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약속의 백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아서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예수가 오신 것은 사람을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 짐에서 벗어나 복을 받는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즘 보니까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자주 나온다. 55억, 40억을 받은 사람도 있다. 일생동안 뼈빠지게 일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순식간에 획득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복이다. 이것은 성실과 수고와 노력의 문제가 아니고 복의 문제이다. 그래서 복권인 것이다.
복권은 수고하지 않고 돈을 안게 해 주는 것이지만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인생 자체이다. 주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수고하지 않고 공짜로 얻게 해 주신다. 영생을 거저 얻는 것이다.
이런 인생을 산 가운데 선두 주자가 아브라함이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산 첫 사람 또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산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그가 일생동안 체험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일생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른다. 이 말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그가 매우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그가 엄청난 일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가 매우 고상한 인격과 성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그는 결국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작은 그렇지 않았으며 그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게 진단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그가 복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누린 복이 흔히 말하는 복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누린 복에 대해 생각해 보자.
1.고향인 갈대아 우르 땅을 가족과 함께 떠나게 하심 --- 그 시점에서 볼 때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임
2.제2의 고향이 된 하란 땅을 나머지 친척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게 하심 - 전혀 새로운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살게 하심 --- 가족과도 결별하게 하심
3.기근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에서 살 수 없어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만드심 (12장) --- 어느 정도 가나안에서 자리 잡았다고 할 때 그 상황을 흔드심
4.애굽에서 바로로 말미암아 아내를 빼앗길 위기를 만나게 하심 (12장)
5.유일한 혈육인 롯과 결별하게 하심 (13장)
6.소돔왕의 매력적인 제안을 거부하게 하심 (14장)
7.첩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도록 내버려두심 (16장)
8.가나안의 남쪽인 블레셋의 그랄 지방으로 이주하여 애굽에서와 같은 어려움에 다시 빠지도록 내버려두심 (20장)
9.육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하갈)과 은혜로 낳은 아들 이삭(사라) 간에 갈등과 다툼이 있어서 결국 한쪽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 곧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냄으로써 혈육의 이별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겪게 하심 (21장)
10.블레셋에서 본토인들의 방해와 위협으로 말미암아 여러 어려움을 겪게 하심 (21:25)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그 땅에서의 평안한 삶을 보장하게 하심 (21:22-34)
11.사라가 헷족속의 땅에서 죽었을 때 하나님은 헷족속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기꺼이 아브라함에게 매장지를 내주도록 만드심 (23장)
12.마침내 창22장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시리라는 믿음 또는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들에 대한 약속을 지키시리라는 믿음으로) 기꺼이 거기에 응하게 됨 --- 이 믿음과 이 행동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누린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이제 일을 만났을 때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일의 시작자가 아니요 따라서 일의 진행 과정과 결말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 되어지는 과정이 자기 생각과 같이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아무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그 선하신 계획과 능력을 따라 결말을 지으실 것이므로 자기는 다만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혈통으로 말하자면 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또한 바로 이 사람의 자손이 된다.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와 오늘 우리를 포함한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잇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이 복된 생명은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깃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와 우리의 공통점은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누구를 믿었는가? 그도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는 물론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을 때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보거나 확실히 알고 믿은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을 따름이며 그의 약속을 무조건 믿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의 약속 또한 신살하고 확실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믿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로 말미암아 성령이 보내진 뒤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과 다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우리는 다 자신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로 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으며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주신 은혜, 주신 복을 '믿음'으로써 복을 누리고 사는 삶을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삶 곧 믿음의 삶, 믿는 것을 일생의 유일한 사업과 일과 노동으로 삼는 사람들의 아버지요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잘난 사람도 아니고 유능한 사람도 아니고 인생을 지혜롭고 성실하게 잘 개척하고 영위하여 성공시대에 출연할만큼 성공한 그런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고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행복했고 누구보다 권위있고 품위있게 잘 살았다. 그것은 다 그가 잘났거나 그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덕택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러나 참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가나안이면 가나안, 블레셋이면 블레셋...) 땅이 확보되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부가 창출되고 축적되었으며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그를 우러러 보며 그와 친구가 되기를 원했고 화평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그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그를 택하사 당신의 이름(영광)을 나타낼 그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은 특별하고 복되었다. 그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그에게 '그를 택하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일생동안 배우고 또한 주력한 유일한 일은 그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주어진 복을 받아누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창세기 20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실패에 대해 깊이 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블레셋 지역인 그랄 땅으로 이사를(여행을) 갔다. 거기서 그는 아내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위험을 만나고 거짓말을 했다가 아비멜렉 왕에게 책망을 들었다. 그는 전에도(창13장)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동일한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의 아브라함의 실패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왜 그랄로 이사를 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랄 땅으로의 이 이주는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은 뒤에 이루어졌으며 소돔의 멸망 직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전에 애굽으로 갈 때는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간 것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진 후이고 이삭의 출생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으로 인해 곧 그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돔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세상을 싫어하시며 그들은 모두 심판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헤브론을 떠나 그랄로 내려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별 생각 없이 휴가를 떠났거나 오랫 동안 그 땅에서 살다보니 다른 곳으로 가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에 따른 결정이 아니며 자기 생각을 따라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선택과 행동은 롯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가나안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그랄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로 인해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권력으로 예쁜 여자를 보면 취하고자 한 것이다. 아마 가나안 사람들도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 보호하셨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랄에서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려고 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그랄 사람들은 만일 아브라함이 '이 여자는 내 아내요' 라고 말했다가는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강제로 뺏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 무리들 가운데서 자기 아내를 방어해야 할 부담을 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지키지 않으면 안될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사라가 자기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사라를 빼앗기기는 하지만 자기 목숨을 건지는 일밖에 없었다.
