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고 말했다.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곧 율법의 저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다는 첫째 의미는 사람이 약하고 무능하여 하나님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았으므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때 율법의 저주란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의미이다.

율법은 누구든지 그것을 어기는 자를 저주한다. 그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것이 적용되는 자에게 언제나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요구하며 그것을 어기면 멸망이 오게 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육지 동물은 땅에, 수중 동물은 물에서 살도록 지어졌다. 말하자면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육지 동물은 반드시 땅에 있어야 하고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어기면 망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의 삶의 길로 정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 옳은 것이며 사람은 반드시 그대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거역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죽음과 멸망이 따른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을 심판한다고 하기도 하고 모세가 사람을 심판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율법을 정하신 하나님이나 율법을 전달한 모세가 굳이 어떤 심판을 하지 않아도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말씀(율법, 진리) 자체로부터 심판을 받는다. 진리가 사람에게 상도 주고 벌도 주는 것이다. 누구든지 길대로 가면 형통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은 율법의 저주를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이 옳다고(진리라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런 인류를 십자가에서 쓸어 안고 심판을 받음으로써 사람이 다시 또 율법의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구원은 아니다. 율법이 살아 있는 한 율법은 사람에게 계속 순종을 요구하게 되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사람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계속 율법에 부응하지 못하고 죄와 실패와 무능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면 아무리 주님이 우리에게 율법으로 말미암는 최후의 저주(심판)을 면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완전한 구원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는 한 사람은 사는 날 동안 항상 실질적인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즉 율법을 범하면 음으로든 양으로든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밖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너 왜 이것을 못하느냐, 너는 왜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지적을 받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 양심으로부터 부끄러움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역사는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이 되었다. 이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보자.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다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사람은 약하고 무능하여 결코 하나님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능히 이루시는 분(그리스도)을 우리 속에 모셨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스스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우리 자신이 없는 힘을 발휘하여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는 사람이 스스로 율법을 행해야만 하는 자리에서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저주를 받는 사람도 있고 안 받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고 예외없이 다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율법을 거부할 수 있다거나 그 길대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데 사람 자신은 그것을 할 수 없으니 대신 하나님의 요구에 완전히 부응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가지신 분을 자기 속에 모시는 것이 유일한 길인 것이다.

나는 못할지라도 이제 내 안에 계시며 내 생명이 되신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시니 나는 더 이상 스스로 일할 필요가 없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며 그가 일하시는 것을 기다리면 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이것은 큰 변화이며 이것이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저주스런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노예가 감독이 되면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죽자고 일해야 하는 사람이 더 이상 일하지 않고 대신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이 일을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자리로 옮겨진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구원인가! 구원은 곧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기는 것이다. 일하는 자의 자리에서 은혜와 복을 누리는 자의 자리에 옮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스스로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 누군가 나를 위해 대신 일해주는 것을 즐기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다.
종의 자리는 저주의 자리요 아들의 자리는 복된 자리이다.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삼고 당신의 신부로 삼고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15:13-15)


사람이 사탄에게 크게 속아서 허무하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그 {존재}의 가치를 모르고 {소유}에 집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기서 파생된 것으로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복과 은혜를 누리는 삶}을 알지 못하고 계속 종처럼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와 소유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상관 관계가 있다. 존재란 내가 어떤 자이냐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지음 받았으며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란 나 자신이 어떠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는 존재와는 무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얼굴이 존재라면 거기에 달린 귀걸이나 목걸이나 모자, 가발, 얼굴에 발려 있는 화장품 등은 소유인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더하여진 것이지만 결코 존재 자체는 아니다.

여기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존재가 든든하고 견고하면 소유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다지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기는 화장을 하거나 장식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기 자신이 그럴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서도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그것을 대신 해 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의 생명은 순수하고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에 전혀 꾸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향수는 서양 사람들이 (버터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몸에 노린내 같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뿌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뿌리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존재가 부족하고 허전하기 때문에 소유에 집착하고 무언가를 보태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과연 이것 저것을 끝없이 가져야만 하는, 즉 소유에 매달려야 하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이 사탄에게 속아서 자기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 자체로서 존귀하고 아름답다고 하신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흑인이나 백인이나 (소위)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그것은 다 사람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무 차별 없이 다 귀하고 아름답게 보신다. 왜냐하면 그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존재는 영광스럽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으며 아무도 그를 못났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는데 누가 이러쿵저러쿵 하겠는가?

문제는 사탄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지음 받은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떠났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존재의 측면에서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자신은 존재에 있어서 아무 문제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존재로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항상 부족한 자처럼 무언가 아쉽고 불완전한 자처럼 이것 저것을 붙잡고 보태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귀신 들린 것이다.

돈이 아주 많은 큰 부자는 자기 재산을 세고 앉아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의 부를 확인하려고 애써 비싼 밥을 먹고 특별한 옷을 입어 자기가 풍부한 자인 것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소유에 집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졸부들만이, 혹은 돈이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자기 돈을 세며, 옷과 치장과 자동차에 신경을 쓴다. 그런 것으로 자기를 꾸며야만 자기가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영광스럽고 부유한 사람은 소유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주인 집 아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꼽쳐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 재산이 다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은 아무 것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회가 나면 하나씩 물건을 빼돌리거나 장만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자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는 아무 소유도 없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지만 그는 무엇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그는 부도, 명예도, 가정도, 자녀도, 사람들의 지지도, 큰 조직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요 세상을 유업으로 상속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분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소유에 집착할 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충만한 영광을 누리를 자이다.

이 누림에 관해서 더 생각해 보자. 무릇 종은 언제나 일을 생각하고 아들은 언제나 누림을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은 일해야 하는 자이고 아들은 일할 자가 아니라 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은 오늘은 일을 얼마나 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해서 오늘 일을 좀 적게 하고 땡땡이를 칠 것인지를 생각하지만 주인의 아들은 오늘은 어디 가서 누구하고 놀며 누구를 부려서 재미를 볼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은 율법과 관련되어 나오는 것이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일이 있게 되어 있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면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율법은 육신(자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육신과 반대되는 것은 성령이다. 육신(자기)이 죽은 사람은 스스로 일할 수 없으므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은 육신의 생각이며 종의 생각이며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탄에게서 나온 생각이다. 그것은 결코 아들의 생각이 아니다.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천지창조의 역사, 에덴동산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타락으로(사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가려져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 안으로 넣으심으로써 이 사실을 새롭게 드러내셨다.
아브라함은 일을 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사는 사람은 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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