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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과 생명과 그리스도

이상봉 2010.05.04 14:45 조회 수 : 3183

제16과 생명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3장
 

22.영적 기쁨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22-30) 


주님과 세례 요한이 세상에서 잠시 함께 활동하신 시기에 요한의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이 주님과 요한 중에 누가 큰지 누가 참 메시아인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그 무렵 요한에 이어 예수님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가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을 본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도리어 그 일은 시기와 질투를 느낄 일이 아니라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며 너희들도 다 그에게로 가서 그를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의 참된 기쁨과 만족은 ‘영’의 만족에서 온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나 폭식증(暴食症)에 걸린 사람은 밥을 먹었는데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胃)가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뇌(腦)가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의 만족이 없는 인생이 바로 이와 같다. 사람은 그 영이 만족하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어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영이 만족을 느끼면 아무리 그 육신적 삶이 가난하고 곤고해도 그의 마음은 부유하며 기쁨과 행복, 자유와 여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세례 요한은 경쟁과 소유의 길에서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즉 영의 안식을 추구하는 길에서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방향을 잘 잡았으며 줄을 잘 섰다. 만일 사람이 경쟁과 소유의 길로 들어선다면 그는 세상 만인을 다 물리치고 일등이 될 때까지 만족과 기쁨이 없을 것이며 세상 모든 것을 다 손에 넣기까지는 만족과 기쁨이 없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늘 일등만 하여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한 사람이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는데 1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연수원 교수로부터 “너 그것밖에 안 되느냐? 왜 공부를 그것밖에 못하느냐?”는 꾸중을 듣고는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어떤 사람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사법연수원에서는 ‘열심히 하면 하위, 죽도록 공부하면 보통’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하니 거기서 (경쟁으로) 무슨 안식을 얻겠는가? 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 같은 사람들만 모아놓은 곳에 보내 경쟁을 하게 하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온 세상에서 일등을 한다 할지라도 인생에게는 여전히 만족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그에게 아직 경쟁 상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14:12-1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가 낭패를 당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사14:15-17)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경쟁과 소유의 길에 서서 끝없이 싸우고 끝없이 취하고 끝없이 비교하며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악인의 꾀를 좇는 것이며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이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추구해야 할 자인지를 알았다. 그는 인생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4,5) 요한이나 바울은 누구와도 경쟁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 

 

사람과 경쟁하는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과도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랬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와 다투었으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인정과 기쁨을 구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그리스도)과 경쟁할 자가 아니라 그를 위하며 그의 영광을 전파할 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잘 되면 잘 될 수록 더 만족이 되고 더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 지음 받은 자리에서부터 벌써 성공과 성취를 얻기 때문이다. 즉 사람으로 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부를 상속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의 길은 탄탄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지지하고 보호하는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하나님)와 경쟁해서 이김으로써 영광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랑의 친구가 신부로 말미암는 기쁨을 얻을 수는 없다. 이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리를 뺏고 하나님이 지닌 영광을 얻을 수 있겠는가? 마귀의 거짓말 중의 거짓말, 망상 중의 망상이 바로 이것이다. 길은 오직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두신 자리에서 감사하고 순종하며 자기 일을 하는 것이다. 요한의 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랑의 기쁨을 추구한 자가 아니요 신랑 친구의 기쁨 곧 신랑이 기뻐하는 것을 추구한 자였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쉽고 평탄했으며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우리의 길이다.  


23.생명과 그리스도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1-36) 


요한은 여기서 하늘로부터 온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이 지닌 중요한 특징 하나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진리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및 그것을 말하는 자)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실 정해져 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택하심)에 의해서만 이러한 지식(계시, 통찰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8,29)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또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택하신) 자’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거나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할 수 없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하늘(하나님)에 속한 분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분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고 오직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말씀)을 가진 자라야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는 자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참으로 인정하지(믿지) 않는 자라는 말이 된다. 주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 하고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속에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언약(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인(印)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무시했으며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는 시각 - 이방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문제이며 모든 것은 너희의 죄와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적한 사실을 (선지자들을 죽이거나 거부함으로써)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을 또한 그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과 행동)을 참되다고 인치지(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 자이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다. 그를 받아들이면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형제들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며 그 말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않은 자이다. 

 

요는 진리(말씀)를 사랑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진리의 사랑을 입은 자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한 자이다. 진리의 사랑을 입지 못한 자는 다른 것의 사랑 곧 마귀의 거짓말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마귀의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 모든 속임수를 사랑하고 신뢰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2:9,10)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때는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위하고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돈과 거짓 명예와 사람의 사랑(영광)을 얻고자 하여 그랬던 것이 그들이 뒤에 행한 모든 일을 통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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