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주님의 때와 사역
요한복음 2장
14.주님이 처음에 어머니의 요구에 응하시지 않음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2:1-4)
주님의 모친 마리아는 그녀가 초대받은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그 사실을 주님께 알렸다. 주님더러 어떻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일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제 때가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라는 말로 모친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부했다. 주님이 선뜻 일 처리에 나서지 않으신 것은 그때가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때란 어떤 때인가? 주님이 세상의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릴 때이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채워주는 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헤아리고 채워주는 것이다. 그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주관하는 왕의 사역 중 하나이다. 우리의 왕은 모든 면에서 세상을 돌보실 것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형편을 살피고 우리의 필요를 부족함 없이 완전하게 채우실 것이다. 주 예수님은 장차 바로 이러한 왕이 되어 우리의 필요까지 채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의 왕이 되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때는 이르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은 주님이 세상의 왕이 되어 만물을 다스리는 상황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건지는 상황이다. 왕이 되려면 먼저 나라가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 복음(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있으니 와서 참여하라는 소식)이 전파되어야 한다.
이처럼 주님이 (처음에)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의 왕이 되어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건져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혼인집의 포도주를 채운다는 것은 그 내용으로 볼 때 결혼을 장려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기쁨과 흥(즐거움)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런 일도 필요하며 중요하다. 결혼도, 즐거움을 누리는 일도 인생의 한 부분이요 삶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이가 할 일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 일도 하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혼인 잔치집에 흥을 돋구기 위해 포도주도 있어야 한다. 사람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집을 짓고 포도를 심고 그 산물(포도주)을 즐기는 것은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며 그것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며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도 밥을 먹어야 하며 잠을 자야 한다. 구명보트 위에서도 생활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구조를 받는 것이다. 이 일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거꾸로 된 것이다.
주님이 잔치집의 포도주를 만드신 것은 혼인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정하신 것이며 인간의 즐거움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세상의 상황이 어떠하며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하냐 하는 것을 상기시키신 것이다. 세상은 지금 결혼과 잔치로 기뻐하며 즐길만한 평안한 상황이 아니라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위기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결혼은 하더라도 이것을 기억하고 해야 하며 포도주를 마시더라도 이것을 기억하고 마시라는 것이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6-29)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14:16-20)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形迹)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4-31)
이 말씀들은 곧 지금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냐 하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지금의 상황은 할 수 있다고 모든 일을 다 해도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비상시국(非常時局)이며 깨어 기도해야 하며 구원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 주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치실 때도 그들의 영혼을 고치는 일을 항상 생각하고 계셨으며 광야에서 양식을 제공하셨을 때도 그들의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을 항상 생각하고 계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러한 인식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구원, 은혜)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오직 육신의 일만 생각했을 뿐 자기 영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이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고 또한 구원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압제, 질병과 가난 등으로) 그들의 육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지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는 세상의 실상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알았으며 자기를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온갖 일을 다 할 수 없고 결국 ‘세상을 구원하는’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눅4:42,43) 주님은 장차 세상의 주와 왕이 되셔서 만물을 다스리며 만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고 난 다음의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맛있는 음식과 육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술)을 먹고 즐기는 것도 좋다. 그리고 아름다운 먹거리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탐닉하고 즐기는 것도 좋고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도 좋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누리라고 주신 것들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양이 구덩이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목자가 한가로이 초원의 풍경을 감상하며 목가(牧歌)를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목숨을 잃게 되면 다 소용없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5-37) 죽을 상황이 되었으면 살 궁리부터 해야지 다른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덮어놓고 육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다 제목으로 삼아서는 안 되며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할 때 육신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결정하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 때든지 세상이 지금 파선한 배와 같이 ‘물(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벧후3:7) 곧 죽게 된 사람이 마치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한가하게 세상에서 모든 것을 즐기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가 할 일은 일단 돈을 버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일단 돈을 벌어 미래를 안전하고 만들어 놓은 다음, 그리고 자식을 다 키우고 홀가분하게 된 다음, 교외에다 전원주택을 짓고 목가적 삶을 즐기며 노후를 보내겠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자기 처지를 모르며 세상의 현실을 망각한 데서 나온 어리석은 생각이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12:16-20)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포도주를 즐길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15.주님이 결국은 어머니의 요구에 응하심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5-10)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처음에는 어머니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들어주셨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의 육신적 필요까지 다 채워주는 완전한 통치의 때가 이르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어머니의 부탁을 결국 받아들여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주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주님은 그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둘째, 어머니의 믿음에 응답하기 위해서이다.
마리아는 그녀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고 또한 그가 세상(사람)을 사랑하는 분이며 사람들의 필요를 헤아리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랬기 때문에 잔치집의 어려운 사정을 주님께 고한 것이다. 그 문제를 주님께 제기했을 때 그녀는 기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믿었으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을 믿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눅5:12,13) 주님은 자기를 신뢰하는 자를 결코 뿌리치지 않는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잔치집의 형편을 돌아보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를 돌아보시는 것이다.
셋째, 자기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곧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육신적 필요를 다 헤아려 주실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가 여전히 사람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의 사정과 형편을 살피며 그들의 삶을 돌보고 배려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주 예수님은 언제나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삶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셨다.
“예수께서 ...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27)
주님은 본래 사람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자 하셨지 육신의 양식을 책임질 생각은 없었다. 주님은 세상에 떡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다. 그것은 (육신의 양식은) 먹어도 배부름이 없고 사람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무리들이 떡을 구했을 때 주님은 그것을 외면하고 오직 생명의 말씀만을 전하셔야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영의 양식(생명)이든 육의 양식(생명)이든 주님은 사람들이 양식(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을 외면하실 수 없었다. 사실 이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의 양식은 필요 없고 육의 양식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 틀린 것처럼 육의 양식은 필요 없고 영의 양식만 있으면 된다는 것도 옳은 말이 아니다.
내용이 무엇이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생명(공급)이 필요하다. 먼저 육신의 양식을 먹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나중에 영의 양식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먼저 육신의 질병을 고치고 그것을 계기로 나중에 영혼의 병을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육신적 형편도 외면치 않고 돌아보려 하신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그의 삶을 돌아보려고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맹물을 떠오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일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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