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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1.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자유의 근원

2.다시 종이 되면 안되고 반드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함

3.진정한 자유


4.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을 붙잡는 태도를 견지(堅持)하는 것이다. 율법을 붙잡는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 즉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할례를 받든지 제사를 드리든지 안식일을 지키든지 시체를 만지지 않음으로서 부정을 안 타려고 애쓴다든지 기타 어떤 방법으로써든 '하나님을 속의 생명과 인격으로 섬기지 않고 겉의 어떤 일(행위)로 섬기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사람의 생명과 마음, 생각과 정신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직 외형과 일의 변화만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 자신(의 거룩함과 영광)이지 행위나 일(이 장황하고 거창하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에 안하던 일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전에 없던 일이 펼쳐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이 영광스럽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육신(죄인)이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안식일을 지킨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깊은 안식과 평안이 깃드는 것은 아니다. 손을 씻는다고 해서 내 속의 죄도 씻겨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형식은 다 어떤 실제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의 반영이요 파생물일 뿐이어야 한다. 그림자가 실물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2:16)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말은 율법에 명한 모든 의식(儀式)들의 실체(실제)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낸 것이며 할례와 제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낸 것이다. 또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도가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것을 나타낸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시체를 만지지 않거나 문둥병자를 진 밖으로 쫓아내거나 부지런히 손을 씻으므로써 거룩을 도모한 것은 성도가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누리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외부적 형식은 다 속에 있는 생명과 인격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 없는 의식과 행위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애꿎은 양을 잡아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어떻게 속죄가 되겠는가? 살갗의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가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어떻게 거룩을 표시하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제사의 제물이 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사람의 육신을 장사지내지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아무 변화도 없고 아무 일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 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선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곧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할례를 행하는 것이고 손을 씻는 것이고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며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직접 하기 전에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그는 충분히 선하며 거룩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다.(롬13:10) 사랑이 있으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라는 등의 모든 율법을 다 잘 지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율법 조항들을 외우고 그것들을 잘 지키라고 권면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만 들어가면 모든 율법은 저절로 다 성취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들의 생명이 곧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을 포함한 모든 선한 것이 다 아들의 생명 안에 있다. 율법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율법의 모든 도덕 계명들은 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모든 율법은 저절로 다 완성된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즉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면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율법을 붙잡으려는 태도는 자신을 신뢰하고 인간을 내세우는 태도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하셔야 하겠는가? 오직 그의 죄와 허물과 실패를 따라 진노와 심판으로 대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죄인의 피 묻은 손에서 나오는 그 어떤 제사와 섬김도 받지 않으신다. 그러실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모양이 좋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생명)을 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이란 언제나 생명의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지 일이나 행위의 온전함은 아니다. 생명이 좋으면 일도 좋고 행위도 좋은 것이지 생명은 (육신의 생명이든 아들의 생명이든) 상관없이 일만 좋으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다.

