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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주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큰 구원, 큰 축복 중 하나는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여 [하나의 새 사람]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그리스도가 우리 옛 사람을 십자가 안에서 다 처리하고 지금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한 새 사람으로 다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 또는 자유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다는 것은 이런 차별만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사람은 다 다른데 차이는 없고 차별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차이는 있는데 다만 판단이나 차별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차이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다른데 차이가 없다는 것인가? 물론 육체적 차이는 여전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의 육신적 형편이 다 같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실제적 변화가 없는데 말만 하나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이 바뀌고 생각과 행동이 바뀌어 다 하나로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한 새 사람이 있고 그 안으로 우리가 들어갔는데 나중에 보니 다 하나가 되더라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라는 큰 몸에는 아브라함도 들어와 있고 모세도 들어와 있고 다윗도 들어와 있고 베드로도 들어와 있는데 우리도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 안으로 들어오면 이전의 모든 차이는 없어지고 다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몸이 되게 된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있는데 서로 같아지고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없어지고 너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없어지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만 남게 되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인데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나타낼 자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대표자 또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하나의 사람이요 새로운 종류의 인류이다. 예수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처음이요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있는 것이다. 그 숫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숫자와 같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따로 따로 그리스도(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의 큰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와 몸의 각 부분(지체)을 이루는 각 성도들의 단체로 구성되는 하나의 거대한 새 사람이 된다.

성경은 부활하기 전의 예수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지만 부활 후에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른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 후에 교회의 머리 곧 단체적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셨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의 이전 성분이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새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소유하게 되며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의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위치에서 옆의 사람을 보면 점점 자기와 닮아지며 또한 자신도 옆의 사람과 닮아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을 때 사람은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사람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며 판단케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으면 사람은 서로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서로 차별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 미워하고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적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적 마음은 따지는 마음이고 판단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으로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율법으로 판단하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은 처음에 하와를 볼 때 '나는 남자인데 저 사람은 여자이니 나와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보다 더 낫다든지 네가 나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가 싫다거나 너와 나는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서로 (율법으로) 판단하고 차별하고 분리하며 다투게 된 것은 사탄이 사람 안에 선악과를 넣어준 이후부터이다.

이런 생각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후 사람은 서로를 생명으로서가 아니라 율법으로서 대하게 되었다. 율법으로 보니 사람은 다 다르고 다 마음에 안 들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똑 같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수준이 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 속에는 '다르면 하나 될 수 없다'는 사탄의 거짓말이 들어 있기 때문에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율법(선악)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세상에는 나와 연합할 수 있는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 이런 저런 차이로 인해 '같이 살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류에게는 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의 요구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해서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서로 율법을 지키는 수준이 다르다는 것만 본다. 그리하여 누구도 득 볼 일 없는 판단을 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가보면 두 사람만 모여도 아래 위를 따지며 줄부터 세우려는 것을 본다. 40명이 모인 반에 가보면 우리가 보기에는 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하는 같은 처지의 '동무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데도 자기들 안에서는 친구나 동무는 없고 1등부터 40등까지의 줄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누구도 같을 수 없다. 1등이거나 30등이거나 90점짜리거나 50점짜리일 뿐이지 그냥 학생, 그냥 사람으로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꼭 그렇게 집어서 따지거나 그렇게 줄을 세우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결국은 그렇게 되는데 그것은 각 사람 마음 속에 그런 '줄을 세우는 본성 곧 사람을 선악으로 따지고 판단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냥 사람이 아니고 그냥 같은 피조물,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줄 가운데서 몇째냐 하는 것이 되니 어느 사람도 같이 살고 연합할 만큼 동질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얼마나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는지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 마음 속에는 본성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작용하는데 그 첫째는 '너는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나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고 둘째는 '그러므로 너는 나보다 못하다. 나는 너보다 낫다' 하는 생각이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서로 만나면 먼저 따지고 판단하기부터 한다. 누가 자기를 재판자로 세운 것도 아닌데, 그리고 자신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리고 어디에 누가 완전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사람 안에 본래부터 심어놓으신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사람에게 몰래 집어넣어 놓은 거짓된 생각이다.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지으사 서로 화평케 만드셨다는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 자유인이나 종, 남자나 여자, 어른과 아이, 지식인과 무식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고 있던 모든 장벽을 자기 육체로(십자가에서)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

