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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과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이상봉 2010.05.05 14:53 조회 수 : 6817

제79과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요한복음 19장

 

142.그리스도를 은밀히 따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沈香)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38-40)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시체를 찾아가서 장사한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 그리고 전에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주님의 장사(葬事)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 왔다. 요셉은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둔 묘실에 주님을 장사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공회 회원으로서 (요셉의 경우는 부자이기도 했다) 주님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다. 단지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밖으로 드러내놓고 따르지 못하고 은밀하게 따르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던 그들이 주님이 죽은 후에는 변했다. 유대 권력자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서 정중히 장사지내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요셉과 니고데모는 기꺼이 그렇게 했다. 


요셉은 공회원이고 부자였지만 (누가의 증거에 의하면)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마가의 증거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눅23:50-53)   


니고데모 역시 공회원으로서 권세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메시아)을 기다리는 자였으며 메시아라고 소문난 예수께 관심을 가지고 밤에 찾아가서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요3:1-7) 그 결과 그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따라서 아리마대 요셉처럼 공회가 예수님을 잡아죽이고자 할 때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요7:50,51)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주님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공개적으로 주님을 따르지 못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버리기 아까운 세상 영광과 소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 곧 세상 영광을 포기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도 추구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오는 영광도 추구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한 것이다. 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다.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12:42,43)  


요셉과 니고데모는 육신의 욕망과 영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최종적으로 영의 요구에 부응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주님이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다. 그때라도 그렇게 선택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고 또한 주님이 부활하신 후 그들을 만났을 수도 있으므로 완전히 기회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놓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직 육신에 있고 땅에 있을 때 곧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때, 그리고 하나님(그리스도)이 세상에서 멸시와 외면을 받을 때 우리가 그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높이고 따르는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 하늘에서는 마귀가 이미 쫓겨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있다. 문제는 땅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 9,10)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가 세상에서 외면되고 멸시를 받을 때 찬송되고 높여져야 한다.  


요셉과 니고데모에게 있었던 더 큰 손실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때 섭섭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그들이 주님이 땅에 계신 동안에 주님을 따름으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삶은 세상으로 인해 (육신적) 어려움을 겪는 것 이상으로 큰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으로 인해) 사람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임하며 사람의 자랑을 상실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속에 깃들게 된다. 이것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다만 상실이고 다만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1-44) 요셉과 니고데모는 큰 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서 그리스도를 따랐지만 마지막(주님이 죽은 후)에라도 담대히 나서서 그리스도의 제자를 칭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부자가 하늘의 부자를 능가할 수는 없다. 70살까지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모른다 하다가 영원한 삶을 놓치는 사람은 ‘70년’이 ‘영원’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좇다가 33살까지 살고 더 살지 못하는 쪽을 택한 것은 70년(당시 인간의 일반적인 수명) 인생보다는 영원한 삶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 곧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부유하다고 할 수 있다. 물질적 여건, 건강, 사회적 안정,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처지에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을 최소한 이전 사람들과 비교해서 부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누리는 부 역시 흠결이 있고 불완전한 ‘땅’의 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마음을 두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7)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 재물 이 둘은 항상 경쟁하는 것이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이다. 우리 안에 세상 영광과 사람의 영광, 육체의 자랑이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로 누려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 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 24)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단순하고 분명해야 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나마 막차를 탔지만 끝까지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 미적거리다가 주님을 영원히 따르지 못한 채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결국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세상에 남지 못하고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드러내었다.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더 이상 숨지 않고 당당히 자기들의 제자 됨을 나타내었다.  

 

물론 그 후로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행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이 더 이상 유대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놓고 따르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무죄한 예수를 결국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악함과 위선을 분명하게 경험한 것과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쨌든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께 결국 나왔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광이요 특권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대적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합당한 자들만 주님을 따르도록 제한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57-62)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14:25-27) 

 

주님께서 부르신 자는 결국은 세상에 남지 못한다. 결국은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자는 불쌍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19: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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