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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요한의 권세

이상봉 2010.05.04 14:25 조회 수 : 3162

제7과 요한의 권세 


요한복음 1장
 

9.요한의 권세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1:15,19-28)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나와서 자기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정체를 물었다. 그들은 그가 약속의 구원자 그리스도인지를 물었다. 그때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다” 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재차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너는 누구이며 왜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기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권세가 크다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요한의 이러한 대답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그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소명(召命, 지시)에만 주의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21:25-27) 주님과 유대교 지도자들간의 이 대화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요한의 권세는 이미 그때 백성들 사이에서 확고하였다. 그는 죄와 고통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전파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크게 여기지 않았고 자기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겸손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말로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지만 행동으로는 자기를 드러내고 옹호하기를 힘쓰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겸손과 자기 부인은 자기 존재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우주 가운데서, 긴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하나님의 큰 목적 안에서 극히 미미한 것이다. 하루살이(날파리) 하나가 어제 있다가 오늘 없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생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지 않다면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자뿐이다(벧전1:24,25, 요일2:17).  


요한은 자기 권세의 근거를 묻는 자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자기의 권세를 입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를 증거했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세는 백성들 가운데서 확고했으며 심지어 악한 유대왕 헤롯조차 그를 경외하였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막6:19,20)  

 

요한은 우리에게 권세가 어디서 나오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참된 권세의 근원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사람의 권세는 오직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 자리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높일 때 권세가 생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권세는 오직 권세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며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출 때 생기는 것이다.  


10.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1:29-34) 


세례 요한은 주님을 어린 양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다. 요한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했는가? 어린 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친 동물이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한 희생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구약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게 될 메시아(그리스도)를 어린 양이라고 묘사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6-8) 그러므로 요한이 주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한 것은 그가 백성들의 죄를 지고 갈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어린 양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완전한 순종과 헌신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이름이다.  주님은 참으로 어린 양이었지 호랑이나 사자가 아니었다. 어린 양은 주 예수님의 모습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본래 모습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람은 호랑이나 사자처럼 무엇이든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를 바치는 어린 양과 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참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의 진정한 모습이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명확하게 볼 수 있거니와 지금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사자나 호랑이는 없고 오직 어린 양만 있다는 것이다.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1-5) 어린 양에게는 자기 뜻과 자기 길이 없다. 그는 오직 자기를 이끄는 목자를 따라간다. 그러므로 그의 이마에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영원한 특징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아버지(하나님)의 뜻과 다른 자기 뜻과 목적이라는 것이 없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런 사람은 꼭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없다. 남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살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주님과 같이 추하고 꺼림 받는 자리에서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주 예수님은 고고한 성인군자나 구도자의 모습으로 살다가 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분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죽으러 가는 어린 양(죄인)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은 분이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돌보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주님의 헌신으로 인해 오늘 우리가 구원을 누리게 되었다. 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잠시 수치스럽지만 길게 영광스러운 길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길이다.  


주 예수님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길이 다 그러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귀한 아들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어려운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며 그러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떠한 자리로 부르심을 받든지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지 말고 부르신 이의 뜻을 좇아 헌신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증거한 것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이 우리에게 소개한 것은 우리의 자리가 곧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한 어린 양으로 바친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자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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