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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로마서 7장의 의미와 가치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6장과 8장은 귀하게 생각하지만 로마서 7장은 무엇 때문에 거기에 놓여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분명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두 장 사이에 잘못 삽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편으로 그들의 옛 사람이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처리되었으며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자신들이 새 사람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면 로마서 7장은 실제로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사실에 대해 빛이 있고 믿음이 있고 헌신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로마서 7장에서 다시 사람이 무엇인지를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이 6장과 8장 사이에 놓이기 보다는 5장과 6장 사이에 놓여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용으로 보면 6장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사람은 이제 제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할만하다. 그런데 갑자기 7장이 이어지면서 낙심과 절망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왜 이런 절망이 갑자기 튀어나오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서 그의 중생 이전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에 묘사한 것 중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아닌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경험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그러면 로마서 7장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로마서 6장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다루고 있고 로마서 7장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다루고 있다.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6장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장은 죄로부터의 해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율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도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죄로부터의 해방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죄로부터 뿐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율법이란 무엇이며 그 기능은 무엇인지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육신으로 인한 인간의 낙망

 

로마서 7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육신에"(롬7:5) 있으며 "육신에 속하여"(롬7:14) 있고 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롬7:18)는 사실이다.

 

롬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것은 죄의 문제를 능가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의 죄가 아니라 육적 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하다. 왜냐하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롬8:8)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그러한 실상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구원을 받고서도 여전히 죄에 매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항상 죄의 권능 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주 실패하며 거듭되는 몇몇 죄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람이 위에서 우리가 계속 논의해 온 사실들 곧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죽으실 때에 죄인인 우리 자체를 포함하고 죽으셨으므로 우리는 죄만 처리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함께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들을 수도 있다. 그때 그 사람은 아마도 눈이 열려서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이제는 믿음으로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말씀의 빛을 통해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실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려고 할 때 그는 생각치 못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그는 자기가 능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는 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점차 자기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뜻을 실천하려고 생각하더라도 육신이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경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너는 정말로 빛을 보았는가? 그렇다. 그러면 너는 그 진리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네가 죽고 부활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로 간주하였는가? 물론! 그렇다면 너는 정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는가? 그것도 물론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어째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실패하고 마는가?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던 중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외치게 되는 것이다.

 

롬7:18,19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율법의 교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갑자기 로마서 7장의 경험에 돌입하게 된다. 그들은 그 이유를 모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선 로마서 6장에 묘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의 우리의 죽음은 완전한 것이며 우리를 구속하는데 충분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죽음과 거기서 오는 모든 결과에 대한 설명은 6장에서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7장에 제시되어 있는 진리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14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실현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롬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문제는 우리가 죄로부터만 해방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데 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과 반대되는 개념은 은혜이다. 은혜란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우시는 어떤 거룩하고 의로운 요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처럼 율법이 하나님의 요구를 인간이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내가 그 요구를 직접 이루어 드리지 않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공급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지만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 가운데서 그 의무를 이행해 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롬7:14이 말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한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바로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로마서 7장의 문제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육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율법 밑에 놓이게 된다. 사실 율법에는 어떤 잘못도 없고 문제도 없다. 바울은 롬7: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선하고 마땅한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불의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에 도무지 부응할 수 없는 것이다. 옛 사람으로서 우리는 죄 아래 팔린 사람이다(롬7:14). 누구든지 가만히 있을 때는 다 훌륭하고 선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하고 의로운 어떤 일이 부과될 때 그의 속에 있는 악함과 죄성이 드러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나설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으며 하나님께는 도무지 무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출생할 때부터 죄인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을 따라 무엇을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요구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인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율법이 없다고 해서 죄가 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게 되며 죄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이 주어질 때 비로소 사람 속에 있는 죄가 기회를 타서 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의 실상과 약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 아신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내게 선에 관한 한 아무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아신다. 문제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데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우리 자신도 거기에 포함된다는 일반적인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있는 현재의 우리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고 무능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며 잘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고 연약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는 자리로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 지점에 도달한 경험을 로마서 7:7에서 이렇게 말했다.

 

롬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이 그를 찔렀을 때 그는 자기가 탐심을 지닌 도둑과 강도와 같은 자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절감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고통스러운 실패의 경험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에 대해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것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알게 하는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상한 말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반하도록 율법을 주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인생이 그것을 존중히 여기고 받들며 순종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이 율법으로 자신을 알게 되어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를 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생이 사악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시지 않으신다. 오직 우리 삶을 대행하시는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기만 요구하신다.

 

지금까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을 만족케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cf.마19:16-26) 신약성경 어디에도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씀한 데가 없다. 도리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따름이다.

