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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이루지 못할 목표를 정해놓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서 죽어가는 사람, 바로 이것이 저주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원리가 있다. 자기 분수를 알아서 자기에게 맞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송충이에게는 솔잎을 먹는 것이 그에게 맞는 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각기 자기에게 맞는 길이 있다. 나는 주위에서 공무원 하던 사람들이 은퇴하여 그 퇴직금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업에 투자했다가 일 이년 안에 홀랑 까먹고 빈털터리가 되는 것을 더러 본다. 그리고 사업 잘 하던 사람들이 정치한다 뭐한다 하면서 엉뚱한 길로 들어가서 이도 저도 안되고 실패하는 것도 본다.

그러나 한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보다 더 답답한 일은 안되는 일을 끝까지 기어이 붙들고 있는 것이다. 잘못 들어섰다는 것이 드러나면 즉시 가던 길을 중단하고 길을 바꾸어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에게 맞지 않거나 힘이 미치지 못해서 도저히 실리를 얻을 수 없겠다고 판단되는 일은 과감히 버리고 실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것이다. 명분 때문에 되지 않을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면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학생 시절을 보낸 우리는 항상 머리 속에 공부를 잘하는 것에 대한 소원이 있다. 지금은 공부를 안하는데도 언제나 머리 속에는 공부, 공부 하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더 성화를 부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보니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돈을 잘 버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부 잘하는 것과 관계되는 대표적 직업이라면 고시를 쳐서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교수나 연구원이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고 돈과 관계되는 대표적 직업이라면 돈 잘버는 기업의 사장이 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돈과 명예를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잘버는 의사나 각종 전문가(회계사...)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막상 해 보니 책상에 앉아서 머리 쓰고 책 뒤적이는 일은 내게 맞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내 적성에 맞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아쉽지만 공부쪽은 포기하고 장사나 사업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미적미적하면 아무 것도 안되고 실패하고 말 것이다. TV의 성공시대 같은 프로를 보면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초등학교 중퇴 같은 학력으로 험한 일부터 인생을 시작하는데 나중에 보면 결국 대학 졸업장을 다 가지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을 하다보면 필요가 생기니까 검정고시를 치고 늦깍이 학생이 되어서라도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공부할 여건이 안되는 사람이 나가서 일을 하지 않고 무리하게 학교를 다니려고만 했다면 그는 일도 안되고 공부도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형편을 알고 인생 길을 잘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직업을 택하고 일을 택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인생이 나아갈 길을 전체적으로 선택하여 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어떠하며 인간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능력에 대해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정을 내리셨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1-20)

하나님은 사람이 그 실력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판정하셨다. 이 말은 인간은 그대로 가면 다 멸망이라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자기 목적대로 운용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피조물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도에 맞지 않는 모든 것들은 심판하여 제거하실 것이다. 벼를 심은 농부는 벼만 원하지 피나 잡초나 이삭 맺지 못하는 병든 벼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솎아진다.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지 않다고 판정하시고 심판 아래 있다고 판정하시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멸망할 것이라는 선고이다. 그리고 지금도 실제로 파멸과 고생의 길에서 평강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진단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이러한 판단이 옳다는 것을 매순간 입증해왔다. 20세기 초엽까지 서양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본질과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해왔다. 그들은 교육이 부족하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더러 죄를 짓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충분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생활 형편이 좋아진다면 더 이상 범죄하지 않고 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근대사회가 형성되는 가운데 일반 대중들의 교육 기회가 급격히 늘어나고 경제적 형편이 좋아져 삶의 질이 높아졌지만 죄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계몽되고 지성화되고 부유해진 유럽 각국들은 삶의 형편이 나아진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이전보다 더 이기적이 되어서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제국주의의 길을 갔다. 사회 내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가 더 심해졌다. 부유한 나라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어떤 죄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종류가 바뀐 것이다. 사회의 형편에 따라 사람들의 죄는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죄의 양이나 질은 여전했다.

개선되고 개량되었다고 하는 현대 인류의 실상은 세계제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그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었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혹은 아무 까닭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었다. 많은 죽음과 파괴들 안에서 인류는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도 득이 없는, 아무 의미도 없는 미친 짓들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일을 보라. 그것은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하찮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그리고 얼마나 잔인하고 조직적으로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독일은 근대화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약간 뒤졌지만 그래도 유럽 최고의 사상과 지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 최고의 지성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이로서 2차대전 후에는 유럽 사상계에서 그동안 지속되던 낙관주의와 낭만주의가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인류에게는 (지식은 있을지언정) 지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생에게는 참으로 지혜가 없다. 갈수록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지식은 교육과 관련된 것이지만 지혜는 생명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기회가 늘어나고 삶의 활동 영역이 확대되어 사람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면 지식은 늘어나게 되지만 지혜는 생명이 바뀌지 않는 한 생겨나지 않는다.

지혜 없는 인생이 지식만 풍부해지는 것은 어린 아이가 날카로운 칼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다.

인류 역사가 인류의 실력이 어떠한지를 입증해온 것처럼 우리의 지난 삶도 우리의 실력이 어떠하며 우리의 체질이 어떠한지 입증해왔다. 우리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가정 생활, 일터에서의 행동들은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며 우리의 실력과 한계가 어떠한지 입증해왔다. 모든 것을 마음 먹은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항상 떳떳하고 만족스럽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길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 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안될 것을 붙잡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듣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길을 버리고 자기 생각과 능력을 따라 잘(선하게) 살겠다는 길을 택하는 것은 되지 않을 일을 택하는 것이다.

생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결코 지식이나 의지와 결심으로 개선되거나 개량되지 않는다. 타락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못박혀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새롭게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율법을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저주는 무서운 것이다. 한 번 정한 길은 길을 바꾸지 않는 한 그대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배로 가는데 물을 배제한 채 갈 수는 없는 것이고 차로 가는데 도로를 배제한 채로 갈 수는 없다. 자기 인생을 자기 힘과 지혜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해야 하며 결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책임도 자기가 지고 열매도 자기가 거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는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실제 삶에서 다 자기 생각과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가 겪은 많은 실패와 고생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 우리 인생길을 전폭적으로 맡기지 않고 자기 허무하고 어리석은 생각과 능력을 믿고 끝까지 자기가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데서 온 것이다. 이것을 교훈 삼아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선악을 판단하는 일 곧 선한 것은 취하고 악한 것은 버리려고 하는 일과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옳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행할 충분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방식으로 구원을 얻고 삶의 행복과 안식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이다. 유사 이래로 선악을 따지고 율법을 지키려고 한 사람들이 빚은 대부분의 결과는 실제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아니라 남을 판단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완전한 구원을 가볍게 여기고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율법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사람은 할 줄 아는 것을 안하고는 못 견딘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것이 있으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합창을 할 때 보면 꼭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보다 노래를 좀 한다 하는 사람이다.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크게 내면 부끄럽게 되기 때문에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내지 절대로 튀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잘 부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맞추기 어렵다. 그것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서 나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율법의 유혹, 사탄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무능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거부하고 기어이 자기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머리 나쁘고 잠 많고 거기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학생이 이름만 써내면 거저 합격시켜주겠다는 제안을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바로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의 모습 아닌가? 이런 사람은 저주를 자초하는 것이다. 능력이 못 미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과하는 것은 그에게 짐과 저주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사람에게 부과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짐을 부과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이런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내셨다. 이제 우리는 그가 우리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시고 담당하시는 것을 믿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인생의 최고 지혜고 성공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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