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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과 어떤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이상봉 2010.05.04 15:07 조회 수 : 2808

제25과 어떤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요한복음 5장
 

39.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체험할 수는 있다. 믿고 받들며 섬길 수도 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지만 결코 자기를 감추지 않았으며 그의 종과 아들 곧 선지자들과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항상 자기를 나타내오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보다 월등히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머리)은 오직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인식한다. 지구 안에 있는 작은 인간이 온 우주를 다 이해할 수 없듯이, 태아가 그를 품고 있는 어머니를 다 이해할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머리로 하나님을 다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느끼고 누릴 수는 있다. 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느끼며 누린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어머니 안에 탯줄로 붙어있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도 이와 같다. 누구도 하나님을 다 알고(이해하고) 나서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느낄 수는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명을 얻고 그래야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마음)이다. 하나님의 존재의 어떠함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과 뜻을 그가 보내신 종들을 통해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며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땅에 있는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보내신 자)이다. 그래서 영생은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요17:3) 그러나 이 둘은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아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고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지(받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만물의 머리(주관자)로 세우시고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며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자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몰랐고 그의 보내신 아들을 거절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진리는 이것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그가 보내신 자를 통해 말씀하시며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홀대했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선지자들과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감추어서 그 음성(말씀)을 듣지 못하고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나타나신 하나님’, ‘그들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 있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책망을 들은 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듯이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거역했고 그들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사람이 하나님은 공경한다 사랑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는 공경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은 그가 사람의 삶에 직접 개입하여 간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직접 사람에게 부딪힐 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과 아들은 얼굴을 맞대고 직접 부딪혀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책(율법) 속에 있는 존재도 아니고 역사 속에 있는 존재도 아니다. 지금 내 앞에 있으며 나를 향해 말을 하는 존재이다. 그는 내 육체의 길을 가로막는 자이며 내(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이다. 그러니 싫어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공자를 공경하며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앞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 개입하여 직접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한다 하는 사람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며 거절한다. 공자(의 말씀)를 사랑한다 하는 사람도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눈 앞의 선생은 싫어하며 거절한다. 이것은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며 자기의 육체적 욕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지식이 있고 양심이 있기 때문에 진리(하나님)에 대해 약간의 호의(好意)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 생활을 하는 인간의 실상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29-38) 

 

유대인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믿지(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자기(의 생각과 욕구)가 죽어야 하고 자기가 살려면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것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이나 진리를 찾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애굽(세상)에서 나오고 약속의 땅(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도 그들이 스스로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열심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후에도 한 가지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그의 상황(구원)을 인식하고 마음을 열어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이나 가나안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의 모든 화려한 건물과 물건들을 다 불태우게 하신 것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온 자이며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여리고 성에서 돈과 옷을 감춘 아간을 공개 처형한 것이다. 초대교회가 시작된 후에도 그랬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 베드로가 헌금을 속인 아나니아 부부를 징계하여 죽게 한 것은 교회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이렇게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의 변화된 상황(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에 남기를 원한다면 그는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끝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결과 “보라 너희 집에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요는 사람이 하나님(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원하는가 아니면 사람(세상)의 영광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본래 사람이 아는 것은 세상 영광뿐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의와 진리의 삶, 거룩하고 진실한 삶, 사랑과 생명의 세계를 알게 하셨다. 사람은 성령과 함께 힘써 이것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육체대로 살며 육체의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육체를 죽이는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6,17)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그들은 자기를 보존하기를 원했으며 육체대로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보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얻고자 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5:39-44)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능이나 지식, 지혜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머리 문제가 아니라 가슴 문제 즉 그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가 만일 육체의 즐거움을 원하고 사람(세상)의 영광을 원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성경에서 그것에 도움되는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기도에서도 그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축복)를 누리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를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세상(육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광을 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원치 않는다면 유대인들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다. 성경과 선지자와 그리스도는 다 하나님을 말하는(나타내는)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는 그 외 다른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선명하게 해야 하고 우리의 길과 태도를 선명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에 서 있다면 우리 자신도 세상에 대해 그러한 위치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리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세계를 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 가지 재주와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단지 당신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헛된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유명한 사람들과 영광스러운 사람들이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옴으로써 우리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오지 말아야 한다. 오직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모하여 나아오고자 하는 사람들만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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