 

롬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롬7:7-9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우리의 성품을 폭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너무 자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리를 시험하여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나는 철두철미 죄인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진정으로 떨어지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하게 내버려두신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리라는 기대 속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도리어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위반할 것이라는 예견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 율법을 범하여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 되고 거기서 자신에 대해 절망을 느낄 때 율법은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이다.(갈3:24)

 

갈3:24 "이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해방시키셨는가를 보았고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율법에서 해방시키는가를 상고하고 있다. 6장에서는 주인과 종을 예로 들어 죄로부터의 해방을 설명했지만 7장에서는 두 남편과 한 아내를 예로 들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죄와 죄인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와 같다. 이에 비해 율법과 죄인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

 

바울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말하고 있는 롬7:1-4의 설명에는 두 명의 남편과 한 명의 아내가 나온다. 그 부인은 참으로 불행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두 남자 중 덜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만 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와 살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불행했다. 그들은 서로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남자에게 있다기보다 여자에게 있었다. 남편은 대단히 정확하고 깨끗하고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비해 여자는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모호하고 무슨 일이든 되는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은 철저하고 엄격한 사람이어서 아내에게도 항상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한다. 그 사람 자신도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의 요구도 언제나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것을 도저히 맞춰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렇게 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의 불행은 시원찮은 아내를 데리고 있는 것이요 여자의 불행은 계속 자기와 같기를 요구하는 완벽한 남편과 산다는 것과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두 사실에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여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와 있는 동안 자기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으며 언제나 죄인이 될 뿐이었다. 마치 그 여자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잘못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사람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달아나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만일 그 여자가 보다 부드럽고 편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녀가 알고 있는 다른 그 남자는 현재 여자의 남편 못지 않게 정직하고 철저하며 엄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엄격할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자기가 나서서 모든 것을 돕고 지원하는 사람이다. 이 여자는 마음 속으로 그 남자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현재 남편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이 여자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바울의 이 예화에서 첫 남자는 율법이고 둘째 남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여자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를 이루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주 예수님은 어떤가? 그는 사실상 율법보다 더 철저하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마5:21-48)

 

마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라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아시기 때문에 우리로 그것들을 직접 행하기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대신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친히 이루신다. 이런 점에서 주님은 율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거룩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또한 거룩을 행하는 능력도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우리)가 첫 남편(율법)을 버리고 새 남자(그리스도)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새 남자와 결혼하기 위하여 첫 남편으로부터 간절히 해방되고 싶어한다.

 

