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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

 

우리는 앞에서 하와를 통해서 상징된 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 있는 완전하고 무죄한 교회를 보았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들어가서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상태를 저절로 가질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손보셔야만 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엡5:25-30)

 

이 여섯 절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은 5:25-27이고 둘째 부분은 5:28-30인데 각 부분은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다.(엡5:32) 첫 부분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셔서 과거에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둘째 부분은 주님께서 현재도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 부분이 가리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이고 둘째 부분이 가리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몸과 신부의 관계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 두 위치에 서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의 생명과 현재 위치를 두고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의 장래 운명을 두고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통일성)을 두고 말할 때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며 그리스도와 교회의 친밀성과 불변의 관계를 말할 때는 언제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한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어느날 이 생명이 충만하고 성숙되어 그리스도께 인도되기에 합당하게 되면 하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의 신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장래 운명을 두고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다. 다만 신부로 예정되어 단장되고 있을 뿐이다.

 

장차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어 그의 신부가 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자라야 한다. 아담에게서 나온 것만이 아담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자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수 있다. 아담의 생명을 받은 자 곧 본래 아담과 하나가 아니었던 것들은 아담의 아내가 되어 아담과 한 몸을 이룰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사는 자 곧 현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몸의 생명을 누리는 자가 아니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시니 교회나 그럭저럭 다니다가 세월이 지나면 어느 때 저절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그리스도)의 나라는 반드시 하나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일을 하신 데서 끝났다. 그리스도 밖의 자비는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현재적으로 항상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여 그 생명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육)에 속한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고 항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몸의 생명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세상(종교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통할 수 있는 육체적 자랑거리를 여러 가지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을 결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 충만하게 누리기만 추구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1-4)

 

하나님은 새 피조물을 조성하시는데 있어서 결코 옛 피조에 속한 것들을 사용하시지 않으며 영에 속한 일을 이루는데 결코 육에 속한 것들을 이용하시지 않는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이 둘은 결코 혼돈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복음을 전하거나 대화를 나눔에 있어서 내용만 옳으면 무엇이나 괜찮은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知性)에서 나온 증거는 생각만 울릴 따름이고 흥분된 감정에서 나온 증거는 감정적 충동만 자아낼 뿐이다. 오직 영으로 말미암은 증거만이 영을 살리고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십자가에 의해 처리되지 않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과 지식은 영적인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 신령한 목적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령한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과 방법이 반드시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방법이 영에 속해야 하며 또한 인간 자신도 영에 속한 사람이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귀신스럽고 신비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순진한 어린 아이와 같다. 그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항상 위로는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매사에 동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형제들 없이 혼자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고 항상 형제들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꼭 보아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땅에 두신 그의 몸 곧 교회를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 그 몸이 하나라는 사실이다. 셋째, 나는 홀로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 몸의 한 부분(지체)으로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개인주의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형제를 무시하고, 몸의 생명을 등한히 하고 주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엡5:28,29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몸으로 생각하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엡5:25-27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며 키우시는 것은 장차 교회를 주님 앞에 흠 없고 완전한 신부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몸처럼 돌보시는 내용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말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진리(비밀)를 가장 분명하고 풍성하게 드러낸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와의 모형을 통해 나타났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만들어진 무흠하고 무죄한 존재인데 왜 에베소서 5장은 교회가 물과 말씀으로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에베소서 5장이 창세기 2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교회가 서 있는 두 가지 위치를 함께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는 구원받은 죄인을 말하면서 첫 부분을 시작하지 않고 (죄와 상관없이) 영원 전에 선택받은 복된 사람으로서 우리의 지위를 말하면서 첫 부분을 시작한다. 로마서 1장은 타락과 죄를 언급하며 시작하지만 에베소서 1장은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2장에 들어가면서 인간의 타락과 교회의 구속과 양육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가 동시에 보여주는 사실은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죄와 무관하게 영원한 목적을 가지셨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으며 따라서 오늘 부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적합하지 않은 자연적 생명(육적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5장에서 주님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교회의 실제를 봄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완전하고 무흠하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땅(인간)에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와 흠이나 티가 없는 완전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 있는 교회의 한 실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는 타락하고 흠 있는 인간의 집단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반드시 말씀과 물 곧 주님의 생명으로 씻음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으로 계속 양육 받아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실제로 이르기까지 회복되고 거룩케 되어야 한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심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고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른 부분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려면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셔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은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3)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5:13,14)

