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안식의 근거
요한복음 2장
17.들음과 깨달음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3-22)
제자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처음 들을 때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일이 많다는 사실과 처음에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른 후에 성령의 감동에 의해 결국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일도 많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을 때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성전이 바로 주님 자신을 가리킨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성전이 사흘만에 다시 일으켜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들을 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새겨듣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깨달아질 것이며 특히 ‘말씀의 성취’를 통해 말씀의 진실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이 당장 깊이 와 닿지 않더라도 그것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씀들은 언젠가 우리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말씀은 죽은 듯이 있다가도 때가 되면 사람 안에서 생명의 싹을 틔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계속 읽어야 하며 계속 들어야 하며 계속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끝까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18.사람을 의지하지 않음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23-25)
주님은 사람에게 자기를 의탁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생애에서 일관된 태도였다. 요한복음 5:41,42, 6:14,15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이 이적을 행하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즐거워하며 따랐다. 그때 주님은 그들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셨을 뿐 그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주님도 사랑과 위로와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는 있었다. 다만 사람에게서 그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만 있었다. 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의 일로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주님이 사람을 의지하지 않은 것은 그가 사람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한계를 알고 계셨다. 그렇다고 주님이 사람을 싫어하거나 사람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신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 인간이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 당시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진실했고 참으로 주님을 믿고 따랐다. 그들은 믿을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서부터 깊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을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일시적이며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주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단지 그들의 필요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와 영생을 사모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랐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 속에 계시(참된 영적 지식)가 분명치 않은 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언젠가 주님을 떠나거나 배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며 환호할 때도 거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거절하거나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도 낙심하지 않았으며 전에 따르던 자들이 배신하고 떠날 때도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 한 분께만 마음을 두고 그에게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다.
예레미야 17:5-8의 말씀과 시편 146편의 말씀이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146:1-9) 이사야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사람은 의지할 가치가 없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사람은 남을 도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큰 권력과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제법 힘이 있어 보이지만 그도 죽을 운명을 지닌 연약한 인생이기는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쁘다. 코를 오분만 막으면 다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에게 궁극적인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갈대를 지팡이로 짚고 일어서려는 것과 같다.
둘째, 사람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혹 다른 사람을 도울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과 달리 사랑의 마음과 공의의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너무나 인색하고 이해타산(利害打算)적이다. 사람은 남을 돕더라도 ‘도울 만한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 그리고 무언가 돌아올 것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영 형편없는 사람에게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움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실제로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다 그 육체와 정신이 곤고하고 미약해진 사람이므로 여기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형편이 좋고 남 보기에 그럴듯한 사람 같으면 왜 도움을 필요로 하겠는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항상 감사할 줄 알고 받으면 즉시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공의는 서로 다른 성질인 것 같지만 실은 언제나 같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공평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쌍히 보이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불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다. 그러나 사람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대단히 편파적이고 이기적이며 주관적(감정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의지한다. 그런 사람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함께 의지하면 사람은 반드시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쪽보다 눈에 보이는 쪽을 택하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동시에 사람도 의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으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시지 않았다. 주님이 전혀 어려운 상황에 처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주님이 보통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그의 일생은 낙심과 실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사야 49:4上은 주님의 심정을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 하였도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는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반응에다가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만 기대를 걸고 소망을 두고 있었다.
이사야 49:4下는 말한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으리라.” 이사야서 42:4도 주님에 대해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라고 묘사했다. 주님이 만난 환경은 정말 실망스럽고 괴로운 것이었지만 그는 아래를 쳐다본 것이 아니라 위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그는 세상의 구주로 또 사람들의 생명과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처음부터 주님을 거절했다. 그는 마지막에 사랑하던 제자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다 이루었다”고 말했다. 우리 같으면 “다 끝났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것이다.
주님이 이런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승리는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고 또 참으로 사람을 안 데서 온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때도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알았고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알았다. 반대로 사람들의 환호를 받을 때도 사람들의 교활함과 이기심과 연약함을 알았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마11:27)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 “내가 ···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하나님을 만족으로 삼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추구하며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자세는 이러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람에게서는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혹 주님께서 우리에게 환난과 징계를 주신다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안에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이루는 유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장에는 주님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신 일이 나온다. 그때 주님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조차 주님을 칭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요5:41) 사람들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면 기뻐하고, 비난을 퍼부으면 실망하지만 주님은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근본적으로 바라지 않았고 또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는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그때는 몇 천 명이 모였다. 사람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주님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거절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미 그가 왕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으로 인해 그의 마음을 충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 되기를 갈구하는 사람만이 사람의 도움과 추종을 기뻐하지 이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족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은 우리에게 주님이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때 주님은 온 유대와 이방에까지 유명한 분이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를 경배하러 왔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서로 말하기를 “볼찌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했다.(요12:19)
겉으로 볼 때 주님은 대적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분명히 크게 승리하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도리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 는 말씀을 하셨다. 승리의 시간에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자세를 배워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내일은 우리에게 발을 내밀지도 모른다. 주님은 오늘 호산나를 부르는 자가 내일 그를 없애라고 소리지르는 자일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마음이 동요되거나 낙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별히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에게 무엇을 의지하거나 기대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자신을 주기만 하고 그쳐야 한다. 그들에게서 무슨 반응이 있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16:31-33)
만일 누가 우리를 인정하고 우리에게 명예와 위안과 영광과 부귀를 주려고 하면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자. 다만 우리가 그 속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 우리는 그때 자신을 그들에게 맡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인정하고 높이며 친절을 베푸는 것에 감동되지도 말고 그들에게 무엇을 더 해달라고 기대하거나 요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 터무니 없는 비난이나 혹은 이유 있는 비난을 퍼부으며 헐뜯을 때도 놀라지도 말고 대응하지도 말고 내버려두자.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받으면 유익할 것이고 참되지 못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시며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에만 관심을 기울이자. 그러면 참된 만족과 안식이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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