끝났다.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 있던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모아 가지고 그것올 심판과 죽음으로 청산하셨다. 둘째로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은 부활에서 시작하여 영원에서 끝난다. 다시 말하면 그 연합은 영원하며 끝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죽음으로 첫 아담을 제거해 버리시고 새 인류의 머리로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그의 뜻이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히셨을 때 그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못박히신 것이다. 첫 아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집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청산된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는 옛 인류를 쓸어 버리시고 반면에 둘째 사람으로서 부활하심으로써 새 인류를 가져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의 부활 안에서이다. 그리고 거기서도 우리는 포함되어 있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막 아담으로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둘째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우리를, 아담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변형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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