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과 잡히신 그리스도 (2)
요한복음 18장
127.성도의 생명을 보전하시는 하나님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18:7-9)
주님은 자기를 잡으려고 온 무리들에게 ‘내가 여기 있으니 나를 찾았으면 이 사람들은 보내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살려서 보전(保全)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들은 주님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시자마자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14:50)
주님은 전에 제자들에게 목숨보다 귀중한 참 생명을 얻기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여기서 목숨과 몸은 사람의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음식과 의복으로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쏟으며 심지어는 목숨 자체를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음식과 의복 위에 목숨(몸)이 있고 목숨 위에 영혼(참 생명)이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이 사람(제자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 영혼을 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은 당연히 보전되어야 하며 몸이 보전되려면 음식과 의복은 당연히 공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는 어떻게 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까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그가 얻은 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어떻게 잃지 않고 보전할까를 염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2:1)
제자들이 주님을 두고 도망한 것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헛일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들의 손에 내어주지 않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 아니라 주님이 잡혀간 대제사장의 집으로 따라가서 항의 시위를 벌여도 될 뻔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생명을 위하시며 보존하신다. 육신의 생명(목숨)조차 그렇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더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원수(마귀)가 항상 사람(특히 성도)의 생명을 노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로 유지되는 것이지 물질로 보전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적 수단으로 보전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인간 편에서 노력과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으며 더 나아가서 (살기 위해) 악을 행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믿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처리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이상으로 우리(사람)의 목숨(몸)을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친히 그것을 보전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시며 그 목숨을 보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죽을 때가 되면 죽고 잡힐 때가 되면 잡힐 것이지만 일할 동안에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 8-10)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우리가 할 일은 목숨을 잘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의와 진리를 위해 인생을 잘 쓸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 인생을 잘 보전할 것에 대해 생각하시는 것이 순리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의 생명을 보전하신다.
그러므로 생명을 보전하는 참된 지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해 신경 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것은 잊어버린 채 영생을 추구하며 달려가는 것이다. 육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영의 필요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이것은 바로 주님 자신의 삶의 원칙이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10:14-17)
128.가룟 유다
믿음이 없음으로써 실패한 제자들의 행위 가운데 으뜸이 바로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판 것이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달려가야 할 사람들의 선두에 주님의 열 두 제자들이 서 있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들의 육신적 야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자기 뜻과 소원을 가진 채로 주님을 따랐다. 그들의 소망은 전능한 메시아를 통해 자기들이 영광을 얻으며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결국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 가운데 특히 유다가 크게 실패했다. 그는 주님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은 30을 받고 넘겨주는 어리석은 일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27:3-10)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 회계를 맡은 자였고 또 유일하게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대 출신이었다.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보건대 유다는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총명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주님을 팔고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가 그렇게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 편에서의 이유도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유다가 주님을 판 것은 일차적으로 ‘돈이 탐나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가 주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 30은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가 선생을 팔아서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주님을 판 후에 주님이 유대법정에서 정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되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주님을 판 대가로 받은) 은 30을 성전 금고에 던져 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렇다면 유다가 주님을 판 것은 주님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다. 유다는 그 동안 주님에 대해 헛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한 것은 주님이 원수들의 손에 괴롭힘을 당하게 될 그 동안의 (가만히 참고 있던) 태도를 바꾸어 능력으로 원수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하게(?) 원수들의 손에 잡혀서 죽고 말았다.
유다가 주님에 대해 엉뚱한 시도를 한 것은 그가 주님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유다뿐 아니라 제자들이 다 그랬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주님의 뜻과 주님의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다는 특히 야망적인 사람이고 영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계획과 야망을 주님을 통해 이루어 보려고 주님을 따라 다녔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의 해방되는 것과 다윗 왕국의 재건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거기에 편승한 자신의 출세 같은 것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주님을 따라 다녀도 그런 일이 이루어질 전망이 보이지 않자 급한 나머지 주님을 원수들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유다는 실패했으며 실족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좋은 계획이든 나쁜 계획이든 주님의 계획과는 다른 ‘자기 계획’을 가지고 주님을 좇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영리했기 때문에 더 빨리 그리고 더 확실히 실패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한 번 주님을 따른 이상, 주님을 믿고 자기 생명을 맡긴 이상,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의 뜻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형편과 사정도 아마 주님 당시의 제자들과 비슷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유다처럼 될 수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완전히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성령으로가 아니고서는 주님을 삼 년 간이나 직접 따라 다녔던 제자들도 그것이 안 되었던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 대해서도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신통치 못하게 주님을 따르며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주님을 소홀히 하며 주님을 이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도 주님은 당장 우리를 크게 책망하고 심판하시지 않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가 잘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래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모든 것을 깨닫고 온전케 되기까지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희생적인 사랑으로 본을 보이시며 생명을 주시며 우리가 당신의 세계로 깊이 들어오게 되기를 기다리신다.
주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어떠한지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오래 참고 받아오셨거니와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도 그들이 순순히 도망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주께서 장차 제자들이 다 자기와 같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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