 

주님께서 말씀을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은 성경책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는 말씀과는 다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기록된 말씀)이라는 도구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시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役事는 성경책이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의 역사는 성경의 말씀을 사용하든 아니면 그와 같은 내용의 다른 말씀을 친히 하시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언제나 주관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의 생각을 파(破)하고 자극하여 무언가를 깨닫게 하는 주관적인 경험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말씀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어떤 진리의 존재한다든지 혹은 그것을 내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말씀을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물론 성경 말씀을 그 객관적 의미와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그릇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그가 우연히 성경을 뒤적이니 요한복음 11:4이 나왔다. 거기에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기뻐했지만 결국은 나음을 얻지 못하고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맞지만 그것은 단지 객관적 말씀일 뿐 하나님께서 특수한 사정에 직면한 그에게 들려주신 약속의 말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에게 그 요한복음의 말씀을 사용하여 약속의 말씀(혹은 기도의 응답)을 들려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위의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단지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는 정도로 듣는 것으로는 안되고 그 성경의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옴으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이렇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정도의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신약의 최대 축복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말씀하시며 가르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처럼 자신은 그렇게 느끼거나 확신할 수 없는데 밖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신약적인 말씀의 역사가 아니다. 만일 자기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하라고 해서 무엇을 한다면 그는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은 일이다.

 

성경을 사용하든, 밖의 사람들(형제들)을 사용하든, 속의 주관적인 음성과 느낌을 사용하든, 지성으로 환경의 변화를 판단하는 방법을 사용하든 분명한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속에서 분명하게 느껴야(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4:4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지 않으면 기록된 말씀 자체는 죽은 문자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생명이 되지 못한다.

 

요한복음 6:63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대부분은 성경(구약 율법)에 능통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율법에 능숙하고 계명들을 줄줄 외는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고 여기시지 않았다. 그것은 영이고 생명인 말씀 곧 주님이 자기 안에서 늘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그들이 전혀 듣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이요 생명인 주님의 말씀도 따지고 보면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지금까지 해 온 그 말씀이었지 다른 말씀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께는 그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지만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말씀이 죽은 문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말씀이 밖으로 나갈 때(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질 때) 주님의 경우와는 달리 살리는 영(생명의 말씀)이 되지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뜻)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로서 성경의 장 절을 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음성)을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사람 속에서 친히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는 것이 전혀 없다면 이것은 신약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주님은 성령 안에서 오늘도 살아 계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안에서 친히 당신의 뜻을 말씀하신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히8:10,11)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요일2:25,27)

 

객관적 진리(교리)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내용은 같을지라도 사람에게 들려졌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고 객관적 진리로서 성경을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읽고 이해하고 암송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아는 것 위에 그것이 항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말씀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으로 우리 안에 풍성케 되는 것이다.

 

성경의 참된 가치는 그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양하고도 풍성하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을 존중히 여긴다면 성경을 머리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풍성하게 말씀하시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다. 주님이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살아 있는 말씀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심으로 인해 교회는 현재의 흠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에 적합한 거룩하고 영광스런 상태로 변하게 될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계속 자라다가 마침내는 모두가 주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될 것이며 그것은 땅의 관점에서 온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것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수준에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3,15)

 

어떻게 오늘의 형편없는 교회가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의심해 보기도 하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그러하고 또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이 역사가 완성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목적)을 위한 교회의 사명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교회] 곧 [회복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다 이 땅에서 사탄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 사람 :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가 현재적으로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마귀를 멸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마귀를 멸한다고 해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주님이 이루어 놓은 완전한 승리를 (사탄이 최종적으로 결박되어 역사 안에서 사라지게 되는 날까지) 歷史(삶의 현장) 속에서 계속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은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 곧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0-12)

