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와 보라
요한복음 1장
11.주님의 권세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십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1:29-46)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그리스도)이라는 요한의 증거를 듣고는 예수님을 따라갔다. 주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주님이 계신 곳을 물었다. 그들이 주님의 거처를 물은 것은 그의 주소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지를 확인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주님과 함께 얼마간 지내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그 날 주님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그 중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는데 그는 주님과 짧은 시간을 보낸 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으며 다음 날 주저 없이 그의 형제-베드로-를 찾아가서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했다.
빌립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과 잠시 함께 있는 동안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고는 그의 동네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기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주저 없이 증거했다. 그때 나다나엘이 나사렛 같은 동네에서 어떻게 메시아가 나겠느냐고 반문하자 빌립은 두말없이 “와 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주님을 찾았을 때 주님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그를 즉각 굴복시켜 그의 제자가 되게 만드셨다.
사람들은 짧은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냈지만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몇 마디 말,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고귀한 몸짓, 그의 여유와 안식, 그의 통찰력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입증했다. 그의 말과 행동, 그의 정신과 삶에는 권위가 있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들과 다른 사람이며 유대교의 선생들과도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즉시 느낄 수 있었다.
안드레와 베드로, 빌립과 나다나엘은 주님과 하루 이틀을 보내는 동안 무슨 큰 기적이나 기사(奇事)를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주님과 잠시 같이 있었으며 그로부터 몇 마디의 말씀을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권세이다.
주님의 이러한 권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주님의 권세는 바로 그 속에 있는 권세 있는 생명(인격)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다. 사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는 주님의 권세는 그 안에 있는 고귀한 정신과 놀라운 지혜 그리고 풍성한 진리의 지식에서 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사람을 알았다.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자신이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에는 권세가 있고 그의 행동에는 위엄이 있었다.
물론 주님 안에는 오직 하나님(창조자)만 지닐 수 있는 특별한 능력(통찰력)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으로 그는 나다나엘의 과거와 미래를 읽어내실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주님 안에서 권세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신비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고귀한 인격과 정신 및 거기서 나온 권세 있는 말씀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를 포장하거나 자기의 영광과 권세를 힘들여 변호하고 입증할 필요가 없다. 다만 ‘와 보라’는 한 마디의 짧은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아들)의 생명으로서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권세 있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많은 말을 하거나 많은 일로써 자기를 포장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힘써야 한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17:3) 그리스도를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 권세 있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사람의 본질을 알 때 우리는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알 때 우리는 세상이 어디로 갈 것이며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과거나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신비적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능히 사람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이고 권세이다.
육체의 능력을 강화시켜서 대단한 사람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며 진정한 권세자가 되는 길과도 거리가 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박사가 되거나 부자가 되거나 큰 권력을 가지거나 큰 일을 성취하게 되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상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하나님의 권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은 전도도 감화도 다 육체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속 사람의 능력과 권세이다.
멀리서는 그럴듯해도 가까이 가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 밖에서는 굉장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천박하고 초라하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려고 할 때 우리는 다만 “당신은 내게 와 보시오” 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와 보라’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참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권세 있는 생명(인격)이 없다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실망만 안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12.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그리스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1:45)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구약 성경은 예수라는 이름을 말하고 있지 않다. 모세는 그가 기록한 율법의 어느 부분에도 직접적으로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다른 선지자들도 막연하게 마지막 날 여호와의 종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정도만 말했을 뿐 주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여 예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 기자들은 성경이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25-27) 심지어는 주님은 아브라함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즐거워했다고까지 말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그 밖의 여러 선지자들이 예수라는 사람은 못 보았지만 하나님은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는 몰랐지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곧 ‘인격이시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격’이신 분이다. 인격이란 말은 사실상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다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이며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신 하나님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추신 하나님’, ‘인격을 입으신 하나님’이다.
본래 하나님의 완전한 모습이 어떠한지는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사람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자기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완전히 낮추실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셨든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같이 하나님이 인격화되어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때는 천사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꿈과 환상으로 어떤 때는 자연 현상으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다 사실상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시적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것뿐 아니라 말씀(율법과 선지자)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것 역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때의 하나님은 다 ‘나타나신 하나님’이며 그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말씀의 ‘표현’(presentation, 나타남)이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어떤 형식으로든 하나님의 임재(臨在, presence)를 경험한 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그들은 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곧 하나님의 아들(聖子)을 만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을 사람들에게 증거했을 때 그들은 사실상 주님을 만나고 증거한 것이다. 그들이 그때 만난 ‘그 말씀’은 때가 차매 육신(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요한과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이 주 예수님을 가리켜 성경에 기록된 그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요한과 빌립이 주님을 성경에 기록된 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안식했다. 그들이 만난 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들이 누린 것이 어느 수준까지였든지 간에 그들은 결국 약속을 누렸던 것이다.
농부는 봄에 (꽃이나 열매가 아니라) 단지 씨를 심지만 그가 거두는(기대하는) 것은 씨가 아니라 꽃과 열매이다. 씨를 심는 자는 단지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곡식 자체를 심는 것이다. 약속을 믿고 붙드는 자는 그가 당대에 단지 약속의 증거만 받았을지라도 실제로는 약속 자체를 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은 그 당대에 단지 이삭 또는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들 정도밖에 보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나라(백성)와 그 왕이신 그리스도를 누린 것이다. 이삭과 야곱 안에 이스라엘이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시대에 이미 그리스도(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만나고 그 안에서 기뻐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어느 한 부분이라도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않는 부분이 없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지 않은 부분이 없다. 성전과 제사제도, 안식일은 물론이고 모든 율법의 규례와 의식들, 이스라엘의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다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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