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지난 주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의 둘째 권면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교회 안의 누룩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말씀이었다. 무엇이 누룩인가? 교묘히 침투하여 알게 모르게 교회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것이 누룩이며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 은혜의 구원과 십자가(자기 부인)와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은 다 누룩이다. 누룩은 은혜와 믿음 대신 율법을 붙들게 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성령 대신 인간 자신을 의지하고 붙들게 하는 것이다. 성령을 좇는 삶을 인간의 종교 생활로 변질시키는 것이 바로 누룩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철저히 경계하여 우리 생명이 손상되고 축나고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않을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고 말했다. 이 말은 참으로 '희망 섞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실제로 갈라디아교회 안에서는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이미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요되고 동조했다. 그래서 이 편지가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은 미덥지 못하더라도 그들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미덥다는 바울의 믿음 안에서 시작되고 지속된 것이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8,9)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4)
이 말씀들은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을 향한 바울의 믿음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준다. 바울은 언제나 일을 시작하신 이는 주님이시며 그가 자신의 일을 계속 진행하셔서 완전하게 이루실 것을 믿었으며 그것을 위해 계속 기도해 왔다. 그러므로 바울의 확신은 문자 그대로 "주 안에서"의 확신이었다.
여기서 다루어진 중요한 주제는 교회 안의 형제들이 서로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한 마음,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분열의 근원이다. 몸이 하나면 마음도 하나이며 마음이 하나이면 몸도 하나이다. 몸과 마음은 둘로 분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의 연합은 곧 마음의 연합으로 이어져야 하며 마음의 연합은 몸의 연합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다른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한 몸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분열과 다툼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말씀'을 갖지 않는데서 온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 즉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꼽을 수 있고, 둘째는 그들이 그들의 거듭난 생명에 충실하지 않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4)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음을 낮은 데 두지 않고 높은 데 두는 것이며 자기를 높여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12:16)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점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어차피 같은 형제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그 지혜가 있고 존귀와 영광이 있다는 점에서도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존귀하면 다른 사람도 존귀하고 내가 이만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특별히 형제 위에서 나를 더 높이거나 대단해질 수는 없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허무한 생각으로 자기를 높이고자 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한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과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몸 안에서 벗어나 따로 떨어져 나가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사람 자신과 다른 지체들에게 다 같이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자기 생각과 주장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연합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사 타당하고 좋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절대 진리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면 강하게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의 방향이나 색깔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한 일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미 많은 형제들이 합의하고 공감하여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고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일이 더 잘 되는 쪽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그르치고 연합이 훼손당하는 쪽으로 역사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그 주장의 내용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이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사탄에게 기회를 주어 교회가 전체적으로 사탄에게 이용당하며 훼방받기 때문이다.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세상을 좇거나 마귀의 거짓말을 좇는다면 우리는 혼자서라도 그것을 반대하며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할 수 있는 한 마음을 같이 하여 한 몸과 한 마음을 유지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일을 이룸에 있어서 그 결정적인 때와 방법, 지혜와 능력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주님의 신호에 의해 일을 (거의 덮어놓고 시작하는 식으로) 시작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주님의 인도를 받아간다. 그러므로 아무도 처음부터 일을 완벽하게 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신통치 않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을 비난하며 다른 주장을 내놓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 기대하며 사람들이 머리이신 주님의 인도를 잘 깨닫고 잘 따를 수 있도록 기도하고 격려해야 한다.