 

교회가 감당해야 할 영적 전투는 방어전이지 공격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이 승리하신 터전 위에 굳게 '서라'고 명하셨지 공격하여 무엇을 쟁취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3)

 

그러므로 모든 무기는 다만 이미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승리의 사실을 확인하고 되새기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어떤 무기들을 갖추도록 요구되었는가?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셩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6:14-17)

 

가장 중요한 무기는 역시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말한다. 그가 마귀를 완전히 이기셨고 마귀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며 사망 권세를 이기신 자와 그에 붙어 있는 우리에게 마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말씀은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무엇인지, 우주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해 준다. 거기에는 사탄이 설 자리가 전혀 없으며 그는 마지막에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질 것이라는 사실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은 마귀에게 얼마나 두려운 무기가 되는지! 우리가 마귀의 궤계를 무너뜨리고 이 땅에서 마귀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리를 알아야 하며 그것을 마귀가 듣도록 온 천하에 선포하며 찬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의 말씀을 가지는 것과 아울러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義와 平安과 구원을 굳게 잡는 것과 범사에 주님을 확고히 믿고 믿음으로 행하는 삶이 또한 마귀를 대적하여 제압하는 무기가 된다. 우리의 힘과 능력과 승리는 전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힘과 능력과 승리를 붙드는데 있다. 영적 전투의 시발점은 그리스도의 승리 위에 서는 일이다. 싸움은 먼저 주님의 승리를 아는 일에서 시작하여 범사에 이 승리를 선포함으로 마귀를 실제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들고 또한 우리가 자신을 육체의 정욕을 좇아 죄에게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나감으로써 완성된다.

 

누가복음 17:20,21을 보면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답하신 것이 나온다. 이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들 안에 있다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예수께서 서 계시는) 여기 임하여 있다는 말이다. 즉 주님이 서 계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쫓겨 나갔다. 그들은 주님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다.

 

과연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귀가 '당신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며 두려워할 수 있는 사람이 서 있는 그 자리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 나라가 왜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며 마귀의 지배 하에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다 마귀의 말을 듣기 때문이다. 즉 마귀와 상관하기 때문이다. 돈이든 명예든, 쾌락이든 마귀가 유혹하며 제시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목적도 팽개치고 마귀에게 손을 내밀며 상관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가 땅의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마귀의 말을 듣지 않고 또 생명의 길이 아닌 모든 길을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다면 그에게는 마귀가 임금이 될 수 없으며 거기에는 마귀의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땅 위에 계시는 동안 그가 서 있는 어느 곳에든지 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는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참 아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만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5하,6)

 

주님이 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일 뿐 아니라 교회가 있는 곳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교회가 주님과 같은 사역을 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하늘 나라를 땅으로 몰고 오는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으로 초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궁극적인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땅에서 주권을 되찾으셔야 한다.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여러 선한 사업을 하는 것은 다 이 일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9,10)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자동적으로 임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승리를 아는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는 교회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고, 죄와 불의는 반드시 처리하고, 다만 그리스도께만 관심을 집중하여 온 힘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교회라야 한다.

 

우리는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회복(구원)은 하나님이 입은 손실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필요만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살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두 가지의 결과가 발생했다. 하나는 사람이 범죄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땅에 대한 주권을 강탈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영광을 잃고 손해를 입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도 손해를 입은 것이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지배하려고 하던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이 마귀의 권세 하에 들어감으로써 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땅 위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시게 되었고 마귀가 자기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구속은 인간의 도덕적 문제(죄의 책임)를 해결해 줌으로 인간이 입은 손실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입은 손실을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입은 손실은 사람 곧 교회가 마귀를 처리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다시 구사함으로써만 회복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구속자이신 주님의 손에서 구속받은 교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교회는 반드시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주목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즉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하는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가 선 자리에 임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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