이것은 롯이 그의 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땅에 그 사람'이라는 원리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물론 여기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심으로 위기를 빠져나왔다. 그것도 롯이 경험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이미 한 번 경험한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는 것도 그렇지만 롯의 실패를 방금 본 아브라함이 생각없이 부주의한 행동을 하여 동일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창세기 20장 경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예상 외로 이 문제는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이다. 답은 바로 이것이니, 아브라함은 그 동안의 승리와 영광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별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실패할 자리에 이르면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웅도 아니고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한 사람에 불과하다. 참으로 그의 실패는 한편으로 보면 기이하고 어처구니 없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성경은 진실한 책이며 하나님이 쓰신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결코 사람을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일뿐이다. 승리하는 사람도 승리로만 일관된 것이 아니라 실패와 성공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헤매지만 단지 '부르심의 목적대로 가게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결국 승리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영으로 이 글을 쓰지 않고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의 필요를 따라 이 글(창세기)을 썼다면 이스라엘의 자랑이요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을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창세기 18, 19장을 기록한 후에 20장과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실패의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겪은 경험과 변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우리 자신(자아, 육신)이 완전하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가 (율법-육신 아래 있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인생을 계획하고 내 힘으로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후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인생을 계획하고 성취해 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하신 세계에 대한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제 아무리 그것을 거절하고 방황하고 곁길로 가더라도 결국은 약속의 세계를 좇지 않으면 안되게끔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무엇이든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힘써 추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저절로 약속을 누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본래 지극히 무지하고 의심이 많고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믿고 실행하는 노력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기만 하면 그의 그러한 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약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부르신 자에게 이런 저런 과정을 거치게 하는 동안 빛을 보게 하시고 깨달아야 할 지식을 가지게 하시고 믿음과 의지를 가지게끔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의 내용이다.
우리 걸음의 방향과 걷게 하는 추진력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실상이요 오늘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우리의 실상이다. 우리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전에도 아무런 잘난 것이 없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한심하고 못난 '별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하나님과 교제했다고 해서 오늘 절대로 사탄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이다. 어제 천국의 기쁨과 황홀함을 맛보았다고 해서 오늘 세상으로 고개를 기웃기웃거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참으로 놀라운 변화는 오직 그런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목적대로 갈 수밖에 없고 승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 놓을 수 있는 전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떠함(실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극히 큰 은혜' 아래 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힘이다.
우리는 전에 우리 마음대로 사는 자였지만 지금은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소망을 따라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힘써 그 길로 달려가는 실행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의 가능성, 우리 자신의 마음과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으로 부득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법(육신)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법 아래 있다면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힘써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은혜를 따라 행하는 자이기 때문에 능력이 필요 없으며 믿음 안에서 저절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 믿음도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불신과 의심을 이기고 부흥될 수 있으며 강화될 수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4,15) 이 말씀은 참으로 기이한 말씀이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어서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면 우리는 저절로 죄를 짓지 않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더러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과 의지를 사용하여 죄를 거부하고 의를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이지만 이런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구원) 아래 있어서 아무리 세상으로 나가서 헤매고 범죄하고 실패하더라도 결국은 도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니, 아예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즉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물리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그렇다는 것) 세상에 살 수도 없고 하나님을 거스릴 수 없으니, 자기의 그러한 운명(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서 일어난 변화, 구원)을 알고 엉뚱한데서 헤매지 말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죄가 그를 주관치 못할 사람이며 세상에 그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애굽에도 그랄에도 못 있을 사람이며 오직 가나안에만 있어야 할 자이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마치 그의 이러한 운명과 삶이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애굽이나 블레셋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시도가 어리석고 불가능한 일임을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실패는 참으로 그가 은혜 아래 있는 자이지 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가 만일 창18, 19장의 성공과 승리를 자기의 육신적 능력을 따라 이룬 것이라면 20장의 실패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룬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지 자기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가 믿은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빛을 보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그것을 믿게 되는 것은 다 빠져서는 안될 구원의 과정이며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육신의 능력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지 수십년을 지났지만 아브라함은 여전히 은혜 빼면 시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잠시라도 은혜를 의지하는 것을 놓는다면,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잠시라도 우리에게서 거두어진다면 우리는 도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완악함과 무능은 죽기전까지는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별 수 없는 인생이다.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지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 도장,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구히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실패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도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가 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22:31-33)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7,18) 경험으로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다시는 자기를 의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기 길로 다니지 않고 운명적으로 주님을 좇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자기를 보거나 의지하거나 사람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바라보며 의지하도록 요구하신다.
율법 곧 스스로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율법은 중보자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 중보(中保) 즉 중개인 또는 중매인은 한편만을 위하는 자가 아니라 양편을 모두 위하는 자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율법을 전달한 천사나 모세는 중보자 노릇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도 챙겨야 했고 사람도 챙겨야 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약속을 위반하면 계약은 성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 혼자서 신실하셔서 약속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일이 안되고 반드시 사람도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시내산 계약 ; 출19장)에 성실한 당사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로 인해 약속이 파기되었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정죄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중보를 세운 옛 언약과 달리 하나님의 새 언약은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어떠하냐와 상관없이 하나님만 신실하시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중보는 한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갈3:20)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은혜로운 사실인가! 율법은 사람의 성실함을 요구하지만 은혜는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의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만 요구한다. 이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고와 능력으로 일하는 세계에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을 믿음으로써 복을 누리는 세계로 인도하신다. 바로 아브라함의 세계이다. 우리 모두는 이 복된 세계 안에 있어야 한다.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를 믿음으로써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