만일 내게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능력과 진리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다면 내가 형제들과 연합을 깨면서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결국 나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돕고 교회를 온전케 하는 일을 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그동안 다른 마음을 품고 형제들과 보조를 같이 하지 못한다면 나는 교회에 소용이 없는 사람이 되며 도리어 연합과 일의 진척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몸이며 주님이 그의 거처로 삼기 위해 그의 힘과 지혜를 따라 건축해 가는 주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 주님을 믿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교회 안에는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교회의 입장은 주님 앞에서 "나는 당신의 종이요 신부요 당신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시고 빚으십시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사람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해야 한다. 목사나 장로라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고 앞에 있는 형제라고 혹은 지식이 많고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자기 주장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엄연히 살아계셔서 머리로서 일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일은 이러한 주님의 인도에 주의를 집중하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취할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요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1-6)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이 그때부터 살아서 자기 주장을 내 놓고 자기 힘과 지혜로 일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유 가운데 엄연히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데 사람이 큰 소리를 낼 일은 없다. 사람이 할 일은 오직 조용히 그리고 겸손히 그리고 부드럽게 형제들과 보조를 같이 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교회의 각 사람들이 할 일은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심을 받고 함께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 놓여 있는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며 받아들이며 함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즉 내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형제들과 함께) 조용히 붙어 있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 모두를 완전한 자로 빚어 가실 것이다. 그것을 믿고 기다리지 않고 불평과 불만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미워하며 무슨 주장을 내놓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는 교회가 상당한 정도로 진리에서 떠나 그릇 행하고 있을 때라도 즉각적으로 다른 마음을 품음으로써 교회의 연합을 깨는 쪽으로 가서는 안된다. 이는 거짓을 용인하고 진리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 말미암은 문제에 대해 사탄의 방법으로 대처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사탄의 거짓말에 속는 것도 안타까운 일인데 그것에 대응하는 방법도 사탄의 방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참으로 원통한 일이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며 바벨론성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교회 일은 세상 일처럼 육신적으로 대처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 안에서 행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에도 우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성령의 지혜를 얻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는 곧 주님의 때와 방법, 주님의 지혜를 기다리며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11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라고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며 그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일단은 거치는 것 즉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십자가는 확실히 거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를 죽이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중에서 죽는 것, 자기가 꺾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 너머에 부활이 있고 새 생명이 있고 하나님 아들의 완전한 삶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행해졌던 할례는 이 십자가의 예표였다. 그것은 십자가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결코 육체를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 것은 결코 육체의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없었고 그것은 도리어 자기는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게 만들고 그런 가운데서 오실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지 않고 도리어 육체를 부인하게 만든 그리스도를 거부했고 그의 십자가를 부끄럽고 거치는 것으로 여겨 또한 거부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붙잡고 있는 할례가 바로 그리스도요 그의 십자가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는 도리어 그것을 자기의 영광과 자랑으로 삼았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동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그 제사를 말하고 할례를 말한 것과 같다. 제사는 사람의 죄를 전제로 한 것이고 할례 역시 자기 부인(自己 否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을 경건의 모양으로 삼아 자기 영광과 자기 자랑의 기회로 삼는 것이 가능했듯이 오늘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자유를 말하는 우리도 그것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진리와 자유의 실제를 누리지 못한 채 자기 믿음의 참됨과 수준 높음을 자랑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그렇다. 십자가는 육체 안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적어도 일단은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도 십자가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자기 부인과 죄와 고난과 연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있어도 실제로는 이런 사실이 깊이 다루어지고 이것이 실제적으로 드러나서 육체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십자가가 거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에 있다면 한편으로는 분명히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우리 안에 십자가의 실제가 제거되고 도로 육체에 부합하는 그 무엇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만일 할례만 용납했다면 유대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그들에게 보다 쉽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 빠진 그리스도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기에 그는 기어이 할례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피하고자 하면 구원은 없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으면 새 생명으로의 부활도 없으며 파괴되고 무너지고 부정되어야 할 것이 그렇게 되지 않으면 새로운 건축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십자가의 생활이다. 썩어져가고 쇠해 가는 육의 삶을 버리고 날로 새롭게 되는 영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 생활이다. 영이 살 때 육도 산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은 언제든지 영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육체의 기분을 맞추거나 육신의 정과 욕심, 육신이 활력을 얻고 흥분이 고조되는 쪽으로 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