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신약의 축복을 버리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를 얻겠다는 잘못된 구약 이스라엘적 행태로 돌아가고 있는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에게 바울은 구약 이스라엘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아브라함을 들어서 그들의 행태는 신약과 구약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매우 잘못된 행태임을 지적한다.
아브라함의 복은 그가 단지 하나님을 믿기만 했는데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누린 삶, 아브라함이 누린 복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선택하심으로써 자기 소유로 삼으심
2. 자격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 선택 받음
3. 행위와 수고와 노력을 통해 '상'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써 '복'을 받음. 일을 통해서 얻은 것은 '삯'이지만 거저주는 은혜를 믿음으로 얻은 것은 '복'이다.
창세기 12, 15, 17장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상대하면서 약속을 받고 복을 받은 내용들이 나온다. 거기서 아브라함이 한 유일한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은' 것뿐이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5,6)
아브라함은 선한 삶을 살고 율법을 잘 지킨 사람도 아니었고 또 그런 것을 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것을 전파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도 아니다. 단지 그는 어느날 자기를 찾아오신 분으로부터 (은혜의) 복음을 들었고 그것을 믿었을 따름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함께 복을 받게 된 것뿐이다.
아브라함의 행위 또는 아브라함에게 벌어진 일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음 :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들음
둘째, 그것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음(받아들임)
셋째, 땅과 후손을 약속 받고 전 세계적인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 받음 : 가나안 더 나아가서 온 땅을 자기 소유로 약속 받았고 또한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후손을 얻어 큰 민족의 시조가 될 것을 약속 받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만국이 (자기가 누린 것과 같은) 복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음
여기에 아브라함이 한 일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단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믿고 기다리며 누리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할래야 할 것도 없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나라)와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일의 대상이며 하나님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누리도록 선택된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신약 시대)에 와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와 그 나라임이 드러났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좋은 땅은 단지 가나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돌아가게 될 온 세상(하나님의 나라)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된 씨는 그리스도와 교회(그의 믿음을 동일하게 소유한 무리)인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인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통과한 후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영 곧 '생명 주는 영'(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궁극적 복의 실체는 바로 성령님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못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령은 어떻게 오셨는가? 바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즉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하고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반문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성령을 주시사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며 능력을 행하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은 전혀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과 같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8에서 바울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라고 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이방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2:7에서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창12:1-7)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약속)의 내용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인데 그 첫째는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이방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의 씨가 그 땅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유일한 씨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3:16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그리스도는 만국에게 복을 끼치는 주체가 될 것이고 또한 만국(땅)을 받아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3:15,16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약속(언약)이라고 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리고 17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확증하신) 언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변치 않을 확고한 약속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은 창세기 15장에 가서는 언약이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친히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제사를 드렸다. 그 제물의 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증표가 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7장에 가면 이 언약은 할례라는 형식으로 육체에 표시를 남기게 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들은 말씀, 곧 언약으로 맺어지고 할례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 하나님의 약속이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복음이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것은 복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훨씬 전에 이미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사람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복과 구원을 누리는 이 소식이 벌써 아브라함 때에 전파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구약을 누린 것이 아니라 신약을 누린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언약은 새 언약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새 언약의 기초이자 시작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무 율법도받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희생하고 수고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복과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을 들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씨로 온 것이며 신약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연속이자 반복이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시기 훨씬 전에 전파된 것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복음은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가 십자가 상에서 구속을 이루실 그 때에 비로소 전파된 것이 아니라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전파되었다. 갈3: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율법은 이 약속(복음)이 주어진 후 4백 30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먼저가 아니고 복음이 먼저이다. 그리고 율법은 중간에 가입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5:20) 그러므로 율법은 일시적이지만 약속(복음)은 영원한 것이다. 나중에 생긴 율법이 본래 있던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복음)을 없이할 수는 없다.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을 비롯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큰 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작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며 사람의 죄와 무능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있던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은혜, 믿음, 복음)에서 떠나 뒤에 생긴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본래 의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차적이고 부가적인 것이다. 율법은 약속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것을 사모하며 붙잡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율법은 본처(사라)가 아니라 첩(하갈)에 해당하는 것이요 참 아들(이삭)이 아니라 첩의 자식(이스마엘)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에 이르도록 정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부터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 적도 없고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적도 없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어제 형제들과 누가복음 10:25-42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열심있는 율법사가 제 아무리 선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나섰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선한 일도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를 강도 만난 자로 비유하시면서 강도 만나 다 죽게 된 사람은 자기를 치료하는 선한 이웃을 찾아서 의지하고 사랑하고 붙잡는 것이 삶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율법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가 행하는 것이지 죄로 인해 죽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사모할만한 일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섬겨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기 전에 나를 섬겨서 살게 할 이웃이 누구인가부터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