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과 잡히신 그리스도 (1)
요한복음 18장
125.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음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데리고 주님을 잡으러 왔다. 그들의 손에 등(燈)과 횃불, 무기(칼, 망치 막14:43)가 들려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이 밤에 주님을 잡으러 온 것은 민중들의 눈이 무서워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큰 권능을 가진 주님의 저항이 두려워서 몰래 기습(奇襲)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으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주님이 그 동안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체포하지 못한 것이다.(막14:49)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큰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그 역시 두려워했다. 주님이 잡힐 때 기적을 일으켜 저항하면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리 치밀하게 작전을 짜서 차질 없이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막14:44)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정작 주님은 무리가 자기를 잡으러 왔을 때 조금도 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다가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예수다’ 라고 하면서 순순히 그들의 체포에 응했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에 잡으러 온 자들은 크게 놀랐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사람들은 거기서 압도적인 주님의 권세를 접할 수 있었다.
주님은 무리들이 신호(유다의 입맞춤, 막14:45)에 따라 자기를 체포하려고 부산을 떨었을 때 그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셨다(막14:48,49) 이는 곧 ‘내가 여기 너희 잡아가기 좋도록 조용히 있으니 그렇게 수선을 떨며 어렵게 잡으려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대적들이 주님을 ‘잡는’ 것이 아니라 때가 이르매 주님이 대적들의 손에 스스로 자기를 넘김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간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18) 왜 대적들이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자들을 잡을 수 없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를 가졌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
물론 그때까지 주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탁월한 권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주님과 달리 무리들이 자기들을 잡으러 왔을 때 결국 다 도망가고 말았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14:50,51) 그러나 그들이 마침내 자기 속에 하나님이 두신 놀라운 생명의 권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주님처럼 담대하고 권세 있는 삶을 살았다.(행4:18-20)
죽음에 직면하신 주님이 이렇듯 여유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마귀의 사망 권세의 실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져야 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으므로 다만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죽고 사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그의 뜻을 이루는 그 한 가지에 있었다. 우리도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일은 사람의 뜻이나 마귀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죽음이 닥쳐왔을 때 마귀가 우리를 죽이는 것 같고 사람이 우리를 죽이는 것 같고 병균이 우리를 죽이는 것 같아도 실은 하나님이 때가 이르매 우리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전에 제자들에게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10:28)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 때 두려워하지 않으며 요동치 않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주님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애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시기 위함’이었다.(히2:14,15) 주님은 어떻게 사망 권세를 물리쳤으며 어떻게 마귀를 없앨 수 있었는가? 정면으로 죽음에 도전함으로써 가능했다. 사람이 마귀를 능히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바로 이것이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받아들임으로써,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영생, 부활 생명)을 나타냄으로써 주님은 마귀를 무력화시켰고 그의 최고 무기(사망)를 무력화시켰다. 그리스도가 나타낸 모든 권세 중 가장 놀랍고 위력적인 권세가 바로 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권세’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속에 있는 영생을 의지하여 얼마든지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키며 마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이 권세는 주님 자신뿐 아니라 그의 생명을 받은 우리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피하거나 마지못해서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도리어 즐겨야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5:1-4)
마귀의 최고 무기가 사망 권세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이것으로 얼마든지 사람들을 협박하여 자기 뜻을 따르게 만들 수 있다. 누가 이것을 물리칠 수 있는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이다. 누가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죽음 이후에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자이며 육신의 생명보다 더 나은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이것을 가진 자 곧 부활 생명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처럼 주님은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지 않고 더 큰 목적을 위해 스스로 버릴 줄 알았기 때문에 마귀를 이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 생명을 받은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마귀가 시키는 대로 종노릇할 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이며 필요하면 스스로 목숨도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권세를 항상 인식하고 항상 사용함으로써 범사에 마귀를 잡아야 한다.
126.베드로의 용기
군대와 대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주님께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빼들고 용감하게 나서서 그들과 맞섰다. 주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은 숫자도 많고 강력한 무장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베드로는 개의치 않고 그들을 대적했으며 마침내 대제사장의 종(말고)에게 칼을 휘둘러 그의 귀를 베기까지 했다. 귀를 베었다는 것은 (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목을 겨냥했는데 빗나가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 사회의 가장 큰 권력자들이 보낸 사람들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은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아무 것도 겁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며 그의 행동을 만류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22:51)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며 위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마음과 용맹은 전에도 표현된 바 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6,37)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베드로가 얼마 후 주님을 부인함으로 배신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하며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나중에 결국 베드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실제로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다. 이 어찌 된 일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베드로에게 할 질문이기 전에 베드로가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할 질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정말로 자신이 그렇게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행동(용감한 칼 휘두름과 그 후에 있은 배신)과 주님의 예고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도 용감하지 않으며 용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부활 생명을 누릴 수 없으며 부활 생명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죽음 앞에 용감할 수 없으며 죽음 앞에 여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대적들이 끊임없이 주님과 제자들을 노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그 동안 그렇게 대담하고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으며 그의 능력과 권세를 친히 목격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믿음과 담대함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잡히고 홀로 남게 된 베드로가 이전의 용맹과 담대함을 상실하고 여자 종의 말에도 두려워하는 졸장부(?)가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의 위협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속에 부활 생명을 지닌 사람, 그 생명의 위력을 깊이 인식하며 믿음으로 누리는 사람뿐이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게 만드는 생명의 능력이었으므로 주님과 함께 있는 동안 베드로는 용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이 떠난 지금, 세상에 자기 홀로 서 있는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주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위해 칼을 휘두른 그때나 계집종의 말에 주님을 부인한 그때나 베드로는 베드로일 뿐이었다. 아담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는 언제나 약하고 작은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주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에 잡힌 그는 언제나 견고한 바위(베드로라는 이름의 뜻)였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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