나무가 좋으면 과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과실도 나쁜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나무의 질 곧 생명의 질이다. 율법을 붙잡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의지하는 것이고 성령과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접붙임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생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근원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에게 견고히 붙어 있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은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자기 혼자 열매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나무의 생명을 받지 못하고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진 상태라고 했다. 이것은 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나뭇가지의 신세가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은 다 이차 문제이다. 내 목숨도, 생활도, 돈도, 건강도, 가정도, 선행도, 천국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나 이웃을 돌보는 일도 다 뒤의 일이다.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붙어 있는 것을 힘써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를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아들의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에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율법적 사고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 율법적 사고로 사람을 대한다는 것은 사람을 생명으로 판단하고 대하지 않고 외모로 판단하고 대하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인간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2:1-4,12,13)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사람을 겉으로 보는 것이다. 외모란 옷차림이나 인물, 지식, 재산, 명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일 곧 선하고 악한 행위와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까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외모로 판단하셨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차별하지 않으며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전혀 그 무엇으로도 판단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즉 오직 은혜로 대하시며 건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보다는 중심을 보신다. 그러나 외모(일, 행위)는 중심(생명과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다를 수 없고 일치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외모는 물론이고 중심도 볼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인생을 하나님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긍휼과 은혜로 구원하셨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아들들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즉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태도는 사람을 그 외모로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전혀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받는 것이다. 선하면 선한대로 악하면 악한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문제가 많으면 문제가 많은대로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서 자유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율법에서 자유한다는 것은 율법적 사고 방식에서 자유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야고보가 말한 자유의 율법대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박혀 있는 이 율법적 사고 방식은 얼마나 그 뿌리가 깊은지 모른다. 자기도 매일 실패하고 매일 실수하고 매일 후회하며 매 순간 용서와 자비와 이해를 구하는 사람이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실패와 실수와 허물과 못남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며 멸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가 우리를 어떻게 용납하셨으며 어떻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어떻게 죄와 허물 가운데서도 우리를 사랑하고 받으시고 계시는지에 대해 깊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방 사탄의 생각에 빠지고 만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멸망하는 죄인의 특성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구원이란 자기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은혜를 아는 것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아들을 알면 긍휼과 은혜의 정신을 안다. 아들을 알면 자기의 죄와 할 수 없음을 안다. 자기를 알면 율법은 인생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모든 판단과 정죄와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 그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인간들이 쏟아놓는 악과 죄와 허무한 일들을 볼 때 결코 좋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분노와 미움과 정죄와 심판의 마음이 든다. 다른 사람의 악에 대해서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허물과 어리석음을 볼 때도 같은 분노와 화가 치민다. 그것은 인간 속에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본성 곧 하나님이 심어놓은 의의 본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그런 본성을 가지고 계시는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정죄와 심판을 뒤로 미루고 사랑과 인내로 우리를 대하시고 계신다. 그는 율법을 내신 분이지만 율법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긍휼과 은혜로 사람을 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모든 것에 우선하여 생명을 아끼고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사람을 율법적 사고방식으로 대하지 말고 자유의 율법 곧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대해야 한다.

야고보가 말한 [자유의 율법]은 곧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생명의 성령의 법]과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법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제하고 인도하는 원리는 바깥의 어떤 책에 쓰여진 법(의문 율법)이 아니라 자기 생명 안에 새겨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곧 아들의 생명이며 성령의 가르치심이다. 이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며 인도하는 법이 되어서 우리를 항상 주의 길로 인도한다.

이 법은 한편으로는 사람을 하나님께 매이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외의 어떤 속박이나 굴레에서도 자유케 한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기 때문에 그 어떤 법에도 매이지 않는다. 오직 자기 뜻에 따라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 다만 이 자기 뜻이라는 것이 자기 육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생명(성령)의 인도대로 사는 자이므로 '성경이 이것을 명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안해도 된다'든지 '성경이 이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해도 된다'든지 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스스로 생각하여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것이 없고 오직 생명(성령)이 만족을 느낄 때까지 일하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이가 이제는 되었다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우리는 땅에 속한 성공과 육신의 형통을 바라는 자가 아니고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이다. 의의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 모든 문제들이 속 시원하게 다 해결되어 몸과 마음이 편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그 '궁극적인 의의 세계' 곧 죄와 모순과 허무와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거룩이 지배하는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후에(주님의 재림 후에)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은 물론이고 더 가까이는 지금 교회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고 다스리시는 이 일이 더 확대되고 견고하게 되어 천국이 우리 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그 소망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만큼 소망을 이루는 방법도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세상은 모든 일을 자신이 하지만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소망이 이 땅과 육신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자기 미래를 위해서 혹은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발로 뛰고 밤잠을 못자면서라도 고민하고 싸우고 애쓰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누리도록 예비하신 세계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육신으로 율법의 행위를 붙잡는 길을 가지 말고 오직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시고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기 바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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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자유 (3) (갈5:1-6) / 2002. 10. 13 이상봉 2010.05.03 2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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