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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5장은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참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에 관한 몇 개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첫째 권면에 해당하는 5:1-6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이 다시 (자기 육체를 신뢰하여)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려는 태도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바울은 여기서 이미 율법이 육신의 연약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롬8:2)이 분명해졌는데도 (할례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식으로) 계속 그것을 붙잡으며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과 자유와 은혜의 구원을 다 잃고 말 것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이 부분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이 얻은 자유의 내용과 성질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다음에 이어지는 둘째 권면 곧 갈라디아서 5:7-9에 나오는 말씀인 누룩을 제거하라는 말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1.그리스도인을 바로 다룸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즉 갈라디아서 4:20에서 바울이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부드럽고 소망적인 어조이다. 그는 갈라디아교회 형제들이 지금까지 달음질을 잘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누가 그들을 막아 진리에 순종치 못하도록 했는지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진리에 순종치 않았다는 것은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 문제이다. 지식으로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대해 동의하더라도 실제 삶에서 무언가 자기 육체로 경건한 모양을 내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 매여 이런 저런 율법을 붙잡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에 순종치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한편으로는 형제들을 칭찬하고 한편으로는 꾸짖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 함께 생명을 받고 형제 된 사람들을 다루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기 때문이다. 이 일이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것은 칭찬하거나 책망하는 일 자체가 조심스럽고 어렵기 때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 곧 겉은 흙으로 된 육체인데 속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여서 한 측면만으로 사람을 다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영생) 자체만 놓고 다룬다면 우리는 사람(그리스도인)에 대해 실망하거나 가르치거나 꾸짖을 필요가 전혀 없다. 오직 칭찬하며 찬양하며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흠 없고 티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겉 사람(육체)만 놓고 다룬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거의 전혀 칭찬을 하거나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오직 불안하게 여기며 책망하며 가르치며 될 수 있는 한 (교제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측면이 다 있으므로 우리는 형제에 대해 한편으로는 절박한 마음으로 가르치고 책망하며 기도해 주고 한편으로는 소망 중에 믿고 바라며 견디며 될 수 있는 한 가까이하여 교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패는 속 사람의 실패가 아니라 겉 사람의 실패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의 실패는 그들 안에 아예 처음부터 진리의 빛이 전혀 없었다는데 있은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어떤 어두움이 그들의 빛을 막았다는데 있었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분리하여 지적했다. 갈라디아인들의 실패는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것 즉 육체의 요구가 영의 요구를 이김으로써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문제는 빛(영, 생명)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데 있다.

그러므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이 말은 오직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속에 지식(빛)은 있는데 생명의 능력이 없어서 그대로 행하지 못하고 언제나 겉 사람(육체)이 이기고 득세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물론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다르다. 이들은 그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그 속에 아들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실패는 세상 사람의 실패(범죄)는 물론이고 유대교인들의 실패(위선)와도 그 성질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속에 있는 좋은 생각(마음)이 밖에 있는 어떤 다른 생각(마음)에 의해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영을 좇지 않고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사정은 불신자 신자를 막론하고 실제적으로는 다 똑같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은 오직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서만 실제로 나타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우리를 속여서 우리로 속에 있는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훼방하지 않는지, 누가 우리 육신의 정과 욕심을 부추겨서 우리로 영의 욕구, 생명의 요구, 양심의 음성을 듣지 못하도록 훼방하지 않는지, 누가 우리 육신의 능력과 지혜를 부추겨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영을 좇아가는 일을 못하도록 막지 않는지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 첫째 문제는 빛이 있느냐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된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겉 사람의 연약함과 실패는 속 사람의 강건함과 승리와 무관한 것이다. 아들의 생명은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 안에 깃들기는 하지만 그것과 성질이 같은 것은 아니다.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빛이 있다. 그는 정신만 차리면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 안다. 이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거짓말을 차단하는 것이다. 육체는 언제나 약한 것이다. 동물은 동물일 뿐이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잠이 오면 자야 하고 좋은 것을 보면 가지고 싶고 좋은 장소를 보면 거기 가고 싶고 좋은 사람을 보면 그와 함께 있고 싶은 이것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든 좋지 않든 육체는 육체의 본성대로 간다. 이것은 탓해도 소용없고 고치려고 해도 안된다. 이것은 벗고(죽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입게 되는 그 날까지는 잘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이 말씀들은 다 육신의 연약함 곧 사람의 동물적 성질에 대해 말한 것이다. 육신은 그것 자체가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없고 오직 육신일 뿐이다. 육신(동물로서의 사람)은 육신(동물)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것이 영의 지배 하에서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통제를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육신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으므로 그것을 멸해야 한다든지 그것을 고쳐서 아예 그 어떤 소욕(욕망, 정)이 없도록 만들겠다든지 하는 생각들은 '육신대로 살자'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사탄에게서 온 잘못된 생각(거짓말)이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이나 형제들의 삶을 바르게 유지하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신자들의 삶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성과 본질 및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면 형제를 도울 수 없다.


