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20과 참된 양식

이상봉 2010.05.04 14:56 조회 수 : 3565

제20과 참된 양식

 

요한복음 4장
 

27.단순하고 가난한 자의 구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5-30)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 그에게 약속의 말씀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구원자)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둘째, 그가 그것을 기다린다. 셋째,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아니면 아무 소망도 없는 상태로 삶이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진실로 은혜를 갈망하는 상태가 된다. 넷째, 그리스도를 만난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며 그의 권능을 체험한다. 여섯째, 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서 구원을 누린다.  


구원을 받지 못한 다수의 유대인들과 이 사마리아 여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수의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모르거나 그를 기다리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들의 형편이 어렵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객관적 처지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사마리아 여인과 달리 부유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선민(選民)이라는 의식과 그들이 행한 약간의 종교적 행위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부유하고 교만했던 것이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그러므로 가난한 상태는 복이며 그로 인해 마음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이 복이 되지 않고 구원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난함 자체는 하나님의 저주의 산물일 뿐이다. 사람과 땅이 이렇게 연약하고 척박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 본래 하나님은 부유하신 분이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땅도 풍성한 것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마귀의 거짓말에 빠졌기 때문에 모든 풍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의 모든 부를 거두어 가신 것은 사람으로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사람의 가난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28.사람의 참된 양식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1-34)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은 목이 말라서 물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그는 여행에 지쳐 목마르고 시장했다. 그의 육신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당장 얻어먹어야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영혼의 갈증을 느끼며 영적 기아(飢餓)에 빠져 있는 한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주님은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필요는 제쳐놓고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그녀에게 제공하셨다. 그러자 그의 육신적 곤고함은 사라지고 그의 몸과 마음은 새로운 생명과 활력으로 충만케 되었다. 제자들에 나중에 와서 먹을 것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삶이 만일 육신에 있다면(육신적 생명의 유지가 삶의 전부라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육신이 좋아하는 것이 채워질 때 그는 비로소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면 육신의 형편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영의 만족이다. 우리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모든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본래 자리는 육신이 아니고 영이다. 사람이 본래 그렇게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가 타락하여 이 지위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아들로 회복된 우리의 삶의 자리는 확실하게 영에 있다. 


그러므로 죽고 사는 것이 육신의 형편에 달려 있지 않으며 만족과 기쁨이 육신의 형편에 달려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알파와 오메가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바 사람의 참된 양식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식물에게 햇빛과 물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뜻)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하고 배부르고 만족케 하는 우리의 참된 양식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음 받았고 그것이 있어야만 만족이 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영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서만 온다. 그리고 이 만족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허무하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온 우주를 향해 선포하셨다.(마4:4) 그렇다. 사람은 결코 떡으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다. 주님은 그의 일생을 통해 이것을 입증했다. 그는 말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것을 입증했다. 그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 그의 영혼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의 육신도 만족했다.  


먹어야 산다는 것은 일반적인 삶의 유지 방법이지만 절대적이고 유일한 법칙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단지 삶을 유지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사는 법은 다양하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다. 하나님이 살게 하셔야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때 비로소 사람은 사는 것이다. ‘먹고’ 산다는 것 즉 음식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햇빛과 비로 산다는 것이다. (식물이 그것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 햇빛과 비를 누가 내려주시는가? 결국 그 어떤 방법도 사람 스스로 사는 것은 아니며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귀신 들린 자가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돌로 자기 몸을 계속 찍는데도 생명을 부지하며 더구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막5:1-5)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가 다소간의 육신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권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 육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활력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일생은 이것을 실험하고 입증하는 일생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항상 그러한 양식을 먹고 살았고 또한 오늘 우리를 그러한 세계로 이끄신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