사람을 나누게 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다. 그 중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나누는 요소는 주로 종교적인 규례였다. 안식일, 성전에서의 제사, 할례, 음식을 가리는 일과 같은 종교적 규례로 인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이런 것까지 다 폐하심으로써 서로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가장 근본적인 장벽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죄'이다. 주님은 이 죄를 처리하기 위해 자기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와 나의 모든 차이와 차별과 분열을 가져오는 모든 장벽을 다 끝내고 허물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사람과 연합할 수 없는 절대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차별할 수밖에 없고 서로 갈라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나는 너와 서로 연합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래된 전통이든 최근에 생긴 원칙이든 다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무덤에 가면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계획, 모든 잘난 것과 대단하다는 것이 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 앞에 가면 인간의 모든 계획과 소망이 다 허무하다는 것을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 가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고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한다면 그의 인생은 허무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미리 우리를 끝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우리 육신에 속해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다 끝내는 것이다. 사업에 몰두해 있는 사람도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음에 이르게 되면 "아 사업은 헛것이구나!"하게 되고, 고시에 몰두하는 고시생이나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도 죽음이 임박하면 "아 공부도 헛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며, 쾌락에 도취돼있던 사람도 죽음이 다가오면 "이것도 헛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낸다. 십자가는 이와 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끝내기 위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분 혼자 지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에 즉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지만 실제의 체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세례를 받으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각종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확인받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리고 날마다의 단련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끝내시고자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대표할 하나의 우주적 새 사람을 얻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 새 사람]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것을 폐지하고 허무시는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세계다. 한 새사람이라고 표현되는 새로운 인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전적으로 새로운 성품과 본질이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교리 저런 교리, 이런 규례 저런 규례를 가지고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해보니 이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다른 교회처럼 어떤 규칙이나 율법이나 교리나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의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끼리는 편하고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도 그들을 보면 이상하다. 우리가 그들을 볼 때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들이 우리를 볼 때는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예배를 본다고 하는 자리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꼭 염불 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은 이상하다. 왜 주기도문도 외우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축복기도를 안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꼭 축복기도를 한다고 해서 축복이 되겠는가? 사람이 복된 위치에 있고, 사람이 달라지면 축복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런 일이 허무한 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을 만들어내고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서로 다른 것들이 다른 교회와 우리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안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성격이 서로 다르다든가, 관습이 다르다든가, 취미가 다르다든가, 어떤 기호가 다르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긴 옷을 입기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짧은 옷을 즐겨 입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교제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런 교제를 좋아한다. 여러 가지 기호와 습성이 다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 때문에 걸림이 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런 것들은 근본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인데, 이것으로 인해 속이 상하고, 하나님 말씀이 안 들리고, 어떤 형제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호감이 가는 형제의 말은 잘 들리는데 호감이 가지 않는 형제의 말은 듣기 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 때 좋아하는 형제가 나와서 간증하면 잘 들리는데 싫어하는 형제가 나오면 옆에 사람과 얘기한다든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서로 연합하는데 방해되는 것들이다. 우리 안에는 굵은 문제는 없다. 큰 문제는 이미 다 지나갔다. 그러나 지극히 사소한 아주 작은 문제들이 우리의 연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면이 다를지라도 한 본질, 한 생명을 봐야하고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다른 것이나 그것을 획일화시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으로 다를지라도 한 본성, 한 생명, 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다.

한 본성, 한 말씀, 한 생명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우리의 외형적인 것은 서로 달라도 본질은 서로 같다. 우리는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의 주장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과 서로 화합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교제를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장]이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옛날에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간증을 하러 나와서도 자기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99%정도는 없어졌다. 자기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주장을 하면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장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주장해도 그렇고, 나쁜 것을 주장해도 그렇다. 주장하게 되면 반드시 분열이 생기게 된다. 교회를 분열케하는 심각한 문제가 바로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와 다른 사람의 다른 점, 반대되는 점을 자기 입장에서 통일시키려고 하는데서 나온다. 주장이 심해지면 속이 상하게 되고, 불쾌해지게 되고, 싸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도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하고, 교회 안에서도 자기 주장을 버려야 한다. 교회는 주장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되는 곳이다. 하나를 위해서는 주장을 버려야 한다. 어떤 주장이라도 주장을 버려야 한다. 내 생각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안 받아들이는 것을 기어코 설득하려 하든가 주장하려고 한다면 분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무엇인가를 획일화시키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통일시키려고 생각하니까 조화(調和)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 인간이 철저하게 만든 제도는 주장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인간이 만든 것이다. 물론 다른 것도 다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이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공산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주장을 갖고 있다. 가장 철저한 주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많은 희생을 가져왔던 것이다. 같은 정치를 하더라도 저절로 흘러 내려가면서 되어진 것과 계획적으로 설계도를 그려서 하는 것은 다르다. 공산주의는 미리 설계도를 만들어서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은 희생이 따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분열하게 하는 요소들을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끝낸 것이다. 십자가에 갔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도, 음식을 가려먹은 것도, 안식일을 지킨 것도 아무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오직 내 자신밖에는 설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내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모든 인류를 이끌고 십자가 앞으로 가신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십자가 앞으로 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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