문제는 현 남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있다면 그의 남편이 일찍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대단히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므로 조만간에 죽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지가 없어기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 율법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만일 남편이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것이다. 아무리 헤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죽는데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죽으면 결혼 관계는 자연히 해소된다.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내용을 다루고 있는 로마서 7장 앞 부분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대목이 바로 3절에서 4절로 옮겨가는 부분인데 여기서 바울은 죽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여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롬7:3,4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1절부터 3절까지 바울은 남편(율법)이 죽어야 아내(우리)가 해방된다는 말을 했지만 4절에서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율법은 어차피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을 것은 우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온갖 요구는 영원히 존속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죽으면 율법은 더 이상 나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도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죽은 것도 아니고 죄의 권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죽은 것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옛 주인 죄가 비록 살아 있지만 종인 나 자신이 죽어버렸으니 나를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아무리 세다 해도 무덤에까지 따라 와서 죽은 자로 범죄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인해서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을 때이다. 율법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에게 온갖 일을 계속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그 요구를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율법에 대해 죽을 수 있는가? 여기서 이미 여러 번 다룬 귀한 진리가 또 등장한다. 우리의 죽음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니"(롬7:4)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의 몸은 찢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안에 함께 넣으셨기 때문에(고전1:30) 우리 역시 찢어진 것이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만물의 근본이요 머리이신 주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모든 피조물도 그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몸을 죄에 대해, 율법에 대해, 죽인 것이라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 대해 살리신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죽음은 옛 결혼 관계를 해소시켰다.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온갖 일을 요구만 할 뿐 자기는 아무 것도 도와주지 못한 전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고 자기를 위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 연합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롬7:4)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 부족하고 죄 있는 여자(우리)는 죽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기 때문에 그와 연합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 하나님의 어떤 요구에 대해서도 무반응이었던 그 여인은 부활 생명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되어 우리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말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하여 전혀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말은 우리 자신이 다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율법 아래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율법을 범하였고 또 그 율법은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사형이 (그리스도 안에서) 집행되었다. 이제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와 저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에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그것은 [새 계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옛 계명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한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모든 요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참 기쁨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빌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이다. 이 말의 참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데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육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노력을 빨리 중단하면 할수록 성령님은 그만큼 빨리 우리 안에서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요구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요구를 이룰 자가 아니다. 이제는 요구하신 분 자신이 친히 우리 안에서 그 요구를 이루신다. 하나님은 유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우리 안에서 친히 거룩한 삶을 이루어 주신다. 무엇이든 해보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것은 성령 안에서(믿음으로) 행치 않고 여전히 육신의 능력으로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가 승리의 생활을 하려고 발버둥쳐도 잘 안되자 자기의 의지와 힘이 약한 것을 탄식했다. 물론 그의 문제가 그의 힘이 약한데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정한 문제점은 그가 너무 약한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충분히 약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려는 노력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만큼 연약하지 않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낮아져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살아주십시오.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하십시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 가장 효과적으로 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가 힘이 다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져내는 것이다. 수영을 아무리 잘 하는 사람일지라도 물에 빠진 사람에게 잡히면 꼼짝도 못하고 같이 빠져 죽고 만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죽을 힘을 다해 사람을 붙잡으므로 도무지 수영을 하지도, 건지지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물에 빠진 사람이 기진맥진하여 최소한의 발버둥도 칠 수 없게 될 때에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승리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정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육은 무익하다. 만일 우리가 육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죽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라고 판결하셨다. 부끄럽지만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든 육적 노력을 포기할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롬6장은 [죄의 몸]을 롬7장은 [사망의 몸]을 다루고 있다. 6장이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죄]인데 비해 7장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사망이다. 죄의 몸과 사망의 몸은 어떻게 다른가? 우리 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그것이 罪다-는 측면에서 말할 때 성경은 우리의 몸을 [죄의 몸]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몸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너무나 약하고 무능하다는 측면에서 말할 때 성경은 우리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몸이 병들다 못해 완전히 죽은 것처럼 약해져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율법과 관련하여 우리 몸의 실력에 대해 말할 때 쓰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몸은 죄의 몸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실제로 몸으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 몸은 죽은 몸이다. 그것은 우리 몸이 몸 자체의 육적 요구를 이루는데는 상당히 강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너무나 약하여 도무지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몸은 율법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는 아예 죽은 몸이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은 세속적이고 사탄적인 모든 일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매우 적극적이다. 그런 일은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과 관계되는 일에 관한 한 지극히 소극적이며 무능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한 일을 말할 때는 천상유수이며 피곤한 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을 증거하거나 하늘에 속한 일을 말할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친구와 이야기 할 때는 졸리는 법도 지루하지도 않지만 기도할 때는 졸리며 10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취미 생활이나 육신의 요구를 따라 무슨 일을 할 때는 지칠 줄 모르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무슨 봉사를 할 때는 짜증이 나고 쉽게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어딘가 고장이 난 것이 틀림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포괄적으로 볼 때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사망)이란 숨이 끊어져서 몸이 땅에 묻혀야 할 지경에 이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그 교회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고 했다.

 

고전11: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대해 무능하고 연약한 상태가 바로 죽음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가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그가 어느 순간 숨이 끊어져서 땅에 묻혔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고는 즉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죽은 것은 그 前이다. 그가 불순종할 때 이미 그는 죽은 것이다. 그의 몸은 이제 하나님께 무능하며 약하며 무용하게 되었다. 그 표시로 그의 몸에는 고통과 질병과 죽음이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위에서 말한 약한 몸과 병든 몸, 죽은 몸은 다 사망의 몸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망의 몸이다. 그래서 도무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몸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탁월한 몸을 가지고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외칠 수만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타락하여 하나님께 무용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외친 것처럼 그렇게 외쳐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역사하실 수 있게 된 이때에 이 외침은 하나님의 귀에 거슬리는 음성이 아니라 아름다운 음성이 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절망해 보았는가? 더 열심을 내면 모든 것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더 성경을 많이 읽고 더 기도를 많이 하고 더 봉사를 많이 하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승리의 생활이 비결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도움은 성경 읽기와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모든 일의 목적이요 대상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뢰는 그리스도 한 분께만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로마서 7장의 그 곤고한 사람은 자신의 곤고하고 비참함을 슬퍼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훌륭한 질문을 던졌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참으로 누가 건져낼 수 있는가? 구원과 해방은 무슨 방법과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인격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죄 사함을 받았는가? 성경 읽기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구제를 함으로써? 아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죄 용서 뿐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이나 우리의 노력이나 무슨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되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죄 사함은 그리스도가 이미 행하신 일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지지만 죄로부터의 해방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실 것을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 뿐이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지는 않을까 하고 염려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십자가 상에서 주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면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 이루었다"(요19:30)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2:13)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게 된 그 곤고한 사람의 첫 마디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우리는 이 장에서 다만 소극적인 측면 곧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지만 먼저 여기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설사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 나서서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력한다 해도 어차피 아무 것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서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며 소극적이고 무사안일한 삶을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인 그리스도 안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 있는 새로운 길인 생명의 성령의 법에 대해 상고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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