2.누룩을 조심하고 거부함

교회의 큰 일 중 하나는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된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바울은 어떤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람이 낸 것인지를 항상 분별했다.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어떠함을 분별했을 뿐 아니라 가르침 자체에 대해서도 언제나 분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교회들도 이러한 분별을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형제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미 아들의 생명을 받은 자요 빛 가운데서 제대로 달음질을 하던 자들인지 아니면 아직 전혀 빛을 본 적이 없고 생명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본 적도 없는 수준의 사람들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여 그에 맞게 대응했다. 이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사람과 가진 것을 빼앗긴 사람은 다르다. 본래 무지한 사람과 속아서 헷갈린 사람은 다르다.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는 후자의 문제이다. 즉 이미 진리를 아는 사람,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사탄에게 잠시 속는 것이다. 속이는 것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는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각 분야에 걸쳐서 범사에 진리로 무장하여 사탄의 속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탄은 언제 어디서 거짓말로 신자를 속일지 모른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사탄의 거짓말은 매우 효력적이다. 여기서 누룩은 유대교 선생들이 퍼뜨린 율법주의 사상이다. 이것은 삽시간에 교회 생활을 변화시켰다. 생명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외형과 외식을 추구하게 되고 은혜와 믿음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율법과 열심을 추구하게 되었다. 누룩 곧 사탄의 거짓말이 교회 안에서 이처럼 강력하고 신속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교회가 누룩에 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 때문이기도 있다. 효모가 물에 반죽된 가루에 들어갔을 때 신속히 크게 부풀리는 것은 그 환경이 누룩(곰팡이)의 발효(확산)에 적당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누룩도 쇳가루나 모래에 넣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는 곧 사탄의 거짓말 즉 육신의 모양을 내게 하고 육신을 의지하게 하고 육신으로 자랑케 하려는 율법주의가 사람들에게 먹혀들고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 안에 본래 그런 것을 원하는 성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인 것이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영광을 거부하고 허무한 일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그릇된 본성을 가지게 되지 않았다면 마귀의 어떤 거짓말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근본적으로 누룩에 약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룩을 잘 분별하고 거절하는 것뿐이다. 누룩은 일단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6,7)

여기서 바울은 교회에 퍼진 거짓된 가르침들을 [적은 누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그 자신이 누룩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거짓된 생각과 가르침들은 그다지 악하거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만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어떤 작은 의견 혹은 작은 주장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성질과 부합되어 육체의 정과 욕심과 자랑을 자극하고 자아의 활동을 부추기는 '작은 생각들'이 가지는 위력은 그것을 내놓는 사람조차 예측하지 못할 대단한 것이다.

진리는 백 번을 말하면 열 번쯤 듣고 열 번을 들으면 삶 속에서 한 번 정도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육체의 소욕을 부추기는 마귀의 거짓말은 한 번 말하면 열 번을 생각하고 열 번 생각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순간마다 수백 수천 번씩 적용되어 사람으로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집회 중에서나 형제들이 집에서 모일 때나 부지 중에라도 마귀로부터 온 허무한 말이나 생각을 내뱉지 말아야 한다. 영에 속한 말은 신경을 써야 하게 되지만 육체에 속한 말들은 아무 생각 없이 무신경하게도 얼마든지 내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고 부러워하고 자랑하는 말을 하는 것, 세상과 같지 못함 또는 육체의 욕망대로 일이 되지 않음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 형제를 미워하며 판단하며 시기하며 욕하는 말, 사람을 자랑하는 것 곧 성공한 사람과 잘된 사람, 좋은 외모(모양)을 갖춘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본받으려고 하는 말, 인간을 옹호하고 육신의 능력과 가능성과 위대함, 인간의 기술과 성취에 대해 크게 말하는 것 등을 조심해야 한다. 이런 말들은 무심하게 내뱉더라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영의 인도에서 떠나 육신을 좇는 길로 가도록 자극할 수 있다.

진리도 누룩 같이 퍼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진리와 생명은 작은 씨와 같아서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조금씩 그 능력을 나타낸다. 물론 진리도 결국은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넣은 누룩처럼(눅13:21) 긴 세월이 지나고 보면 크게 퍼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일단은 사탄의 거짓말보다 그 확산되는 속도가 더디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말과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 26:22)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11:13)
한담(閑談,gossip)한다는 것이 곧 험담이나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다보면 결국 나오지 말아야 할 것들이 나오고 만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나누지 않으려면 아예 (육신대로는) 입을 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 육신대로 입을 벌리면 종국에는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 생명을 변질시키고 약화시키는 악독한 누룩이 나온다는 것과 그 누룩은 매우 위력이 크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는 사람은 별 생각 없이 내뱉지만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된 사상에 오염된 사람들이 교회나 우리 주변에서 진리와 배치되는 잘못된 생각들을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항상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을 의심하거나 배척하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 마귀의 방해에 의해 훼방되는 것을 경계하는 문제이다. 안타깝지만 교회에서 이미 마귀는 큰 세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교회라고 일컬어지는 곳 안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그들을 자기의 거짓말의 전파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주님이 미리 예고하신 바와 같이 교회에는 곡식 씨와 가라지 씨가 동시에 자라고 있다. 우리는 적어도 마귀가 교회에 가라지 씨곧 참 생명의 말씀에 대항하는 거짓 가르침들을 뿌리며 그것이 이미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최소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가라지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맡지는 않았다. 주님은 그것을 심판날까지 그대로 두신다. 왜냐하면 그것을 뽑다가는 곡식까지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분별하며 거기에 휘말리지는 않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뽑아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고의로 혹은 부지중에 내뱉고 있는 허무하고 거짓된 사상과 생각은 발붙이고 득세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심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며 순결을 지키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허용의 문제이고 동의(同意)의 문제이다. 즉 누룩을 거부하는 것은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그 사상을 거부하는 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무릇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따라주면 어떤 사상과 주장은 힘을 얻고 퍼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지 않고 도리어 그러지 말라고 훈계하고 권면하는 분위기가 되면 어떤 사상과 생각은 거부되고 배척된다. 그렇게 사상이 거부되고 배척되면 비록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 자신은 배척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의 거짓말은 계속 퍼뜨려지지 못하게 된다.

진리가 교회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면 거짓말은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압도하도록 자신을 계속 진리로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교회 전체의 분위기를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하도록 교회를 진리로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에 생명을 축내는 누룩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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